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가(金方慶家)의 불교(佛敎) (2)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9-04-30 11:23 조회2,365회 댓글0건본문
16) 김방경 1283년 치사후 고향(안동) 왕래. 1295년 식읍지(상락국개국공 식읍1천호 실봉3백호) 왕래
김방경은 1283년 치사후 고향 안동에 자주 왕래하였을 것이다. 회곡리 집터, 정자터, 상락대 등지가 남아 있다.
○ 회곡촌(檜谷村) : 하계곡(下桂谷) 서쪽 몇 리쯤에 있다. 중앙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들어 간다. 외로운 산이 강과 시내가 합치는 곳에 있으니 여기가 충렬공(忠烈公)8) 이 정자를 지은 곳이다. 마을 입구에 남쪽으로 향하여 큰 밭이 있는데 유전(流傳)하기를 이는 충렬공(忠烈公)의 집터라고 한다. 충렬공(忠烈公)은 대대로 여기에 살면서 여러 대(代)에 걸쳐 벼슬하였다. 문극공(文克公) 설헌(雪軒) 정오(鄭?)와 대사간(大司諫) 설곡(雪谷) 정포(鄭?)는 외가이므로 와서 살았다.
○ 상고산(上孤山) :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회곡촌(檜谷村) 앞의 남양담(南陽潭) 위에 있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12)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는데, 그 기초(基礎)가 지금도 남아있다.
○ 상락대(上洛臺) : 안동부 서쪽 25리 회곡촌(檜谷村)의 남쪽 기슭에 있는데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일찍이 유상(遊賞)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동쪽에 마암(馬巖) 절벽이 있어 천길을 깎아 세운 듯 하다. 암서(巖西)에는 석대(石臺)가 반회(盤回)하고 기괴(奇怪)한 경치가 형용하기 어려우며, 아래는 맑은 못에 배를 댈만하고 위에는 수십 인이 앉을 수 있다. 돌 사이에는 비채(菲菜)가 많이 나는데, 전하기는 상락공이 심은 것이라 한다.
《출전 : 국역 영가지》
17) 보각국사 일연(普覺國師 一然, 1206∼1289)
경주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포산에서 수행하다 몽고 침공을 맞아 포산에 은거하고 선월사 오어사 인홍사 운문사 등에서 주석하다 국사가 되고 인각사에 물러나와 입적하였다. 후에 그의 수제자 혼구가 1296년 김방경과 함께 몽산덕이와 교유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저서는 『語錄』2권·『偈頌雜著』3권이 있고, 그 편수(編修)한 바로는 『重編曺洞五位』2권·『祖派圖』2권·『大藏須知錄』3권·『諸乘法數』7권·『祖庭事菀』30권·『禪門拈頌事菀』30권 등 백여권이 세상에 유행(流行)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삼국유사>는 언급이 없다.
음기에 문도들을 승려와 재가로 나누어 열거하였는데,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상장군(上將軍) 나유(羅裕), 대학사(大學士) 상장군(上將軍) 김주정(金周鼎),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상장군(上將軍) 정가신(鄭可臣), 좌복사(左僕射) 참지광정원사(參知光政院事) 상장군(上將軍) 홍자번(洪子藩), 한림원사(翰林院事) 이장용(李藏用, *1272년 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장군(上將軍) 송송례(宋松禮), 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 전현사(典現事) 원부(元傅), 참문학사(參文學士)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 김구(金坵), 참문학사(參文學士) 찬성사(贊成事) 박항(朴恒),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도순문사(都巡問使) 염승익(廉承益), 추밀원(樞密院) 부성사(副成事) 김련(金璉) 등의 이름이 보인다.
18) 1295년 김방경 등 고려의 승속, 몽산덕이와 교유
蒙山은 丁丑년(1277) 여름부터 澱山의 일을 마치고 中吳의 休休庵이라는 작은 庵子에 머물러 쉬고 있었다. 그가 63세 되던 고려 충렬왕21년(1295) 겨울에 고려에서 了庵元明 長老(法門景致 발문)와 覺圓上人, 覺性上人, 妙孚上人 등 8사람이 찾아가 같이 지내다가 충렬왕22년(1296) 여름에 仲孚上人 등 4사람은 돌아 갔다.
