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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과거제도-생원,진사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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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5-20 12:27 조회3,4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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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과거제도
 
1. 생원 진사시의 제도와 절차
조선시대에 설행되었던 과거에는 문과, 무과, 잡과, 생원 진사시가 있는데 그중에서 문과와 무과, 잡과 합격자에게는 등위에 따라 관직 또는 품계가 주어졌다. 그러나 생원 진사시 합격자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관직 제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시험인데도 과거제가 폐지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자 노력하였다.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시대 법전에서의 공식 명칭은 생원 진사시였으나 소과(小科), 감시(監試), 사마시(司馬試)라고도 불렸다. 소과는 문과를 대과라 한데서 연유한 것으로 대소과(大小科)라 하여 주로 문과와 같이 칭할 때 쓰였다. 감시는 고려시대 진사시를 국자감시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감시라고 한 용례는 사마방목이나 문과방목, 『양전편고(兩銓便考)』등의 법전, 실록 등 연대기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마시라고 칭한 것에 대해서는 연원이 분명치 않으나 조좌호(曺佐鎬)는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의거하여 생원 진사는 주(周)의 조사(造士)에 해당하고 문과 출신은 진사에 해당하는데 소과를 사마시라고 한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며 과거의 격식을 높이기 위해 대과에 붙여야 할 사마시의 칭호를 소과에 붙인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1) 사마시라 칭한 데 대한 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태종 5년 의정부 찬성사(贊成事) 곽추(郭樞)의 졸기(卒記)에 곽추가 일찍이 사마시를 관장하였다는 기록으로2) 보아 조선 초부터 사마시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생원 진사시는 태조 2년 처음 시작되어 고종 31년 폐지되기 까지 502년간 모두 230회가 설행되었다. 조선 초부터 생원시와 진사시가 함께 시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태조는 1392년 7월에 내린 즉위교서에서 진사시를 혁파하였다. 고려 말 사장(詞章)을 중요시하는 데서 오는 폐단을 없애고 경학(經學)을 장려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고려 때부터 시행되었던 진사시를 일시에 없애기 어렵다는 반대의 의견이 많아 태조 2년(1393)에 진사시를 실시하였다가 태조 4년에 다시 폐지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후 사장의 중요성을 들어 진사시 복구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쉽게 시행되지 않다가 세종 20년(1438)에 가서야 복구되었으나 세종 26년(1444)에 다시 혁파되었다. 세종 20년(1438)과 23년에 잠시 진사시가 실시되었는데 이때 장원 합격자가 신숙주(申叔舟)와 이석형(李石亨)이다. 진사시가 완전 복구된 것은 단종 원년(1453) 2월이었다. 따라서 조선 초 약 60년간은 생원시만 실시되었다가 단종 이후에 생원시와 진사시는 항상 함께 실시되었다.
생원진사시는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로 구분된다. 식년시는 3년에 한번씩 즉 자(子) · 오(午) · 묘(卯) · 유(酉)년에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시험이고 증광시는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실시하는 비정기적인 시험이다. 조선왕조 502년 동안 생원 진사시는 식년시 163회, 증광시 67회 설행되었다.
3년에 한번씩 치렀던 식년시가 결행된 것은 모두 5회이다. 세종 26년 심한 가뭄으로 인해 정지되었고, 선조 27년(1594)과 30년(1597)에 임진왜란으로, 광해군 13년(1621) 신유년에 과거 부정으로 인해,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으로 인해 결행되었다.
식년시는 정기적인 시험이라 대체로 시험시기가 일정하였다. 초시를 식년 전해 가을에 실시하고 복시를 식년 봄에 실시하였다. 초시 합격자가 복시에 응시하는데 시일이 촉박하거나 농번기에 빈번한 왕래로 인해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다. 식년에 초시와 복시를 함께 치르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럴 경우 초시를 봄에, 복시를 가을에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사정상 식년에 실시하지 못하고 이듬해 물려서 실시하는 경우도 있다. 퇴행하여 이듬해 설행된 경우는 선조 34년(1601) 경자식, 광해군 2년(1610) 기유식, 인조 24년(1646) 을유식, 현종 14년(1673) 임자식, 숙종 5년(1679) 정사식, 숙종 5년 (1679) 무오식, 숙종 41년(1715) 갑오식, 경종 1년(1721) 경자식, 영조 9년(1733) 임자식, 순조 14년(1814) 계유식, 고종 2년(1865) 갑자식이 퇴행한 경우이다.
증광시는 선조 이전까지는 왕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서만 실시되었지만 선조 22년(1589) 종계(宗系)를 바로 잡고 나서 증광시를 설행한 이후부터 즉위 기념 이외의 경사로도 증광시를 설행하였다. 이후에는 크고 작은 국가의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특히 왕가에 축하할만한 경사가 있을 때 설행되었는데 후기로 갈수록 명분이 늘어나고 자주 설행되었다. 세자의 탄생 · 입학 · 가례 · 세자 책봉, 원자정호(元子定號), 원손(元孫)의 탄생, 중전 책봉, 친경(親耕), 친잠(親蠶), 상존호(上尊號) · 존숭(尊崇) · 부묘(?廟) · 세실(世室), 왕 · 대비 · 대왕대비의 보령(寶齡) 기념 등 왕실의 보존과 관련된 왕실 예(禮)가 주를 이루고 있다.
증광시는 시험 시기가 일정하지 않아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시행되었다. 식년시의 초시와 복시의 간격이 대체로 5-6개월 되는 데 비해 증광시는 대부분 1-2개월 안에 시행되었고 늦어도 3-4개월을 넘지 않았다.
시험의 절차는 식년시와 증광시 모두 초시와 복시의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락을 결정하였는데 각 군현에 학교가 세워지고 문풍이 진작됨에 따라 지원자 수가 늘어나 수험생 관리에 어려움이 많아지자 태종 14년부터 초시와 복시 두 단계를 두었다.
초시는 각 지방에서 실시되어 향시(鄕試)라고도 하며 서울에서 실시되는 초시는 한성시(漢城試)라고 한다. 초시의 정원은 도마다 달랐다. 군현의 수와 인구의 과다에 따라 차이를 두었는데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각각 700명씩 뽑고 최종시험인 복시에서 100명씩 뽑았다. 이와 같은 정원은 후기까지 변동이 없었다. 각 도별 초시의 정원은 다음과 같다.

