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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원성전(문숙공 김제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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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10-04-06 17:43 조회1,8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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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이고 진 노약자들이 줄을 이어 더위잡고 올라갔으며 경성(京城)에서 온 사람들도 서로 부축하고 이끌면서 나아가, 불일간에 성 안이 사람으로 가득 찼다.

성은 사면이 모두 절벽이고 전면에 길이 하나 뚫려 있어 반드시 꼬챙이에 꿰인 생선처럼 한 줄로 올라가야 했으며, 파놓은 참호와 쌓아 놓은 성벽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요새였다. 성 안에는 양식과 무기를 비축해 두는 한편 땔감을 쌓아 놓고 우물을 쳐내어 여러 달을 농성(籠城)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성 밖에는 큰 수레와 무거운 목책(木柵)을 밧줄로 묶어서 설치하고 돌을 실어 공중에 매달아두고서 적이 오면 밧줄을 끊을 태세를 갖추었다. 게다가 성가퀴에는 강한 활과 독한 화살을 벌여 놓는 동시에 간간히 화총(火銃)을 섞어 놓고 밤낮없이 공이 몸소 순찰하니, 그제야 성 안의 사람들이 든든히 믿어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당초에 공이 박씨(朴氏) 성을 가진 경성의 장수와 약조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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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원주로 오려면 반드시 가리현(可里峴) 고개를 지나야 하는데, 이 고개는 천연의 험한 요새라 말 두 필이 나란히 가지 못하고 사람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다니지 못한다. 따라서 만약 천 명의 병력으로 그 길목을 막는다면 백만의 적이라도 날개가 없이는 지날 수 없을 터이니, 이렇게 하면 거의 적과 대등하게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불리한 상태가 생기면 내가 미리 튼튼한 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니, 그대는 힘써주기 바란다.”

하였다. 그런데 막상 적이 쳐들어올 때 박씨는 졸개 한 명을 보내 정탐하게 하고서, 적이 멀리서 천천히 오고 있다는 그 졸개의 보고만 믿은 채 안장을 풀고 갑옷을 벗고 시냇가에서 쉬고 있다가, 뜻하지 않게 배후로부터 적의 기습을 받아 간신히 알몸으로 빠져나왔으니, 아, 가리현의 요새를 그 누가 지킨단 말인가. 이날 적이 원주로 밀려들어오자 뭇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가리현이 함락된 일로 영원성을 걱정하였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말이 더욱 단호하고 명령이 더욱 엄하니, 사람들은 모두 공의 충의(忠義)에 감복하고 성의 외로움을 걱정한 나머지, 심지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밥을 삼키지 못하는 이들조차 있었다.

적들은 공이 성을 사수(死守)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긴 장대에 글을 매달아 이익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위엄으로 협박하기도 하며 공을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공이 허리의 칼을 뽑아 손수 적의 사자(使者)를 참수하고 다시 의자에 걸터앉음에 머리털이 곤두서고 어깨가 쭝긋 솟아 우뚝하기가 마치 무거운 산과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두렵고 떨려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이튿날 적이 반드시 대거 침공해 올 것임을 안 공은, 성 앞 골짜기를 따라 5리 거리로 늘어선 다섯 봉우리에 초소를 두고 초소마다 측후병(測候兵) 한 명씩을 잠복시켜 적이 오면 즉시 작은 뿔피리를 불게 하였다. 날이 밝자 다섯 초소에서 뿔피리가 차례로 울리더니 창칼이 산을 뒤덮고 북소리가 땅을 울리며 적들이 밀려왔는데, 성 밖에는 의지할 원군이라곤 개미 한 마리 없고 성책을 지키는 사람은 오천 명도 채 안 되어, 천근의 무거운 쇠뇌를 한 가닥 머리털로 당기는 격이라 그 형세가 도저히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적들이 곧바로 유린해 들어오지 못한 것은, 성 안에 인화(人和)가 잘 되고 대비가 엄하며 명령이 분명하고 위엄이 숙연하여 쉽사리 공략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 무렵 적이 풀어놓은 결사대 수십 명이 벼랑 틈으로 잠입하여 성벽에 구멍을 뚫고 올라와 큰 소리로 어지럽게 고함치면서 대군을 지휘하여 성을 넘어오게 하였다. 성이 이미 함락되었는데도 공은 여전히 전투복을 입고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채 내려오지 않고 활을 당겨 적을 쏘려 하던 차에 적의 화살이 먼저 공을 맞히고 말았다. 공은 화살이 등에 꽂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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