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공 공덕비 건립 제막식 행사 후기(4)-팜플렛(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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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 작성일10-05-19 11:30 조회1,764회 댓글0건본문
8. 당시 강화부사로 있던 병사공(鋘.전)이 충청도 절도사가 된 후 천안군수인 정언공의 손자 시정공(昉.제)으로부터 이 사업을 인수받아 다시 교정하고 자신의 비용으로 판각하여 출판을 마침. 이 때 감사공(億齡.익. 당시 좌승지 겸 수찬관 지제교)에게는 서문을 의뢰하였고, 눌암공(瓚.익)과 경력공(齊賢.제)에게는 발문을 의뢰하여 편찬 및 발간 사업을 마침.
Ⅲ. 경진보 제작 관련 선조님 소개(무순) 1. 정언공(正言公) 김익(金釴). 1486(성종17)∼1548년(명종3). 자는 군거(君擧). 충렬공 10대손. 제학공(휘 익달) 6대손. 경력공(經歷公) 휘 언홍(彦弘)의 아들이며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11) 생원이 되었으며, 1519년(중종14)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어, 이른바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언사(言事)를 담당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이 투옥되자, 유인숙(柳仁淑)・공서린(孔瑞麟)・홍언필(洪彦弼) 등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조광조와 같이 옥에 갇히겠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521년(중종16)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안당(安塘)・안처겸(安處謙)부자 등이 처형된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당하고 유배되었다. 중종 말년에 김안로(金安老) 등이 다시 등용됨에 따라 유배에서 풀려났고,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었다.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거쳐 용담현령이 되었다. 그의 인물됨은 현량과(賢良科) 천목(薦目)에 순후(淳厚) 방정(方正)하고, 학식과 재행(才行)이 높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동김씨 최초의 족보인 <경진보>를 편집・완성하였다. 壽 63세. 묘는 서울 상도동에서 1968년 산청군 생초면 월곡리 농암치(籠岩峙)로 이안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14)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사건. 반정 성공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명망 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였는데, 중종의 지지를 얻은 조광조와 이들 신진 사류들은 중종에게 철인 군주주의(哲人 君主主義)를 강조하면서 군자 중용, 미신타파, 향약(鄕約) 실시 강행, 유익한 서적의 국가적 간행과 반포, 현량과(賢良科-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추천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의 설치 등 현실을 무시한 도학사상의 이상정치를 주장하고 전개하였으며, 반정공신에 대한 위훈삭제 사건을 일으키는 등 개혁정치를 단행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남곤・심정(沈貞)・홍경주 등 훈구세력들은 중종을 설득하여 조광조와 신진세력들을 제거한 사건이다.
※신사무옥(辛巳誣獄) 1521년(중종 16)에 일어난 안처겸(安處謙) 일당의 옥사. 안처겸은 이정숙(李正淑)・권전(權磌)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송사련(宋祀連)은 처형뻘이 되는 정상(鄭鏛)과 이 사실을 고변할 것을 모의한 후, 안처겸 모상(母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하였다. 이로써 안처겸・안당・안처근(安處謹)・권전・이충건(李忠楗)・조광좌(趙光佐)・이약수(李若水)・김필(金珌) 등 10여 명이 관련되어 처형되었고, 송사련은 그 공으로 당상관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득세하였다.
2. 통천공(通川公) 김곽(金钁). 생몰년 미상. 자는 군택(君擇). 제학공 6대손. 1525년(중종20) 진사에 합격하고 통천군수를 역임했다. 형님인 정언공의 뒤를 이어 경진보 편집 작업을 계속했다. 壽 62세이다. 3. 경력공(經歷公) 김제현(金齊賢). 1535(중종30)~? 자는 사백(思伯), 제학공 7대손. 1564년(명종19) 생원, 1570년(선조3) 문과 급제. 개성부(開城府)의 경력(經歷)을 지냈다. 부친(통천공 휘 钁)의 뒤를 이어 경진보 편집 작업을 계속하며 경진보 발문을 지었다. 4. 시정공(寺正公) 김 방(金 昉). 생몰년 미상. 자는 명원(明遠), 제학공 8대손. 1561년(명종16)에 생원, 1567년(명종22)에 문과에 급제하고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이르렀다. 조부와 종조부, 숙부에 이어 경진보 제작을 담당하였고, 일부 판각(板刻)하기도 하였다. 묘는 경남 산청군 생초면 월곡리 엄곡(奄谷) 목음(木陰) 갑좌(甲坐)이다. 5. 병사공(兵使公) 김오(金鋘). 1520년(중종15)~? 전서공 6대손. 명종때 무과에 급제. 12개 주의 목사와 4개 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현감 金師秀의 子. 선계는 김휴-김익정-김형-김부녕-김귀년-김사수(현감)-김오(병사)-金九鼎. 1580년 경진보 발간 판각비용을 제공하여 발간하였다. 6. 감사공(監司公) 김억령(金億齡).1529년(중종24)~1589년(선조22). 익원공 6대손. 생원・진사과에 모두 합격한 후 1552년(명종7년) 24세에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승정원 좌승지・지제교를 거쳐 강원도와 황해도・충청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최초의 안동김씨 족보인 경진보 발간에 힘썼고 그 서문을 썼다. 7. 눌암공(訥菴公) 김찬(金瓚). 1543(중종38)∼1599(선조32).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 익원공 7대손. 진사를 거쳐 156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70년에 검열이 되고, 이후 대교・봉교・전적・형조정랑・검상・사인・이조정랑 등의 관직과 지평・집의・정언・헌납・사간・수찬・교리・응교 등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73년 평안 삼도사로 나가 군적(軍籍)을 정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평안도 순무어사로 활약하였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직제학・승지・좌참찬・동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대사성・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또, 일본과 강화회담 때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공을 세웠다. 1597년 예조판서・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를 지냈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우참찬에 승진하였다.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이 능숙한 명신이었다. 최초의 안동김씨 족보인 경진보 발문을 지었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8. 유희잠(柳希潛):미상 경진보 편집에 참여했으나 자세히 알 수 없다.
