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공 공덕비 건립 제막식 행사 후기(3)-팜플렛(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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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 작성일10-05-19 11:27 조회1,946회 댓글0건본문
正言公(諱 釴) 功德碑 除幕式
◉ 일시:2010. 5. 16. 일요일, 오전 11시
◉ 장소:경남 산청군 생초면 월곡리 묘역
◉ 주관:안동김씨 제학공파종회
1. 식 순 |
* 공덕비 제막(11:00~11:10)
* 고유제 거행(11:10~11:40)
* 개막식 거행(11:40~12:10)
* 중식 및 해산(12:10~14:00)
1.개회사
2.내빈 인사 소개
3.경과보고
4.회장인사
5.축사
6.경진보 소개 및 발간 경위, 정언공 및 공덕비문 소개
7.임원 및 종친 인사 소개
8.기타 공지사항 및 기념촬영
9.폐회사
2. 경과 보고 |
1. 2010. 3. 13.: 제학공파 임시 이사회의장에서 정언공 공덕비 건 립 최초 발의.
2. 2010. 3. 17.: 남응 대종회장은 대종회 명의로 공덕비를 건립할 목적으로 대종회 회장단 24명에게 공덕비 건립 동의 서면 결의서를 안내문, 묘비문, 경진보 발간 경위서와 함께 발송. 4월 2일까지 회송 요청함.
3. 2010. 4. 5.: 회송된 서면 결의서의 찬성자수가 만족할 만한 인원(2/3이상)이 되지 않아 대종회장은 대종회 주관을 포기하고 상천제학공파회장에게 제학공파종회 주관으로 건립할 것을 제안함.
4. 2010. 4. 10.: 상천 제학공파회장은 파종회에서 건립할 것을 결심하고 파종회 전 임원 및 이사진에게 공문을 보내 건립 추진 과정과 당위성을 공덕비문과 함께 우송함.
*건립비용(230만원) 완비 : 남응대종회장-100만원 기증, 상천제학공파종회장-30만원 기증, 제학공파종회-100만원
5. 2010. 4. 12.:공덕비문 최종 완료. 제작 및 건립 업체 선정. 묘비석 결정(국산 오석 5자, 갓머리).
6. 2010. 4. 17.:비문 교정 완료. 각자(刻字) 작업 실시.
7. 2010. 4. 20.:공덕비 제작 완료.
*4월 28일 건립 제막 행사를 준비 중 제학공파 고문이신 상의님의 별세로 5월 16일로 연기.
8. 2010. 5. 16:09시부터 대종회장, 제학공파종회장, 준회 종손 주재. 공덕비 건립.
3. 경진보 소개 및 발간 경위 |
Ⅰ. 경진보 소개
<경진보-표지(좌), 내부 1면(우)>
1. 발간연대:1580년(선조13)
2. 발간 참여자(무순):金釴(제), 金钁(제), 金齊賢(제), 金昉(제), 金鋘(전), 金胤先(문), 金億齡(익), 金瓚(익), 柳希潛(미상)
3. 체제와 내용
가. 규모 : 1책. 가로 31cm×세로 38cm
나. 판본 : 목판본
다. 기록 내용(1-88P)
(1) 序文(1-4P):승정원 좌승지 億齡 謹書
(2) 족보 내용 기록(5P-64P)
(가) ‘新羅 敬順王 十一代孫 利請, 子 義和(追奉 威尉注簿)’라고 최초 기록한 후 시작.
(나) 충렬공 이후 약 13대손까지 세대별로 기록.
(다) 판서공(휘愃)의 子인 밀직사사공(휘七祐), 개성윤공(휘七霖)은 휘만 나오고 그 이후 후손 기록은 없음
(라) 부사공(휘天順), 도평의공(휘九鼎), 대호군공(휘儒), 판삼사공(휘場), 서운관정공(휘綵)은 기록이 없음.
(마) 군사공(휘七陽), 문온공(휘九容), 지제교공(휘齊顔), 안정공(휘九德), 제학공(휘益達), 안렴사공(휘士廉), 익원공(휘士衡)은 계열별로 종계를 밝혀 자세히 기록함.
(3) 충렬공 行狀(65P-81P)
(4) 先祖詩文(83P-84P):孝印, 方慶, 忻, 永暾, 益精, 齊顔, 德龍
(5) 跋文(85P-88P):사간원 헌납 瓚 跋, 호조좌랑 齊賢 跋
4. 기록 방법:각 장을 6단으로 구분하여 세대별로 출생년, 문, 무과, 주요관직, 몰년, 배위, 배위의 父를 기록하고 아랫단에 子와 女(사위 명)를 기록함.
5. 진본 전수 및 대종회 제공과정
가. 진본 원소장자:金容世-안렴사공파. 목사공(휘 公望) 종손. 현 서울 서대문 거주.
나. 대종회 제공 과정:1975년 경 金容世님의 先考이신 金起源님께서 대종회에 기증함.
6. 현 상태
가. 1P와 88P는 원본(목판본)이 아님. 이는 원본이 훼손되어 1980년 경대종회에서 김윤회(金崙會)님이 수기(手記)로 복원 작업한 것임.
나. 대종회 서고에 보관해 오다가 최근 모 전문 위탁 보관소에 보관중임.
다. 대종회에서는 2회에 걸쳐 영인본을 발간하여 종친들에게 배포함.
라. 2010. 4월 현재, 대전의 뿌리공원 박물관에서 전시 요청이 있어 일정기간 대여중임.
Ⅱ. 경진보 발간 과정
*<경진보>(1580)의 서문과 발문, <기미보>(1739), <을유보>(1825), <弘毅齋營建記>(1981)의 기록 내용을 참조하여 요약 작성함.
1. 1500여년 경, 宗人 중 유식한 인사들이 족보가 없음을 개탄하며 개인적으로 보첩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전해주곤 하였음. 그런데 이것들은 소홀히 제작하여 착오가 많아 여러 폐단이 있었음.
2. 1519년(기묘년.중종14), 상사공 윤선(上舍公 胤先-문온공 5대손)이 정언공(正言公 釴-제학공 6대손)에게 족보 편집을 부탁함.
3. 정언공(釴)은 이후 30여 년간 어지러운 정치상황과 20년간의 유배생활 속에서도 모든 보첩들을 수집하고 수정・정리하여 세보(世譜) 편찬 작업을 완성함. 그러나 책자로 간행하지 못하고 1548년(명종3)에 별세함.
4. 1550년 경 정언공의 아우인 통천공(通川公-钁.제)이 화성군수로 있을 때 귀양 중이던 유희잠(柳希潛)에게 부탁하여 정언공이 정리해 놓았던 세보 초고를 보완하여 7권의 세보를 완성하게 함. 그런데 외파(外派)에 대한 기록상의 문제점이 드러남.
5. 1577년(선조10), 통천공의 아들인 경력공(經歷公-齊賢.제)이 옥산(현 전남 해남)으로 전보됨에 따라 그 부임 초에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여러 종장(宗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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