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신800주년 김방경 학술대회 기조강연-김광철(동아대교수)-2-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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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5-16 11:36 조회3,161회 댓글0건본문
3. 여원관계 성립 후 고려사회
여몽전쟁이 종식되고 여원관계가 성립된 후 고려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일본정벌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전쟁에 따른 피해를 어떻게 수습하고 회복할 것인가, 무인정권이 붕괴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들어선 대내외 환경에서 권력구조와 정치운영, 그리고 정치세력은 어떤 방향으로 편성될 것인가, 농민.천민항쟁에서 제기되어 온 사회경제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회 제부문에 침투하기 시작한 원나라의 요구와 간섭에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같은 해결과제들은 고려사회가 본래 안고 있었던 제반 문제에다 여몽전쟁, 그리고 몽원제국 질서에로 ‘편입’이라는 새로운 국제관계가 착종된 것이었다. 모순론의 관점에서 보면 고려사회에 본래 내재해온 내적모순(계급모순)과 전쟁, 원나라 간섭으로 배태된 외적모순(민족모순)이 중첩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같은 과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거나, 해결의 과정, 그리고 그 결과 등이 여원관계 성립 후 13세기 후반 고려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전쟁은 그것이 승전이든 패전이든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다. 인명의 살상과 대규모 주민이동, 생산력의 저하과 지역경제의 붕괴, 문화유산의 파괴와 약탈, 정신적 공황상태등 문화적 충격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전쟁은 전쟁터에 따라 지역 간 불균형을 심화시키면서 지역주민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규정하게 되며, 양국간 인적 교류와 문화적 교섭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여몽전쟁 수행 과정에서도 이 같은 전쟁의 충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여몽전쟁기 고려사회가 안게 된 문제는 직접 전쟁 수행과 사민입보정책의 추진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토지의 황폐화와 인명의 살상 등 생산기반의 붕괴, 재지이족을 포함한 국내외 인구이동, 개경 도시 및 치소성을 비롯한 군현 읍치 공간구조의 변질, 역로와 도로망 등 교통 통신시설의 해체, 사찰과 대장경으로 상징되는 문화유산의 소실과 반출, 성폭력 등 강제적 인적교류와 문화교섭으로 발생한 문화충격 등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전쟁의 피해와 충격은 여원관계가 성립된 후 전후 복구사업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이들 해결과제들 중에는 전쟁종식 후 해결되지 않은 채 방치된 모습으로 13세기 후반 고려사회의 한 모습으로 자리한 것도 있을 것이고 일부는 여러 정책 수단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해결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토지 황폐화 문제는 사패(賜牌)를 정책수단으로 개간을 장려하고 농무도감의 설치와 권농사 파견 등을 권농정책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타났고, 인구이동 문제는 ‘추쇠’와 ‘안집’으로 대응했으나 유망현상이 줄지 않고 여원관계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로 등 교통시설의 복구조치도 이루어졌으나 원나라의 개입으로 변질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외 전쟁의 피해를 어떤 방식으로 수습하고 치유하여 했었는지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다. 이 같은 문제들은 ‘여몽전쟁의 사회사’ 차원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다음은 국왕 중심 권력구조의 구축과 정치세력 재편의 문제이다. 최씨정권이 붕괴되고 ‘왕정복고’가 표방되었지만, 여전히 김준을 정점으로 한 무신들이 정국운영을 주도함으로써 국왕은 정국운영의 중심에 서지 못했다. 원종 폐위사건은 국왕권의 위기였지만, 오히려 이를 반전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원종을 복위시키는 과정에서 원나라 군대가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적극 개입하여 원종을 복위시킴으로써 타율적이지만 왕권을 실제화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뒤이은 태자 충렬왕의 제국대장공주와 혼인은 몽원을 배경으로 국왕의 권력구조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원 왕실의 지원만으로 국왕이 정국운용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조의 정치기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군사조직을 통해 물리력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이라면 그 자체가 국왕권의 강화를 보진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원관계 성립 후 국가기구가 개편되고 군사조직이 통제당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 같은 체제가 국왕권을 보장해주기 어려웠기 때문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그것은 측근세력의 형성과 측근기구의 설치로 가시화되었다. 충렬왕은 응방 관계자, 몽고어 역관, 내료, 환관 등을 측근세력으로 삼아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조정 관료를 견제하였으며, 비칙치(必闍赤)를 설치하여 측근기구로 활용하였다. 비칙치를 비롯한 코흐치(忽赤)등은 몽골의 케시크(怯薛)제의 구성분자라는 점에서 몽골의 숙위제를 도입하여 국왕중심의 권력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측근정치 방식의 정국운영으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정규 관부의 기능과 충돌하는 한편, 측근세력의 비대화를 가져와 여러 폐단을 낳음으로써 정치운영의 파행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여원관계 성립 후 권력구조의 개편과 함께 정치세력의 진출도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과거의 음서가 여전히 주요 입사로였지만, 여몽전쟁.삼별초항쟁.일본정벌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쟁과정에서 세운 군공을 매개로 진출하거나 승진하였으며, 통역.응방 등 여원관계업무와 관련해 관료로 진출하는 사례도 많이 보인다. 지역적으로는 중부 지역 출신보다 경상.전라도 출신 관료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그 배경에는 여몽전쟁의 전개과정에서 재지이족의 이동 여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료진출로가 다변화 하는 가운데 지속적 관료 배출을 통해 문벌인 ‘세족’으로 성장하는 가문도 확대되었다. 무인집권기 이래 관료를 배출하기 시작하여 세족으로 성장한 김방경의 안동김씨 등 6개 가문이 추가되어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모두 20여개 가문이 세족으로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들이 세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이나 가세를 신장시키는 방법도 다양하였다. 이미 확보된 문벌적 지위를 지속시킨 경우가 있고, 무신집권기 또는 원간섭기에 관료배출을 집중시켜 세족으로 성장한 가문이 많았으며, 무반에서 출신하여 전공을 세웠거나 국왕 측근세력으로 활동하면서 가세를 신장시켜 세족이 된 가문들이 있었다.