 

 
한성
경기
경상
충청
전라
강원
황해
평안
함경
생원
200
60
100
90
45
35
45
35
35
700
진사
200
60
100
90
45
35
45
35
35
700

 

경기 향시는 임진왜란 이후에 폐지하고 한성시에 응시케 하였다. 대신 경기 향시이 액수를 한성시에 가산해 주었다. 생원 진사시의 법적 정원은 조선 초부터 잘 지켜졌으나 철종 대부터 잘 지켜지지 않게 되었으며 고종말년에 가면 크게 늘어났다. 일반적으로 진사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인해 진사를 더 많이 뽑았다. 두드러진 경우가 생원 238명, 진사 559명을 뽑은 고종 28년(1891) 증광시의 경우이다.
초시는 각 도별로 실시되었는데 강원도와 황해도를 제외하고는 두 곳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시험장소는 도내의 소속 읍에서 돌아가면서 정했고 시험관은 감사가 임명하였다가 명종 이후에는 서울에서 경시관이 내려왔다. 향시 이외에 초시에 해당하는 승보시(陞補試), 합제(合製), 공도회(公都會)가 있어 여기에 합격하면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복시 시험은 예조(禮曹)에서 주관하였으며 단종 이후에는 성균관과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복시 수험생들은 먼저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임문고강(臨文考講:책을 앞에 펴놓고 읽는 일)하는 조흘강(照訖講)에 합격하여야 녹명소(錄名所)에서 녹명할 수 있었다. 시험 장소는 분소법(分所法)에 의해 일소(一所), 이소(二所)로 나누어서 치렀다. 이는 상피제(相避制)를 두어 시험관의 자제나 친척 또는 부자가 함께 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세종대부터 시작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법제화 되었다. 대체로 일소는 예조, 성균관, 한성부가, 이소는 장악원, 성균관, 서학, 동학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같은 날 동시에 실시되지 않고 진사시를 먼저 치르고 생원시를 나중에 치렀다. 격일로 치러졌기 때문에 양 시험에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
시험과목은 생원시는 사서의(四書疑) 1편과 오경의(五經義) 1편이었다. 사서의는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중 한 문제를 내어 논문을 짓게 하는 것이다. 五經義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春秋)』의 훈의(訓義)에 관한 것을 각 1편씩 출제하였다. 진사시는 시(詩) 1편, 부(賦) 1편이었다. 후기에 가면 생원시는 의(疑)와 의(義) 중에서 1편, 진사시는 시(試)와 부(賦) 중에서 택일하도록 하였다.
복시에서 선발된 100명은 1등 5인, 2등 25인, 3등 70인으로 등재(等第)하였다. 등제는 양소(兩所)에서 한 사람씩 차례를 바꾸어 가며 하였다. 합격 인원이 증가하는 경우에 1등, 2등은 변화가 없었고 증액된 인원은 모두 3등에 등제시켰다. 정원을 초과하는 경우 노인, 종친, 은사의 명목으로 뽑기도 하는데 이 경우 방목 상단에 ‘노(老)’ ‘은(恩)’으로 표시하였다.
시험이 끝나고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을 출방(出榜)이라고 하는데 생원 진사시의 출방은 같은 날에 하였다. 출방 후에는 국왕이 합격자에게 백패를 수여하는 방방의(放榜儀)라는 의식이 행해진다. 백패에는 합격자의 관등과 성명, 등위를 기재하고 보인(寶印)과 날짜를 기입한다. 방방은 주로 인정전(仁政殿)이나 근정전(勤政殿)에서 행해졌다.
방방의(放榜儀) 의식이 끝나면 다음 날 합격자들은 생원 장원의 인솔 하에 임금에게 사은(謝恩)하고, 그 다음 날에는 진사 장원의 인솔 하에 성균관에 가서 알성(謁聖)의 예를 올렸다. 방방이 끝나면 악공, 광대, 재인을 동반하고 3일 동안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이를 유가(遊街)라고 한다.
생원 진사시는 문과의 예비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합격한다 해도 실제 관리에 임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원점(圓點) 300점을 따야만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성균관 식당에서 아침 저녁 두끼를 먹으면 1점을 계산해 준다. 원점 300점이란 곧 300일의 성균관 출석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원점 300점을 채우는 유생이 없어 원점을 감해주는 경우가 많았으며, 후기로 갈수록 생원 진사시를 거치지 않고 유학으로 문과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아져 18, 19세기에는 문과 급제자의 70%가 유학이었다. 그런가 하면 생원 진사시 합격 후 문과 급제와 상관없이 관직에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1)曺佐鎬, 「李朝司馬試考」(上), 『성균관대학교논문집 인문사회계』제 14집, 1969, 135-136쪽
2)『태종실록』권 10, 태종 5년 7월 6일(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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