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가(金方慶家)의 연행록(燕行錄)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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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5-14 13:28 조회1,833회 댓글0건본문
5) 김흔 1차(23세, 1273. 6.1~),
이승휴(1273. 6.9~10.25),
김방경 3차 연행길 (62-63세, 1273. 7.16~1274. 1.2 /6개월)
○ 김흔
(1273년 삼별초 토벌후) 김방경이 아들 수(綬)와 지후(祗候) 김감,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 와서 승전을 보고하였다. 6월 초하루 임오일에 대장군 김수(金綬)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탐라도의 역적을 평정한 것을 보고하게 하였다.
○ 이승휴
(1273년) 원종이 아들 순안후(順安侯) 종(悰)과 동지추밀원사 송송례를 원 나라에 보내어 황후와 태자의 책봉을 하례하였다. ---1273년 윤6.9 개경 출발---8.4 연경 도착---북경 여강(濾江) 석교(石橋) 구경, 중국에서 천재로 명성이 높은 후우현(侯友賢)과 형제처럼 친교.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조전(長朝殿)을 직접 목도---9.8 연경 출발---10.3 개경 도착---
이승휴는 진하사(賀進使) 순안공 종(順安公 悰)을 수행하는 서장관(書狀官)의 신분으로서 연경을 왕래하며 느낀 여정과 원나라의 반관(館伴) 후우현(侯友賢)과 수창(酬唱)한 시(詩)들을 모은 것이 <빈왕록(賓王錄)>이다. 중국의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한국의 사행(使行) 시문집 중 현재까지 전하는 가장 오래된 저술이다.
이승휴가 元으로 출발한지 거의 석 달째인 8월에 연경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외국사신 접대관인 후우현(侯友賢)이 詩를 지어주고, 이승휴도 시(詩)로 답하고 있다. 마침 비가 많이 내려서 길이 지연되어 거의 석 달에 가까운 여정 끝에 간신히 元나라에 도착하니, 이 달(8월) 24일 원제는 개평부(開平府, 상도, 제2의 수도)에 순수(巡守)를 마치고 돌아와 그 이튿날에 만수산(萬壽山) 광한전(廣寒宮)의 옥전(玉殿)으로 가시어 하례를 받고 연회를 베풀고 있는 참이었다. 이승휴가 원제(元帝)에게 표문(表文)을 올리고 있다.
이때는 元이 만수산(萬壽山) 동쪽에 새로이 궁전(宮殿)을 세워서, 원제가 이달(8월) 27일 제후(諸侯)들을 대대적으로 불러모아 놓고 낙성식을 거행하고 있는 때였다.
다음해(1274년)에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하여 또 한번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사행(使行)하였는데, 당시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호복(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 것을 염려하여 상복을 고려식으로 하도록 권유하였다.
○ 김방경
(1273년) 정유일에 원수 김방경이 개선하니 왕이 심히 흡족하게 여겨 그를 위로하고 자기 손으로 붉은 가죽 띠 한 벌을 그에게 상으로 주었으며 장병들을 위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탐라를 평정한 공을 논하여, 김방경을 시중으로, 변윤을 판추밀원사로, 김석(金錫)을 상장군 지어사대사로, 나유ㆍ송보연을 함께 대장군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시중 김방경이 부름을 받아 원 나라에 가니, 황제가 금으로 만든 안장과 채색 의복 및 금ㆍ은을 하사하였다.
가을 7월 을미일에 시중 김방경이 황제의 소환을 받고 원나라에 갔었는데 황제는 금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문채 있는 의복과 금, 은을 그에게 주었다.
그 해 가을에 김방경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원나라로 갔는데 황제가 광한전(廣寒宮)에서 맞이하여 문지기를 시켜서 빨리 들어오라고 독촉하고 김방경을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기의 음식을 걷어서 김방경에게 주었으며 또 금으로 장식한 말 안장과 채단(綵緞)으로 만든 옷과 금, 은을 주었는바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다른 사람이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귀국하게 되자 황제는 그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주었다.
