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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의 생애와 일화-김영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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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9-09-02 15:06 조회2,0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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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臣의 생애와 일화


                                    김  영  진 (청주대 명예교수)


        Ⅰ.

  金得臣은 본관은 安東이며 忠烈公 金方慶의 14대손이고 중시조 金益達의 10대손이다. 고조는 趙光祖의 문인인 進士 金錫이고 증조는 金忠甲이고 할아버지는 富平府使를 지낸 金時晦이고 아버지는 慶尙監司를 지낸 金緻인데, 임진왜란 때 晉州牧使로 순절한 숙부인 忠武公 金時敏이 후사가 없어 그의 양자가 되었다.

  金緻는 文科에 급제하고 光海君을 옹립한 大北派의 영수 李爾瞻과 가까워 大司諫을 지냈으나 광해군 10년(1618) 仁穆大妃를 유배하자 李爾瞻이 폐망할 것을 알고 광해군 12년(1620) 兵曹參知에 임명되자 병을 핑개로 나가지 않았고1) 다시 兵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2) 허락없이 낙향하여3) 파직을 당하였다.4) 이어 일어난 仁祖反正 후에 大北派로 몰려 귀양을 갔으나 반정초기에 碁局이 있었다는 靖社功臣 金瑬의 천거로5) 東來府使를 거쳐6) 慶尙道觀察使를 지내다가 安東에서 사망하였다.7)

  그런데 金緻는 運命學에 밝아「深谷秘訣」을 짓기도 하였는데 野史에 德興縣監 때 염라대왕을 불러오는 이적을 보였다 하고8) 인조반정에서 살아남은 것도 반정의 거사일을 택일해 준 덕이라고 하였다.9) 뿐만 아니라 그가 죽어 염라대왕이 되어10) 이승과 저승을 자유자재로 왕래했다 하였다.11) 그리하여 金緻는 

  

  김치는 紫微星을 잘 받들더니 아들 金得臣이 언제 태어날 운명이라 써놓고 평하기를 “태어날 아이는 반드시 지혜가 신통하고 문장이 능할 것이지만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완고하고 둔한 것을 깨우치지 못할 것이다.”하였다가 김득신이 태어나자 그 글을 태우고 “내가 다른 사람의 점을 많이 치는데 이 글이 남아 내 아이의 운수를 맞추지 못한다면 어찌 용하다고 하겠는가?”하였다.12)


고 하여 앞으로 태어날 아들 金得臣의 운명까지 예견하였다고 했으며 金得臣이 잉태되었을 때 꿈에 老子를 보았다 하여 아명은 ‘夢聘’이라 했다고 한다.13)



        Ⅱ.


  金得臣은 安興君 金緻와 吏曹判書를 지낸 逗日堂 陸瞻의 따님인 泗川陸氏의 사이에서 조선 선조 37년(1604) 10월 18일에 태어났다.14) 자는 子公이고 木川의 栢田에 살아 호를 ‘栢谷’이라 하였는데15) 후에 괴산 坐龜山 아래 龜石山村에 살면서 ‘龜石山人’이라고도 하였다.16) 그런데 그의 아버지 金緻는 어려서부터 노성하다는 말을 들었는데17) 그 아들 김득신은


  어려서 노둔하여 열살에 비로소 배우기 시작하였는데『十九史略』의 머릿 장 겨우 26자를 3일이 되도록 능히 읽지를 못했다. 아버지와 외삼촌 梅溪公이 와서보고 “고만 두라”고 하였다.18)


고 할 정도여서 金緻가 부지런히 가르쳤다고 한다.19) 金得臣의 노둔함은 어려서 痘疾을 앓은 탓이라고 하지만20) 


  栢谷은 어느 해 寒食날에 말을 타고 들밖으로 나갔다. 그 도중에 五言漢詩 한 글귀를 얻었으니 이는 곧 ‘馬上逢寒食’이다. 백곡은 그 對句를 맞추지 못한채 홀로 苦吟하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馬童이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그다지 苦吟하시는지요?”하고 여러차례 물었으나 백곡은 역시 여러 차례를 “네 놈은 잘 모르는거야”하곤 하다가 마침내는 “‘馬上逢寒食’ 한 글귀를 얻었으나 그 對句가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는구나”했다. 馬童은 “그러시다면 제가 그 對句를 맞추어 드리겠습니다”하고 곧 ‘途中屬暮春’을 불렀다. 백곡은 곧 말에서 철석 내리면서 “애당초 내가 말을 타고 네가 말을 모는 것은, 나이나 계급의 높낮이에 있음이 아니라 지식수준 여하에 따라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제 너의 詩才가 나보다 우월함을 깨달았는 바 이제부터는 네가 말을 타고 내가 말을 모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했다. 馬童은 그것이 唐詩임을 알리자 백곡은 “참 그렇구나!”하고 강개하였다.21)


