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선생님 묘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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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9-06-26 14:43 조회1,614회 댓글1건본문
그동안 저는 백범선생님의 묘비문을 지은 분을 몰랐습니다.
오늘 추모식에서 받은 [백범회보 2009, 여름호]에 의하면 임정 재정부장을 지내신 조완구 선생님께서 지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삼스러워 전문을 다시 올려 봅니다.
大韓民國臨時政府 主席 白凡 金九之墓
백범 김구 선생은 사천이백구년 병자 음 칠월 십일일 자시
해주 백운방 터골 안동 김순영 현풍 곽낙원의 외아들로 나
해주 최준례 맞어 인, 신 형제 두니라.
글을 즐겨 십칠세에 과거 보다.
아버님 임종에 살어여 먹이더니 늙어도 어머님 가르침 받더라.
의에 굳음이 인격의 터리라.
갑오동란에 선봉장되어 해주성 치니 십구세라.
선비 고능선께 충의 배우다.
이십일세 치하포의 한 칼로 국모원수 갚고 사형 받더니
광무황제 분부로 살아 중 되니라.
이십오세 예수 믿어 새 교육 일으키며 신민회하다.
삼십육세 안명근일과 양긔탁일에 걸려 십칠년형 지다가 오년 만에 나오다.
긔미 삼일운동에 상해 나가 우리 정부 문지기 원하니 사십사세라.
오십이세 대한민국임시정부부 주석 되어 끝내 태극긔를 지키다.
오십오세 한국독립당 꾸며 이끌다.
오십육세 한인애국단 만드니 이듬해 이봉창 윤봉길 만나다.
이에 중국 장개석 주석과 알아 대접받다.
이차대전으로 정부와 동지를 중경 옮기니 육십삼세라.
육십오세 한국광복군 꾸며 훈련하다.
육십칠세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일본에 선전하다.
카이로 회담에 장개석 주석이 우리 독립 말하니라.
을유 팔일오 해방으로 갈린 만세 속에 서울 오니 칠십세라.
그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반탁운동 일으키다.
국민의회 끌어 미소군정 말고 우리 정부 종하다.
칠십삼세 평양 남북협상에 화평통일 웨치다.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은 민족의 말이러라.
긔축 유월 이십육일 오시 서울 경교장 서실에서 총 맞으니 칠십사세라.
항공 중령 신이 이으니 한간 집 한 뙈기 밭 물림 없더라.
국민장의로 칠월오일 서울 효창공원에 모시니 태백의 정긔가 서리더라
단기 사천이백팔십이년 십일월 이십사일
백범김구선생국민장의위원회 세움
댓글목록
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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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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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귀한 자료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홈 <김구>란에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