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의 생애와 일화-김영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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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9-09-02 15:09 조회1,650회 댓글0건본문
Ⅲ.
金得臣은 평생 世禍를 경계 삼아 벼슬하지 않고43) 孝宗 때 尤庵 宋時烈이 북벌을 품의하려고 찾아와도 만나지 않고44) 江湖의 詩人으로 지내려고 했다지만, 사실은 젊어서부터 벼슬에 뜻을 두었다.45) 그리하여 39세에 司馬試 進士科에 급제하고46) 41세에 蔭補로 肅寧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蔭官으로 나갈 뜻이 없었는데 梅溪公이 권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부임하였다가 곧 돌아왔다고 한다.47) 그러나 60세까지 과거에 응시하라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48) 정식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려고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49) 金得臣은 그 이유를
무릇 사람들은 옛사람의 작법을 힘써 배우지 않고 과거공부에만 전력을 기울여 혹자는 과거에 대한 詩賦는 능하나 古詩律에 있어서는 비록 대강 글구를 지어 맞춘다해도 역시 科體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50)
라하여 科體의 잘못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59세에 槐山으로 내려와 醉黙堂을 지었는데 그해에 增廣文科 丙科에 급제하였다. 이렇게 늦게 과거에 급제한 것에 대하여 李德懋는
평생 책을 읽은 것이 많기로는 진실로 고금에 보기 드물어 伯夷傳 읽기를 1억3천번이나 하였다하니 그 남어지는 짐작할만 하다. 그 문집 가운데 文은 고작 몇 편에 지나지 않은데다가 족히 볼만한 것이 없으니 재주는 지독하게 둔한 사람이었다.51)
라하여 文才의 부족으로 보았으나 李瑞雨는 늦게나마 과거에 급제한 것은 伯夷傳을 많이 읽은 까닭이라 하였다.52) 「行狀草」에는 처음 나이가 많다하여 國子學諭가 되었다가 典籍에 오르고 成均直講, 兵工曹의 佐郞, 江原都事, 司憲府掌令, 濟用監正, 司僕寺正, 軍資監正, 宗簿寺正, 豊基郡守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洪川縣監, 旌善郡守에 임명되었어도 나가지 않았으며 禮曹佐郞, 司導寺正, 承文院判校, 掌樂院正 겸 知製敎을 지냈으나 얼마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53) 이렇게 그가 宦路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김득신은 젊어서부터 글을 읽었고 늙어서는 더욱 부지런했으나 사람됨이 迂闊하여 때에 쓰이지 못했다.54)
고 하였듯이 세상 물정에 어둔 탓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洪州縣監과 旌善郡守에 임명되었을 때 臺臣과 宰臣들이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부임하지 못하였고55) 66세에 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을 때 탄핵을 받아56) 그 이듬해 槐山 醉黙堂으로 내려와 독서와 詩酒를 즐기다가 다시 벼슬을 하였는데 아마도 掌樂院正을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57) 그리고 74세에 다시 槐山 醉黙堂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58) 그리고 78세에 世勳으로 通政大夫가 되고 80세에 優老의 恩典으로 安豊君에 습봉되었는데 그것은 아버지 김치가 후사가 없는 忠武公 金時敏의 양자로 安興君으로 습봉되었고 金緻의 아들인 金得臣은 金時敏의 養孫이 되기 때문에 君號를 받은 것이다.
金得臣은 1684년 8월 30일59) 81세에 사망했는데 그의 손자가 쓴 「行狀草」에는 痢疾에 腫瘡이 겹쳐 병으로 사망했다 하고, 일설에는 개에 물려 죽었다고 했으나60) 肅宗實錄에는
도둑이 安豊君 金得臣을 살해하였다. …… 충청도 槐山 땅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明火賊에게 살해되었다.61)
는 기록으로 金得臣은 명화적에 죽음을 당한 것이 분명하다.62) 그러나 후손으로 불미한 죽음을 사실대로 기록하기 어려워 死因을 糊塗한 것으로 보인다.63) 忠淸監司에게 보고받은 肅宗은
“명화적이 사대부의 집에 들어가서 人命을 살해하여 二品宰臣이 칼날에 상하여 죽었으니 놀라고 참혹함을 금하지 못하겠다. 各鎭의 討捕使로 하여금 시일을 정하여 찾아 잡게 하라.”하고 곧 該曹에 명하여 喪禮에 필요한 물건을 지급하게 하였다.64)
라하여 범인을 잡게하는 한편 喪禮에 필요한 물건을 지급케하여 크게 예우하였다. 그의 무덤은 괴산군 증평읍 栗峙에 있다. 그는 많은 시문을 남겼지만 丙子胡亂 때 유실되어 천여편 남았으나 그 손자 金可遠의 집에 화재가 있어 재차 소실되었다고 한다.65) 잔존하는 시문은 栢谷集에 수록되었고, 시화집 終南叢志가 현존하고 있다.
오늘날 김득신에 대하여 金昌龍은 “평생을 통해 士人으로서의 立身과 詩人으로서의 揚名의 테두리에서 끝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人物”66)이라 하였으나 申範植은 “노둔한 천품에도 불구하고 후천적인 노력을 통하여 詩로 一家를 이룬 苦吟과 多讀으로 유명한 인물”67)이라 하였고 이재복은 “시인의 영감으로 확립한 묘오의 시세계를 통해 자연을 시적으로 형상화 했으며 형식적으로는 정형성의 바탕 위에서 파격의 유연성을 보연 준 시인”68)으로 평가되고 있다.
1) 光海君日記(鼎足山本), 光海君 12年 2月 庚戌條.
2) 光海君日記(太白山本), 光海君 13年 2月 丙子條.
3) 金得臣은 醉黙堂記에서 ‘辛酉年’라 한 것은 ‘辛丑年’의 잘못이고 그것도 庚申年의 착각이다.
4) 光海君日記(鼎足山本), 光海君 13年 2月 戊寅條.
6) 이 때 司憲府의 탄핵을 받았으나 仁祖가 윤허하지 않았다. 仁祖實錄, 仁祖 1年 11月 壬子條.
16) 申範植, 「柏谷 金得臣 硏究」, 淸州大學校 大學院 석사논문, 1996, 5쪽.
26) 金昌龍, 栢谷 金得臣의 人間과 文學 (上), 淵民李家源七秩紀念論叢, 정음사, 1987, 425쪽.
29) 金得臣이 終南叢志에서 澤堂 李植이 아버지의 詩를 칭찬하였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자신의 詩才를 아버지의 遺傳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41) 記聞錄에는 金得臣이 洪錫箕의 집을 찾았을 때 하인이 빗쟁이의 집에서 솥을 떼어오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돌아오다가 洪錫箕의 변명을 듣고서야 머물었다는 일화가 있다.
46) 進士科에 급제하고 지은 시 「壬午戱吟」이 있다.
49) 과거에 낙방한 심정을 읊은 시 「公山途中」이 있다.
55) 「行狀草」. 이 때의 심정을 읊은 詩 「不赴洪州偶吟」과 「失旌善作」이 있다.
57) 栢谷集, 記聞錄에는 벼슬을 주어도 나가지 않던 金得臣이 음악을 좋아하여 掌樂院正에는 부임하였다고 하였다.
58) 晩香堂 「序」에 ‘今年秋 余且休官 歸槐鄕’이란 기록으로 확인된다.
62) 國朝人物志에도 明火賊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하였다.
68) 이재복, 「백곡 김득신의 시문학 연구」, 세종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1998,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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