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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가(金方慶家)의 연행록(燕行錄)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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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5-14 14:21 조회1,9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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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흔의 사돈지간 조인규(1227-1308), 30차례이상 연행길

  당시 몽고어 구사 능력은 신분 상승의 지름길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시중직까지 오른 조인규(1227-1308)이다. 충렬왕이나 고려의 사신들이 연경에 가면 통역을 전담하는 인물이 대령총관(大寧摠管) 강수형(康守衡) 이었는데 그는 고려인이 아니었다. 조인규가 급성장하는 결정적 계기는 원나라 세조의 신임 때문이었다. 강수형 대신 그를 어전 통역으로 삼았다. 조인규는 원나라에 30여 차례나 다녀오는 등 외교사절로 활약하여 재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그의 딸이 충선왕비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조인규는 김방경의 아들 김흔의 사위 조연의 아버지로 1282년에는 김방경의 죽판궁 사건으로 김방경을 순마소에 가두기도 하였으나 1298년 딸인 충선왕비 조씨가 계국대장공주의 시샘을 벌인 사건(일명 조비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갔을때는 김방경이 조인규 일가를 적극 변호하기도 하였다.



8) 1276년 통문관 설치, <노걸대> <박통사> 간행

  원과 고려, 양국의 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고려에서는 원의 표준어인 한어에 대한 통역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한어도감은 미천한 계급의 활인(活人, 역관)을 양성하는 곳이어서 귀족의 자제들은 그곳에 입속하여 중국어를 학습하기를 꺼려하였으므로 김방경의 첨의중찬(시중)으로 있을때인 1276년(충렬왕2)에 참문학사 김구(金坵)의 건의로 새로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여 궁중의 학관(學官)이나 40세 미만의 하급 관리들에게 한어를 교육시켰다. <노걸대(老乞大)>는 <박통사(朴通事)>와 함께 이러한 외국어 교육기관에서 사용하던 한어 교과서였다.

통문관(通文館)은 1276년(충렬왕2)에 처음으로 설치해 禁內學官 등 參外로 나이가 40미만인 자에게 漢語를 학습시켰다. 그때에는 舌人(역관)들이 미천한 신분에서 많이 나와서 통역을 할때 사실대로 하지 않고 간사하게 사사로운 일로 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로 참문학사 金坵가 건의해 이를 설치했으며, 후에 사역원을 두어 각종 외국어를 관장하게 하였다.

노걸대(老乞大) : 고려시대 말에 당시 원나라의 서울인 대도(북경)에서 통용되던 북방 중국어를 학습하기 위하여 편찬된 중국어 학습서. 원대 북경지방의 살아있는 구어와 더불어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참으로 희한한 책.

원과의 접촉에서는 새로 등장한 북방의 한어를 학습하여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를 위하여 고려에서는 한어도감, (1276년) 통문관과 같은 언어 학습 기관을 설치하여 이 언어를 교육하였다. 이때에 편찬된 중국어 학습교재가 노걸대(老乞大)이고 박통사(朴通事)인 것이다. 후자는 조금 어려운 수준의 한어 학습교재이며, 그에 비하여 전자는 초급 수준의 교과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1998년에 고려에서 편찬된 원본으로 보이는 노걸대가 발굴되어 필자(정광, 고려대 교수)에 의하여 학계에 소개되었다. 대구 어느 고서 수집가에 의하여 발견된 이 책은 필자에 의하여 1998년 12월에 국어학회 전국학술대회에 보고되었다. 이 책에 학계에 소개되었을 때에 중국과 일본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한 듯하며, 일본의 어떤 연구자는 이 책을 일간 신문에 소개하면서 ‘세기의 발견’이라고 극찬하였다.

노걸대도 사역원의 교재로 편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인으로서 원나라에 오래 체류하다가 귀국하여 사역원의 교회가 된 어떤 인물이 그가 중국을 여행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이 책을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요동, 와점(瓦店), 북경 북쪽 하점(夏店)역, 순승문(順承門) 앞 관점(關店), 탁주(涿州), 양두각시(羊市角頭, 북경 말시장)

그동안 가장 절리, 그리고 오랫동안 이용된 노걸대는 1515년(중종10)경에 최세진이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번역 노걸대>로서 1970년대에 발굴된 것이다.



9) 김방경 5차 연행길 (65세, 1276.7.17-10.7 /3개월)

(1276년 충렬왕이)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왕이 중서성에 편지를 보내기를 “나의 신하 김방경은 귀국의 명령을 받들어 진도와 탐라를 공격하여 반적들을 격파하였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전함들을 수리, 건조하며 군사 위력을 떨침에 있어서도 참으로 그 공로가 많았다. 그러므로 호두 금패(虎頭金牌)를 주어서 일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격려가 되게 하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중찬 김방경, 직사관 문련(文璉)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왕이 중서성에 글을 보내었는바 그 하나는 “달로화적 경력(經歷) 장국강(張國綱)은 총명, 민활, 청렴, 공평하므로 백성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고 있으니 임기는 이미 만료되었으나 계속하여 유임시켜 주기를 바란다” 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 나라의 평제(秤制-저울에 관한 제도)가 귀국과 달라서 전자에 16근짜리 저울 한 대, 열 근 반짜리 저울 추 한 벌, 서 근 두 냥짜리 저울 추 한 개를 받아서 전국에서 사용하게 하고 있으나 아직도 골고루 다 돌아가지 못하니 저울대와 저울추를 각각 5백 개씩 주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폐백을 올리는 예식을 끝내고 궁전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망송유주(亡宋幼主)가 김방경의 뒤에 왔는데 두 사람이 유주의 소매를 붙잡고 인도하였다. 황제가 유주를 황태자의 아랫자리에 앉게 하였다. 예식을 맡은 관리가 김방경과 송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좌석 차례를 결정해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는 의리를 아는 나라요, 송나라는 반항하다가 힘이 모자라게 되어서야 항복한 나라이니 어찌 똑같이 취급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송나라의 복왕(福王)은 유주의 조부 항렬이며 또 나이도 늙었으니 김재상(방경)의 윗자리에 앉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김방경의 아랫자리에 앉히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김재상은 군공이 있으니 호두 금패를 주도록 하라!” 고 하였다. 동쪽 나라(고려) 사람으로서 금부(金符)를 차게 된 것은 김방경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겨울 10월 무진일에 김방경이 호두 금패(虎頭金牌)를 받고 이어 조서를 가지고 귀국하니 왕이 성 밖까지 나가서 그를 맞았다.