세족이 된 가문은 그 성관 전체라기보다는 성관 내 특정 가계이다. 그러므로 성관 내에는 세족이 있을 수 있고, 세족은 아니지만 관료를 배출하기 시작한 가계, 여전히 재지이족으로 남아 있는 가계가 있을 수 있다. 한 성관 내에서 가계를 달리하며 세족으로 성장한 가문이 여럿 있음은 물론이다.
세족이라고 하더라도 경제기반이나 정치 지향에 있어서 동질성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권력구조 내에서 지위나 현실인식의 차이에 따라 분화의 소지를 갖고 있었다. 세족을 비롯한 정치세력은 당시 고려사회가 당면한 현실문제를 둘러싸고 분화해갔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지배세력 범주내에 있으면서도 사회모순에 직면하여 오히려 이를 권력과 재부축적의 기회로 활용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현안문제의 시정과 보완을 통해 체제를 유지시키면서 기득권을 향유하는 집단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후자의 경우는 세족이라 하더라도 개혁을 주도하거나 동참할 수 있었다.
농민항쟁에서 제기되었던 사회경제적 문제들인 토지탈점, 수취체제의 문란, 유망 현상 등은 전쟁으로 더욱 심화되고 여원관계의 전개에 따라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원감국사 충지의 시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전쟁은 ‘고을의 반은 도망간 집이요, 마을마다 황폐한 밭뿐이어서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고, 부모는 하늘보고 울부짖는’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충렬왕4년 가림현(嘉林縣)의 사정에서 볼 수 있듯이 군현 안의 촌락이 제국대장공주의 궁전인 원성전, 왕비 정화궁주의 궁원인 정화원, 장군방.코르치.순군.응방 등에 점탈됨으로써 여원관계 성립 후 부세 납부가 어려울 정도로 민생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전후 복구사업 차원에서 개간 목적으로 시행된 사패정책도 사급전의 확대를 가져오는 등 농장 형성이 수단이 되고 있었다. 국가 재정은 원의 요구가 추가됨으로써 그 수요가 늘어난 반면, 토지겸병의 확대로 말미암아 국가는 재원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토지소유관계의 불균등, 수취체제의 문란, 국가 재정난, 민의 궁핍화 등 농민항쟁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국가재정이 고갈되고 민의 유망화가 가속화 되는 등 체제위기에 직면한 정부와 지배세력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다. 13세기 후반에 마련된 개혁안으로는 충렬왕 22년 홍자번이 건의한 ‘편민십 팔사 (便民十八事)’, 충선왕 즉위년(1298)의 개혁교서가 있다.
이들 개혁안은 토지문제, 수취체제, 행정체제 등의 개혁과 관련된 항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토지문제는 권력층의 초지탈점과 인구집중, 사급전제의 폐단 등을 지적하여 이를 개선하려 했으며, 수취문제는 조세의 총액제 수취방식, 공물의 선납.대납, 염전매제의 염세화, 지방관의 중간수탈 등의 폐단을 해결하려 했다. 행정체제의 정비와 관련하여 개혁안은 인사행정의 정상화, 관리의 감독강화 등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결방안은 토지문제에 대한 대책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탈점의 금지와 처벌, 본 주인으로의 환수, 예속민의 추쇄를 강조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즉, 당시 개혁안은 제도의 운영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던 폐단을 일정하게 수습하고 보완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같은 내용을 갖는 개혁안에 바탕한 개혁정치는 반원적이거나 체제 부정적인 성격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정치는 지배세력에게 체제의 위기를 환기시키고, 제도의 운영과정에서 드러난 폐단을 어느 정도 수습하게 함으로써 일정 기간 체제의 붕괴를 막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민생문제의 해결 등을 표방함으로써 상당 기간 민의 체제에 대한 전면적 저항을 둔화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개혁정치의 추진은 개혁에 참여했던 관료들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고, 이들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즉, 개혁세력은 개혁이라는 과제 앞에서 상당한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개혁정치의 추진은 혈연관계에 바탕한 폐쇄적인 정치세력의 틀을 깨고 공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보다 개방적인 정치세력을 등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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