그해 겨울 萬壽上人이 몽산에게 가서 전하기를 고려국 내원당대선사 混丘, 정녕원공주왕씨 妙智, 명순원공주왕씨 妙惠, 전 도원수 상락공 金方慶, 시중 韓康, 재상 廉承益, 재상 金昕, 재상 李混, 상무 朴卿, 상무 柳거 등 여러 사람이 재삼 만나고자 하는 뜻을 전하여 오므로 休休長老가 멀리 上庵에서 安居하고 있을 때라 나누어 施를 베풀었다. 몽산은 답을 하지 않고 만수상인을 청하여 요암장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생략) 그리고 몽산은 그와 만나기를 원하고자 하면 다음의 三轉語를 푸는 것에 따라 入門을 허락한다고 하니 모두 화두를 듣기를 원하였다.
* 필자(남권희 교수)가 이 자료(法門景致)를 구하게 된 것은 1994년 봄 시중의 서점에서 일단의 불교자료를 살피던 중에 일부가 낱장으로 체계가 없이 흩어져 있는 필사본 하나를 보게 되어 구입하게 되었다. 그후 자세히 살펴보니 어느 정도의 연결과 복원이 가능하여 정리를 마쳤으며 표지의 서명은 <諸經撮要>였다.
< 도서관학논집 제21집, 1994, 한국도서관 정보학회 >
<1295-1300 몽산덕이와 고려 인물과의 교류>
1295 (몽산63세) 乙未 충렬왕 21년
겨울에 了庵元明長老, 覺圓上人, 覺性上人, 妙孚上人 등 8人의 道友가 三韓(高麗)으로부터 와서 조용히 지내기를 같이함.
1296 (몽산64세) 丙申
여름. 中孚上人 등 4人의 道友가 고려로 돌아감
겨울. 고려의 萬壽上人이 왔고, 고려국 내원당대선사 혼구, 정녕원공주왕씨 묘지, 명순원공주왕씨 묘혜, 전도원수 상락공 김방경, 시중 한강, 재상 염승익, 재상 김흔, 재상 이혼, 상서 박경, 상서 유거 등 여러분이 재삼 편지를 보내어 문답함.
1297 (몽산65세) 丁酉
仲春, 法門(十松)景致의 序文을 씀 (十松序)
* 이때는 충렬왕22년(1296) 9월부터 동왕23년(1297) 5월까지의 8개월간 공주와 從臣 243인 총 590인을 데리고 세자의 결혼참석과 하정을 목적으로 하여 실제로는 元의 강압을 완화시키고 고종46년(1259) 이후의 포로를 송환받았다. 回賜品으로는 여러 것이 있었으나 왕과 공주는 金叚衣를 받았다. 1297.5.15 충렬왕이 김방경의 집에 머물렀다.
1298 (몽산66세)
상인을 통하여 萬恒이 몽산의 서문이 있는 <육조대사법보단경>을 구함 (덕이본 육조단경 序)
2월 2일 십송설의 서와 가송의후서를 씀 (십송서)
4월 12일 동안거사 이승휴에게 법어를 보냄 (동안거사집)
1300
고려에서 만항이 덕이본 육조대사법보단경을 간행함 (덕이본 육조단경 서)
중오(中吳, 중국 윤주(潤州)의 다른 이름.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의 몽산덕이(蒙山德異)가 그의 글과 게송을 보고서 칭찬하기를 마지 아니하여, 열 몇 편을 화답하고 이어 편지를 보내어 '고담(古潭)'이란 아호(雅號)를 지어 주었다.
< 수선사혜감국사비(修禪社慧鑑國師碑) >
18-1) 수선사 6세(1286-1319) 혜감국사 만항(慧鑑國師 萬恒, 1249~1319)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금강산, 지리산과 낭월사, 운흥사, 선원사 등에서 수학하며 가르치다 중국의 몽산덕이와 서신으로 교유하고 충렬왕의 우대를 받았다.
18-2) 김방경, 滿月峯 了了庵 信和尙과 서면으로 교유
金方慶이 滿月峯 了了庵 信和尙에게 답한 글이 이승휴(1224-1300)의 문집 <동안거사집>에 실려 전하고 있다.
* 滿月峯 了了庵 信和尙 : 미상(철산소경 또는 원명국사 충감 가능성)
전 중봉대부(中奉大夫) 도원수(都元帥)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상장군(上將軍) 판전리사(判典吏事) 세자사(世子師)로 치사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식읍 일천호 식실 삼백호 김방경(金方慶)이 만월봉(滿月峰) 요요암(了了庵) 신화상(信和尙)에게 답한 글
지난 번 보내 준 양칙(兩則)의 법어(法語)를 항상 '목우자사기(牧牛子私記)'위에 놓아두고 서로 바꿔 가며 보면서, 보고 음미하며 싫어함이 없었으나, 근기(根氣)가 낮고 용렬해서 아득히 내 코를 찾아도 이해가 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감히 그것을 가슴에 새겨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겸해서 게송(偈頌)을 보내 주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유마(維摩)의 方丈(방장)*1)이 모암(茅庵)을 생각하였고,
금색의 두타(頭陀)가 화담(話談)을 접했도다.
