억영월자마대산(憶寧越自馬垈山)-영월을 그리며 마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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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 작성일14-07-15 23:53 조회2,399회 댓글0건본문
억영월자마대산(憶寧越自馬垈山)-영월을 그리며 마대산에서
2014년 7월 초엿새(일요일), 철마는 마부를 포함하여 45인이 탑승하여 심훈의 『상록수』 작품 속 여주인공이 활동했던 무대 앞을 지나, 그녀의 짧은 생애만큼이나 한 식경의 여유도 부리지 못하고 도심을 뒤로하고 저 멀리 피안의 땅, 천만리 머나먼 길을 향해 박차를 가한다.
영월(寧越)의 옛 지명이 내생(奈生)과 내성(奈城)이다. 지명에서 극락과 나락(奈落)의 의문을 시사한다. 2009년, 하동을 김삿갓면으로 서면을 한반도면으로 개칭하였는데 친숙하여 정감이 간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폐위 강등되어 도달한 청령포와 그가 잠든 장릉의 언덕과 할아버지를 모르고 북계에서 홍경래의 난을 피해 내려와 자란 삿갓 쓴 소년이 잠시 머물렀다. 단종은 사릉(思陵)의 정순왕후(定順王后) 여산송씨(송현수의 녀)와 헤어지며 눈물을 감추고 뱃길로 원주까지 왔다고 실록은 전한다. 봄에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귀양길에 물이 말랐고 돌무더기(노산대)를 쌓던 여름엔 물이 불어 동헌 객사로 자리를 옮겼다. 좌천의 땅이고 노역의 언덕이었다. 사약을 전하는 의금부도사가 고운님께서 편히 잠드는 것을 보고 냇가에 앉아 시름을 달래며 다음날 떠났다.
◯왕방연(금부도사) 시비 - 청령포 앞 길가에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해설 - 437리(여지승람)를 되짚어 가야하는 금부도사의 애절한 공감각적 하소연.
마대산(馬垈山)은 소백산맥의 지맥으로 아래에 소개하는 10승지 중 영월과 단양의 경계를 공교롭게도 관통하고 있다.
◯조선의 금서 『정감록』외 기서류와 비기 속 십승지 일람(무순, 큰지명)
풍기(금계마을), 예천 용문(금당실), 봉화 춘양, 합천 가야산(만수동), 영월 정동쪽 상류, 단양의 영춘(永春, 과거 영춘현), 속리산, 공주 유구와 마곡, 남원 운봉, 무주, 부안(호암 아래)
등정코스는 김삿갓묘를 출발하여 생가를 지나 정상(△1,052)을 거쳐 전망바위와 처녀봉(△930)을 타는 원점회귀로 길을 잡았다.
초입에 김삿갓 묘 앞에서 시인의 지난한 삶에 경애를 표하며 나름의 성호를 긋고 그가 정착한 생가를 찾았다. 두어 칸의 방과 마루에 굴뚝이 처연하다. 난고당(蘭皐堂) 앞에는 접을 하지 않은 수령이 꽤 오래된 고욤이 가지마다 바글바글하게 달려 커가고 있었다. 시인은 이곳에서 경전을 읽고 화전을 일궈 어머니를 봉양하며 영월 동헌에서 열린 향시에서 장원을 했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으로 뒤숭숭한 민심을 읽었던지, 시제는 얄궂게도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이었다. 풀이하면, "정가산(가산군수 정시)의 충성스런 절개의 죽음을 논평하고 하늘에 닿은 김익순의 죄는 탄식하라."는 내용인데, 시인은 통렬한 비판과 유려한 필력으로 답지를 제출하고 집으로 와, 그 밤에 자신의 존재를 알고 짐을 꾸려 방랑길에 나선다.
◯정시(鄭蓍, 1768-1811)- 가산군수(嘉山郡守)로 부임했다 홍경래군에게 붙들려 죽었다.