라는 일화를 보면 그의 노둔함은 천성으로 보인다. 그런데 金得臣은 고금에 학문으로 성공한 선비는 부지런함으로써 이룩하였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독서를 하였으니22) 그것은 그의 ‘古文三十六首讀數記’에


  獲麟解 師說 送高閑上人序 籃田縣丞廳辟記 送窮文 燕喜亭記 至謄州 北寄 上襄陽于相公書 應科目時與人書 送區冊序 張君墓碣銘 馬說 杇者王承福傳 읽기를 1만 3천번, 鱷魚文 읽기를 1만 4천번, 鄭尙書序 送董邵南序 읽기를 1만 3천번, 十九日後上書 읽기를 1만 3천번, 上兵部李侍郞書 送廖道士序 읽기를 1만 3천번, 龍說 읽기를 2만번, 伯夷傳 읽기를 1억 1만 2천번, 老子傳 읽기를 2만번, 分王 읽기를 2만번, 霹靂琴 읽기를 2만번, 齊策 읽기를 1만 6천번, 凌虛臺記 읽기를 2만 5백번, 鬼神章 읽기를 1만 8천번, 衣錦章 읽기를 2만번, 補之章 읽기를 2만번, 木假山記 읽기를 2만번, 祭歐陽文 읽기를 1만 8천번, 薛存義送元秀才 周策 읽기를 1만 5천번, 中庸序 읽기를 2만번, 百里奚章 읽기를 1만 5천번을 甲戌年부터 庚戌年까지 하였거니와 그 사이 莊子라든가 司馬遷의 史記, 班固의 漢書, 大學 中庸 등 허다하게 읽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1만번에 이르지 못했을 것 같으면 이 讀數記에 싣지 않았을 뿐이다.23)


라 한 것으로 알 수 있는데 그는


  지난 庚戌年에 큰 가뭄이 들어 팔도에 흉년이 들어서 그 이듬해에 굶주림과 염병으로 서울과 시골에 쌓인 시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죽은 사람 수와 그대가 책 읽은 수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많은가?” 하였다. 이것은 내가 책을 되풀이하여 많이 읽는 것을 놀린 것이다.24)


라고 이를 은근히 자랑까지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성질이 느리고 둔해서 책을 읽는 공력을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들인다. 史記, 漢書와 韓愈, 柳宗元의 글은 모두 베껴서 만여번이나 읽었고 그 중에서 伯夷傳을 가장 좋아하여 그것을 1억 1만3천번이나 읽어 드디어 내 방을 ‘億萬齋’라 이름을 지었다.25)


고 하여 伯夷傳을 1억1만3천번을 읽을 것을 기념하여 서재를 ‘億萬齋’라고 이름하였다. 그가 36년동안 36수를 1만번 이상 읽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여 다소 과장되었다고 해도26) 많은 책을 읽기보다는 같은 책을 되풀이해서 읽은 것은 자신의 노둔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잠재된 詩才가 있어 23세에 


  梅溪公이 林川의 수령이 되어 백곡이 찾아가 인사를 드렸더니 매계공이 “너의 文辭가 어느 만한 경지에 이르렀느냐? 내 너의 재주를 시험해 보리라”하고 蓮亭 앞에서 여러 자제를 불러 韻을 부른 뒤 말하기를 “너희들은 각기 短律을 지어보라”하였다. 백곡이 즉시 應聲하여 대답하기를


          북두성은 반짝이고 달은 하늘에 찼는데

          石池에 가을 빛 깊어 찬 연기 잠겼어라

          黃花는 의구하고 매화 또한 여전하건만

          천년의 陶君은 어디매 있느뇨


하니 매계공이 크게 칭찬하면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나” 하였다.27)


라 하였듯이 외삼촌 梅溪公의 인정을 받으면서 더욱 정진하였다. 처음에는 이름을 얻지 못하였다가 漢文四大家의 한사람인 澤堂 李植이 그의 시를 보고 대단히 칭찬하고 조정의 선비들에게 소문을 퍼트려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28) 金得臣은 詩才는 학문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타고난 天稟이라고 하였지만29) 洪萬宗이


백곡 김득신은 才稟이 매우 노둔하였는데 많은 독서로서 밑바탕을 튼튼히하여 노둠함에서 날카로움으로 갔다.30)  