팔만(八萬)의 예상(猊床)*2)을 어디에 놓았던고,
거울 같을 작은 못이 갑자기 와서 비춘다'
하였는데, 이 말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 요요암명(了了庵銘)을 보여 주었습니다.
옛날에 한 노인이 이르기를, "마음이 밝으면 법을 밝게 하고, 자기를 밝게 하면 사람을 밝게 한다. 자기가 밝지 못하면 곧 사람과 자기가 미혹하게 되고, 마음이 밝지 못하면 모든 세계가 마음을 따라 미혹해진다"고 하였고,
또 한 노인이 있어 말하기를 "만법이 본래 공(空)하니,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이미 있는 것이 아니니 밝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원만해지고, 법이 이미 본래 공(空)하니 밝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항상 적적하다."고 하였고,
양무위자(楊无爲子)가 또 노래해 말하기를,
"산당(山堂)에 새벽이 되니 백운이 날아오르고,
산당(山堂)에 저녘이 되니 백운이 돌아가도다.
청송(靑松)이 늙음이여 월계(月溪)가 밝네,
밝고 밝지 못함이여 누구와 더불어 알 수 있겠는가?"고 하였고,
삼단어칙(三段語則)에 이어서 말하기를, "청컨대 거사는 주각(住脚)하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내 경계(境界)가 아닌데, 내 어찌 그것을 감당하겠소.그러나 내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앞의 두 노인은 각기 한 부분을 찬양하고 무위자(無爲子)는 중간에서 노래했으니, 요요의 뜻이 지극하여 그 이상 더할 것이 없습니다.
또 한 노인*3)이 있어 자기의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운을 이어 지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맑게 개인 가을 하늘에 외로운 새가 날아가니 秋空晴兮孤鳥飛
내 자취를 숨기며 어디로 돌아가려 하느냐. 沒朕迹兮將安歸
회광반조(廻光反照)*4)함이여 못 미침이 없다네. 廻光炤兮无欠餘
명성이 미치지 않음은 심상하게 아는도다. 名不及兮尋常知
내가 한 마디 한 것을 화상은 어떻게 여기는가. 和尙以爲如何
귀위(歸依)할 바를 가르쳐 주길 바랍니다. 伏望小示指歸
< 동안거사집 >
갑진년(甲辰年) 가을 우리 스님(*천희, 1307-1382)께서 배를 타고 중국 항주(杭州)에 이르렀다. 내(*이색)가 스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규보(跬步)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그리하여 스님께서 휴휴암(休休菴)에 이르렀다. 그 날 밤 몽산(蒙山)의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 곧 영각(影閣)에 방광(放光)함이 있었다. 삼전어(三轉語)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병오년(丙午年) 봄 만봉(萬峯)을 성안사(聖安寺)로 찾아 갔으나, 만봉은 3일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만봉(萬峯)이 말하기를 “내가 병이 있으나, 누가 친절한 마음으로 나의 병을 간호(看護)해 주겠는가” 하였다. 스님께서 주먹으로 그의 등을 안마해 주었다. 그 날 밤 삼경(三更)에 만봉이 가사(袈裟)와 선봉(禪棒)을 전해주면서 이르기를--- 성안사(聖安寺)를 떠나 오강(吳江)에 이르니, 어떤 스님이 그곳에 머물기를 청(請)하였으나, 스님은 굳게 사양하고 떠났다. 만봉회상(萬峯會上)의 어느 스님이 만봉이 삼경(三更)에 스님에게 전해준 의(衣)·봉(棒)을---
< 창성사 진각국사비 >
* 경기도 수원시 상광교동 창성사 터에 있는 고려 말기 화엄종의 고승 진각국사 천희[眞覺國師 千熙 : 1307(충렬왕 33년)~1382(우왕 8년)]의 비. 이색(李穡)이 짓고 혜잠(惠岑)이 새겨 1386년(우왕 12년)에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진각국사가 중국 항주에 가서 휴휴암에서 몽산화상이 방광함을 현몽하고 임제종의 만봉시울(萬峯時蔚)의 법을 전해 받고 돌아와 ---
18-3) 이승휴 말년의 불교 심취
1280년(충렬왕6) 나이 57세에 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충렬왕의 失政과 부원 勢力家들의 횡포를 비판한 10事를 上疏했다가 파직되어 삼척 두타산으로 돌아온 후 인근 寺刹에서 佛書를 빌려다가 탐독하였다. 삼척에 은거하여 두타산 구동에 용안당(容安堂)을 세우고 10여년간 삼화사에서 1000상자의 대장경을 빌려 읽음
만년에는 불교에 몰입하여 용안당을 간장사(看藏寺)로 고치고 토지를 희사하기도 하였다. 이승휴의 이곳 삼척 頭陀山두타산 아래 中臺洞중대동 龜山洞구산동 龍溪용계(현재의 천은사)에 은거하면서 容安堂용안당=看藏寺간장사, 葆光亭보광정, 瓢飮渟표음정, 知樂塘지락당을 짓고 살았다.