이듬해인 1274년 1월 2일에 개경으로 돌아 왔다.
경산은 원나라 때 궁중의 땔감인 석탄을 쌓아 놓았다 하여 매산(煤山)이라고도 하고, 또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에서 만수산(萬壽山) 또는 만세산(萬歲山)이라고도 했다.
연암은 萬歲와 萬壽의 중국 발음이 같아 한 산에 두 이름이 있는 줄 알았는데, 고증해 보니 자금성의 북쪽 산인 경산이 만수산이요, 만세산은 인공 호수인 태액지 복판에 있는 인공성 경화도(瓊華島)의 인공산이라 했다.
이 만세산에 광한전(廣寒殿)이 있었는데, 연암은 이 광한전에 가 전각에 걸려 있는 전기(殿記)를 보고 이렇게 써 남기고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 태자가 고려 사신 이공수(李公遂)를 광한전에 불러 보았다 했으니, 바로 이 만세산에 있는 광한전이다. 또 고려 원종은 이 북경에 몸소 와서 만수산 玉殿에서 황제와 작별하였고, 또 고려 사신 신사전(申思佺)은 만수산 옥전을 두루 구경했다 했으나 다만 옥전이라 말하고 전각의 이름을 적어 남기지 않아 어딘지 알 수 없다."
▲자금성 북문인 신무문 밖에 있는 표고 43미터의 경산.
그 산정이 북경의 중심으로, 만춘정(萬春亭)이 세워져 있다. 아래 보이는 궁은 임금이 별세하면 이곳에 모셔 두었기에, 문상을 위해 북경에 온 조선 사신들은 조석으로 이곳에 와 상례를 치렀다. 지금은 유적지로 개방됐지만 옛날에는 황제와 왕후의 자가용 산책로였다.
<新 열하열기, 1997, 이규태>
6) 김방경 4차 연행길 (64세, 1275.1.8-3.20 /3개월)
(1275년)봄 정월에 공주를 책봉하여 원성공주(元成公主)로 삼고, 안동(安東) 경산부(京山府)를 탕목읍(湯沐邑)으로 삼았다.
(64세, 문하시중) 1차 일본정벌을 마치고 돌아와서 1275년 1월 경진일에 일본정벌 후의 고려의 궁핍한 상태를 해결하고 일본원정의 부담을 감소하여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대장군 인공수(印公秀)와 함께 원나라로 들어가 쿠빌라이를 만나 표문을 올리고, 3월 신묘일에 고려에 돌아왔다.
표문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근자에 역적들을 소탕하는 일과 많은 군사들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로 인하여 이미 수년간에 걸쳐 가가호호에서 징수하였고 게다가 또 왜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전함들을 건조하는데 장정들은 모두 그 역사에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늙은이들과 약한 자들만이 남아서 겨우 밭갈이와 씨뿌리는 일을 하였으나 처음에는 가물이 들고 나중에는 홍수가 나서 곡식이 여물지 못하였다. 그래서 국가의 수요를 빈민들에게서 징수하는데 몇 말 몇 되에 이르기까지 모두 쌀 항아리를 털어서 바치었으므로 벌써 나무 열매나 풀잎을 먹는 백성들이 있다. 아마도 백성들의 영락과 피폐가 지금보다 심한 때는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출정 군인으로서 부상하였거나 물에 빠져 죽고 귀환하지 못한 자들이 많으므로 비록 남은 인민들이 있기는 하여도 한 달이나 일 년에 그들이 소생하여 숨돌리기를 바랄 수는 없게 되었다. 만약 일본 정벌을 또다시 일으킨다면 거기에 소용되는 전함들과 군량은 실로 우리 나라에서는 공급할 능력이 없다. 결국 나라가 파멸되어 없어지게 될 것이니 이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이 직접 보지 않았으니 응당 그렇게까지야 되었겠느냐고 말할 것이나 나의 간절한 이 호소를 양해하여 주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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