라고 하였듯이 많은 독서가 밑바탕이 되었고 특히

  

김득신이 苦吟의 性癖이 있어서 코밑 수염을 꼬면서 物我之境을 초월한 듯 하였다. 부인이 그를 시험하고자 점심을 차려 내면서 장과 초를 넣지 않은 나물을 상에 올리고서 “아무 맛도 없이 담담하지 않은가요?”라 물으니 그는 “별로 모르겠는 걸”이라고 대답하였다.31)


고 하였으며 詩想에 빠지면 말을 재촉하는 馬夫의 고함소리에 다른 사람은 놀래도 그는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 것을32) 보면 생각을 깊이했고 또 任埅이  


백곡 김득신이 평생에 시만 공부하고 정신을 모아 시 한 수를 짓는데 여러번 글자를 바꾸고 글을 다듬기를 중국의 賈島와 같이 하였다.33)


고 하였듯이 詩를 짓을 때 정신을 모아 글자 하나까지 다듬었으니 朴世堂이 이를 두고 ‘一字千練’이라고 하였다.34) 이로써 본다면 그의 詩才는 天稟도 있겠지만 多讀과 多商量을 통하여 얻어진 노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金得臣은 才氣가 있어 즉흥시도 잘 지었으니 그것은 그의 많은 ‘走筆’로 알 수 있다.35) 그는


무릇 詩라는 것은 天機에서 얻어 造化之功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제일이다.36)


라 하였다. 김득신은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어도 결코 자만하지 않아  


백곡이 일찍이 자신이 지은 詩를 東溟에게 보였더니 동명이 말하기를 “그대는 항상 唐을 배운다더니 어찌 宋의 언어를 쓰느가?”하자 백곡이 “어찌 내가 宋語로 지었다 하는가?”하여 동명이 “내 평생 읽고 외우고 한 것은 唐代 이상의 것인데 자네 詩 가운데 나오는 문자는 전에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들이 필경 이는 宋의 글이란 뜻일세”하자 백곡이 웃으며 승복하였다.37)


라 하였듯이 鄭斗卿이 그의 시에 宋風이 있다는 지적에 쉽게 승복하였고 또

   

  栢谷 金得臣이 壺谷 南龍翼을 한 곳에서 만났다. 피차에 시를 잘 짓는다는 이름을 일찍부터 듣고 있었음으로 서로 詩賦로 우열을 결정하기로 하고 김득신이 먼저 韻을 부르니 남용익이 읊기를,


나그네가 청주의 비를 흩어버리니 

구름이 상당성(上黨城)에 모이었네

저녁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떨구니  

돌아가는 말이 가을 소리를 밟누나 


라 하니 김득신이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槐山의 문장가 김득신이 漢陽의 재주꾼 南龍翼에게 항복합니다.” 하였다. 또 김득신이 일찍이 친구 집 畵帖 머리에 쓴 시에


늙은 나무 연기 속에 서있고

가을산에 가랑비가 나리는데

저녁 강바람에 물결 높아지니

고기잡던 이 뱃머리를 돌리네 

    

이라 썼는데 東溟 金益謙이 이를 보고 매우 좋은 글이라고 칭찬하였다. 김득신이 그를 우연히 물가에서 만났는데 김익겸이 먼저 읊기를


서리 나린 정자에 낙엽만 뒹굴어도

물이 빛나고 산이 물드는 석양에

술잔을 권하며 단풍 속에 앉았으니

사람 얼굴과 가을이 똑같이 붉었네 


하니 김득신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조선의 문장으로 다른 사람에게 지고 있는 것은 바로 楚伯과 王天이 나를 망친 것이다.”라 하였다.38)


라 하였듯이 자기보다 나이 어려도 좋은 시를 지으면 감탄하고 때로는 자신의 무재를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를 즐겨 여러 곳을 유람하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는데 그 중에서도 東溟 鄭斗卿, 休窩 林有後, 晩洲 洪錫箕, 于海 洪萬宗, 東厓 金建中 등과는 忘年之友로, 久堂 朴長源과는 莫逆之友로 지냈다. 특히 朴長源은 栢谷集을 간행하기 전에 자신의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 했으며39) 염라대왕이 된 金緻에게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金得臣에게 부탁하였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40) 한편 金得臣은 비록 노둔하였지만 매우 강직하였으며41)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관상을 잘 보았으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아 그 날 밤 집안 사람들에게 殮襚와 衣衾을 준비시켰다고 한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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