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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김원성전(문숙공 김제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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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10-04-06 17:44 조회1,9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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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도 여전히 걸상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다시 화살 한 대를 맞고도 내려오지 않았다. 이에 적이 공을 핍박하여 내려와 절을 하게 하자, 공은 상처가 심하여 의식이 없는 듯한 상태에서도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입으로는 욕설을 계속하다가 결국 부인 및 한 아들과 함께 처형을 당하니, 적들도 그 불굴의 기개를 의롭게 여겼다. 그러나 한편으론 공을 포획한 것을 기뻐하여 공의 머리를 저들의 진영(陣營)으로 보냈다. 당시 성에 있다가 요행히 살아난 조생 문벽(趙生文璧)이 공과 공의 부인과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원주의 산기슭에 임시로 안장해 두었는데, 지금도 그곳을 지나는 행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다. 내가 당시 영동(嶺東)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의 전말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아아, 병화(兵火)가 일어난 이래로 성을 버리고서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몸을 깊이 숨기고 있다가 적이 오면 달아나고 적이 물러가면 되돌아간 자들이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그 사이에 혹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불리는 이들도 있지만, 장수의 자리를 맡아 진지(陣地)에 나아가 지휘함에 승패가 자기의 손에 달려 있는 경우엔, 싸움에 패하면 으레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리고 경솔한 생각으로 망녕되이 움직여 갑작스레 진격하기만 하고 상황을 고려할 줄 몰라 곤경을 자초한 경우엔 죽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며, 뜻밖에 변고를 당하여 황망히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경우엔 나아가도 죽고 물러나도 죽을 것이니 오직 한 번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평소 스스로 정력(定力)을 쌓아 창졸간의 변고에도 조용히 흔들리지 않고 시종 그 직분을 지키다 죽은 사람으로는 공 같은 이가 있겠는가. 사관(史官)이 믿을 만하다면, 반드시 “임진란(壬辰亂)에 우뚝이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이는 오직 원주 목사 김 아무개 한 사람뿐이다.”라고 쓰리라.

공의 휘(諱)는 제갑(悌甲)이요 자(字)는 순초(順初)인데, 얼굴이 희고 신장이 컸으며 말과 웃음이 적었다. 계축년 과거에 올라 두 조정에 걸쳐 벼슬하였는데, 대성(臺省)에 출입함에 안색을 엄숙히 하여 아부하지 않았고 항상 강직한 몸가짐을 견지하였으며, 지방 수령이나 방백(方伯)으로 나가서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순절(殉節)하였을 때 향년이 예순여덟이었다. 한 아들 시헌(時獻)은 무자년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이부랑(吏部郞)이 되어 어가를 호종하며 관서(關西)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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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1]사람이 …… 있다 :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의(義)의 가치를 강조하고 불의(不義)를 경계하여, “삶도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바라는 바가 삶보다 더 심한 것이 있으므로 구차히 얻으려 하지 않는다. 죽음도 내가 싫어하는 바이지만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 있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오직 의(義)를 취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주D-002]호상(胡床) : 접을 수 있게 되어 있는 일종의 간편한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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