◯안동인(세칭 장동김씨) 김번(金璠) 이후 세계 소략
김번(金璠)-생해-극효, 원효
생해-극효-상용, 상헌
생해(신천군수)-원효(군기시정)-상준(형조참판)-광위-수규(壽奎, 진사)-성구(盛久, 성균생원)-시태(時泰, 황해병마절도사)-관행(觀行, 전의현감)-이환(履煥, 경원부사)-익순(益淳, 선천부사 겸 방어사)-안근(安根)-병연(흔히 김삿갓)
위 가계를 통해 짐작이 가듯 당시의 위세로 영월로 들어오기 전에 시인은 조부와 관련한 연좌에서 풀렸고 따라서 향시의 과장에 들어갈 수 있었기에, 이 일로 인해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새옹지마)도 깨닫는다. 왕조시대 민란의 비극과 참화를 겪어야 했던 시인의 애통함에 전율을 느낀다.
◯안동김씨는 관향(본관)이 같은 동성동본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데 흔히 "안동김씨"하면, 김알지를 비조(鼻祖, 출생 시 코가 제일 먼저 나온다 함)로 하고 신라 끝 임금 경순왕과 고려태조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의 사이에서 난 김은열의 아들 김숙승을 시조로 하고 고려후기 김방경을 중시조로 하는 안동김씨를 말하고, 조선조 순헌철종조에 세 왕비[순조비(조순의 녀) 헌종비(조근의 녀) 철종비(문근의 녀)]의 친정이 되는 안동김씨는 고려초 고창(안동)성주였던 김선평을 시조로 하기에 흔히 "(후)안동김씨"라 불린다.
산행길은 포근했다. 우산나물과 (참)나리, 원추리 등이 이제 막 오렌지 꽃을 피우며 반겼고 하얀 꽃이 떨어진 층층나무 아래에선 산수국이 드물게 그 존재를 알렸다. 정상 가까이에서 목단과 작약꽃 향이 묻어났다. 아주 오래된 향이다. 신라 선덕여왕이 그림을 통해 짙은 향을 맡았다고 기록은 전한다. 하산 후 개망초에서 같은 향기가 났음을 알았다. 정상에서 사진을 찍는 걸 구경삼아 점심을 나누다 소나기를 만났다. 찬비가 몸을 부수며 차갑게 지나간다.
식사자리를 접고 하산하여 임도로 나오는 길에 능금나무(애기사과)와 개(산)복숭아, 호두나무 그리고 추자(楸子, 가래)나무도 보았다. 마대산은 나무에 대한 종의 기원이다. 고욤(감)과 능금(사과) 그리고 머루(포도)와 다래(키위), 으름(바나나) 그리고 추자(호두)와 산(개)복숭아까지, 그 시원을 볼 수 있음에 행복했다. 되짚어 하산하니 땀이 비 오듯 하여 남녀노소가 어울려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방랑시인의 뫼를 다시 만났다. 석양의 산그림자 속에서 시인의 뫼(묘)와 평평한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눕혀서 쓴 상석이 그의 생애처럼 초연하다. 산의 우리말 "뫼"와 산소(뫼)가 같은 자리에서 어울려 낯설지 않았다. 뫼에서 나고 뫼에서 뒹굴며 떠돌다가 묏자리를 찾아 잠드는 우리 인간의 삶이 능선 끝 소실점에서 함께 포개졌다. 부끄러워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떠돌았던 당신의 생애가 작금의 조정에 출사하는 이들에게 표상이 되었다고, 마지막 하직인사를 흐렸다!
숙부가 왕위를 위협하여 달려간 청령포의 단종은 서강이 요단강이었고, 동헌뜰에서 시제(詩題)를 잘못만난 시인의 동강과 마대산은 건너야하는 여울이고 넘어야만 하는 뫼였기에,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가람과 뫼는 영월을 지키며 전설을 들려주고 있었다. 치악산 휴게소에서 영역표시를 하고 다시 안식처(안산)로 오니 날은 이미 저물고 날짐승들도 보금자리를 찾아 퍼덕거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산우님들 참으로 좋았습니다! 영월 또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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