10) 승상 안동(安童, 1245-1293)과 교유

  1275년 쿠빌라이는 부인의 조카이자 당시 우승상이었던 유능한 지도자 안동(安童, 1245-1293)을 파견하여 중앙아시아의 노무칸을 지원하게 했으나 체포되어 10년간이나 억류되었다. 1284년 카이두는 마침내 안동을 석방시켰고, 이듬해 1월 4일 안동은 다시 우승상의 지위를 회복했다. 1284년 3월 26일 그들은 대도에 도착했다.

  김방경은 원나라 사행에 들어갔을때 승상 안중(安重)이 때마침 삭방(朔方-원나라 북방 지방)에 나가고 없었을때 김방경이 은우(銀盂-은제 술잔의 일종)와 모시 베를 그 부인에게 보내 주었다. 

  김주정(金周鼎)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명재상으로, 황제로부터 만호(萬戶)를 제수받아 명망이 두 나라의 조정에서 무거웠다. 아들 김심(金深, 1262~1338) 또한 만호와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며, 세 번이나 정승에 임명되었다. 1278년 나이 17세에 의관자제(衣冠子弟)로 황제의 궁궐에 입시(入侍)하였다.김심의 둘째 딸은 원(元) 인종(仁宗)의 황후인 답리마실리황후(答里麻失里皇后)가 되었고, 넷째는 대도유수(大都留守) 안동(安董)에게 시집간 경령택주(敬寧宅主)이다. 또 영가군부인 김씨(永嘉郡夫人 金氏)와 결혼하여 딸 한 명을 낳았다.


승상 안중(安重)은 본래 우리 나라에 유익되는 일을 해 준 일이 있는 자인데 때마침 삭방(朔方-원나라 북방 지방)에 나가고 없었으므로 국가에서 따로 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김방경이 은우(銀盂-은제 술잔의 일종)와 모시 베를 그 부인에게 보내 주었더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김재상이 보내 준 것이 아닌가? 승상이 북쪽으로 가고 난 뒤에는 국가적 선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공(김방경)이 아니면 누가 이런 부녀자를 생각해 주겠는가?”라고 하였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 안동(安童, 1245-1293) : 쿠빌라이 부인의 조카이자 당시 우승상이었던 유능한 지도자로 쿠빌라이의 최측근, 몽골에서 가장 전통있고 특출한 가문 중 한 가문의 태생

--- 병참선을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칸은 중앙아시아의 반대 세력들을 진압하는 데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1275년 쿠빌라이는 부인의 조카이자 당시 우승상이었던 유능한 지도자 안동(安童, 1245-1293)을 파견하여 노무칸을 지원하게 했다. 안동은 노무칸의 야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이 청년이 왜 카이두와 여타 적대 세력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지를 금세 간파했다. 분파주의와 분쟁이 만연하여 노무칸 군대의 여러 왕자들이 분열해 있었던 것이다. 안동은 톨루이의 손자이자 쿠빌라이의 조카인 툭 테무르와 반목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분쟁에 휘말려들었다. 툭 테무르는 톨루이 가문 내에서 자신의 지파인 소르칵티니 베키의 아들들, 특히 쿠빌라이에게 따돌림 당해온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 자료들은 침묵하고 있다.

1276년 말 노무칸을 수행하던 왕자들이 음모를 꾸며 반기를 들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들은 야음을 틈타 몰래 몰래 노무칸의 야영지로 가서 노무칸과 그의 아우 쿠케추, 그리고 안동을 사로잡았다. 노무칸과 쿠케추는 킵착 칸국의 칸 뭉케 테무르에게 보내고, 안동은 카이두에게 보냈다. 체포자들은 거의 10년 동안 그들을 억류시키기만 했다. 1284년 카이두는 마침내 안동을 석방시켰고, 이듬해 1월 4일 안동은 다시 우승상의 지위를 회복했다. 1284년 3월 26일 그들은 대도에 도착했다. 두달후 쿠빌라이는 아들 노무칸이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서 이룩한 성과를 인정하여 북안왕(北安王)에 봉했다.

그는 몽골인의 유일성과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와 다음 세대의 칸들은 이따금씩 몽골의 왕자들을 외국 통치자들과 혼인시켰지만, 몽골인괒 중국인의 결혼은 대체로 제한하고자 했다. 그는 중국인이 몽골어를 배우는 것을 가급적 막으려 했다. 중국의 황제로서 유교식 제례, 축제, 제위를 계속 시행했고, 자신의 최측근인 몽골인 안동 등 많은 최고위급 참모들에게 지시하여 중국의 법규와 의례 가운데 조정에서 시행해도 좋을 만한 것을 조사하고 선별하게 했다.

몽골에서 가장 전통있고 특출한 가문 중 한 가문의 태생이었던 안동은 상가의 파당과 그의 피후견인 노세영에 대항해 격렬한 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다.             < 쿠빌라이 칸, 그의 삶과 시대,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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