Ⅰ. 전면 글씨 安東金公司諫院正言諱釴功德碑 Ⅱ. 비음기 公의 諱는 釴이요 字는 君擧이며 本貫은 安東이다. 敬順王의 孫子인 平章事公 諱 叔承은 始祖시고 고려조의 대표적 出將入相으로 높이 追崇받는 忠烈公 諱 方慶은 中始祖로 公의 十代祖시며 派祖이신 提學公 諱 益達은 六代祖요 承旨公 諱 壽亨은 祖父이시며 都事公 諱 彦弘은 父親이시다. 公은 一四八六年 출생하여 타고난 비범한 재능으로 학업에 힘써 一五一六年 生員科에 入格하였으며 一五一九年에는 賢良科에 급제하여 司諫院 正言에 오르셨다. 그런데 일찍이 靜庵 趙光祖의 門下에 들어가 그 學問과 思想을 따르던 중 己卯士禍가 일자 靜庵의 救命 上疏를 올리고 一五二一年 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유배되셨다. 방면 후 一五四五年 재등용되어 叅奉과 主簿를 거쳐 龍潭縣令이 되었으며 一五四八年 六十三歲로 歿하여 서울 상도동에 모셔졌다가 一九六八年 이곳 慶南 山淸으로 移安되셨다. 公은 淳厚 方正하고 學識과 才行이 높았는데 특히 최초의 安東金氏 족보인 庚辰譜를 편집하는 大偉業을 이루어낸 功이 크시도다. 一千五百年경 착오 많은 개인적 譜牒만이 전수되어 그 폐단이 매우 컸으나 방대하고 至難한 大同譜 편집작업을 아무도 시도하지 못하고 있을 때 평소 우리 門中에 깊은 愛情을 지니고 계시던 공께서는 굳은 의지와 용기를 발휘하여 一五一九年부터 약 三十여 년 동안 혼란한 정치상황과 유배생활 중에서도 모든 譜牒과 각종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大同譜 草稿를 편찬해내는 큰 업적을 이루셨다. 그러나 이를 책자로 발간하지 못하고 별세하고 마셨으니 안타깝기 이를 데 없도다. 이에 아우이신 通川公 諱 钁께서 이 과업을 이어받아 七권의 보완 草稿를 완성하셨고 二十七年 뒤인 一五七七年에는 正言公의 조카인 經歷公 諱 齊賢께서 여러 宗長들을 설득하여 發刊 작업을 추진하셨다. 또한 一五七八年에는 正言公의 손자인 寺正公 諱 昉께서 조부의 뜻을 이어받아 직공을 모아 刻字토록하여 行狀과 序文의 板刻작업을 시작하셨다. 그 후 翼元公 후손 監司公 諱 億齡께서 序文을 짓고 訥菴公 諱 瓚과 함께 여러 종친들의 힘을 모았으며 당시 忠淸道 節度使이신 典書公 후손 諱 鋘께서 寺正公으로부터 이 사업을 인수받아 自費로 板刻하고 발간하였으니 이것이 곧 우리의 자랑스러운 一千五百八十年의 庚辰譜로다. 이는 公께서 시작한 지 六十一年만의 성과요 공으로부터 한 집안 三代에 걸친 집념과 意志의 所産이며 先覺한 여러 선조님들의 협동과 노력의 결정체인 우리 모두의 보물이 탄생한 것이로다. 이로써 우리 安東金氏 모두는 한 族譜 속에 一家를 이루어 血統 系列과 종친간의 相互關係를 쉽게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기초로 子子孫孫 族譜를 續刊할 수 있게 되었도다. 또한 우리 종친 모두가 崇祖睦族하고 無窮繁榮할 수 있는 礎石이 마련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런가! 이에 公께서 歿하신 지 四百六十二년이 지난 지금 安東金氏 提學公派宗會에서는 公의 높고 큰 功과 德을 온 세상과 累世에 널리 顯揚하기 위하여 모든 宗親들의 뜻을 모아 본 功德碑를 세우도다. 西紀 二千十年 四月 二十八日 安東金氏提學公派宗會長 金相天 짓고 提學公 十九代孫 金相宜 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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