19. 홍진국존 혜영(弘眞國尊 惠永, 1228~1294), 자은종(법상종) 계열. 1298년 김방경의 아들 김순이 비문 서함. 김순의 아들 김사순은 출가하여 자은종(법상종) 대덕이 됨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흥덕사·속리사·불국사·중흥사·유가사·성도사 등에 주석하고 사경승 백여명을 이끌고 원(元)에 가서 법화경을 사경하였으며 1292년(충렬왕 18)에 국존에 책봉되었다.
1298년 정의대부(正議大夫) 밀직사(密直司) 좌승지(左承旨) 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 문한학사(文翰學士) 충사관(充史館) 수찬관(修撰官) 지제고(知制誥) 김순(金恂)이 교지(敎旨)에 따라 비문을 쓰고, 문인(門人)이며 동화사 주지인 심지동해(深智洞解) 오명대사(五明大師) 효정(孝楨)은 입비공사(立碑工事)를 맡았다. 현재 비는 없어지고 비문 탁본만 남아 있다.
김순의 아들 김사순(승명 宗慈) 출가하여 자은종(법상종) 대덕이 되었고, 1327년 김순의 아들 김영후(김사순 동생)가 상주목사로 있을때 법주사(*법상종 계열) 자정국존과 교류하였다.
3남 사순(思順)은 머리를 깎고 자은종(慈恩宗)의 대덕(大德)이 되었으며,
그 다음 사순(思順)은 출가하여 자은종(慈恩宗) 대덕(大德)이다.
<1321, 김순 묘지명>, <1332, 김순처허씨 묘지명>
(김영후 36세) 1327년(충숙왕14) 4월에 상주목사가 되어 객관(상주 상산관)을 완성하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우니 이제는 비록 사신이나 손님이 많이 오더라도 유숙하는데 여유가 있게 되어 읍인들도 안심하게 되었다.
<안축의 근재집 상주객관중영기>, <김종직의 점필재집 풍영루중수기>
1327년(충숙왕14, 정묘) 12월 1일 아침, 법주사 자정국존이 입적하기 직전 서기를 방장실로 불러 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인 김영후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에 이를 무렵 조용히 앉아 입적하였다.
<1342 이숙기찬 전원발서 법주사자정국존비문>
20) 김방경 만년 본댁, 개성 앵계리
앵계리는 김방경의 말년 본댁이 있던 곳으로, 정인경(1237-1305)의 말년 별장이 있었고, 유자우(초명 유서, 1260-1313)의 말년 본댁이 있던 곳으로 유자우는 김방경의 사위 조변의 사위로 이승휴, 정인경과 사돈간이었다(유자우의 딸이 이승휴의 아들 이임종, 정인경의 아들 정신수에게 출가)
대덕(大德) 4년(충렬왕 26, 1300) 8월 16일에 병환으로 백목동 앵계리(栢木洞 鸎溪里)에서 돌아가시니, 9월 초3일에 예안(禮安)의 서산(西山) 기슭에 장례지냈는데, 유언에 따른 것이다.
<김방경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정인경(鄭仁卿 : 1237~1305) 은 말년에 앵계리(鶯溪里)의 별장[別業]을 다스리며 즐겁고 여유롭게 지낸 지 몇 년이었다. 10년 병오년(충렬 32, 1306) 2월 19일 박현(樸峴)에 장례지냈는데, 추증된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정인경 묘지명, 1306년 방우선(方于宣) 찬 >
유자우(庾自㥥 : 1260~1313)의 본관은 무송(茂松 :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이며, 처음 이름은 서(瑞)이다. 1297년(충렬 23) 감찰시사(監察侍史)를 거쳐 동계교주도안렴사(東界交州道按廉使)가 되었는데, 이 때 삼척현에 은거하고 있던 이승휴를 방문하여 충선왕의 명에 따라 초치하였다. 복주목사(福州牧使),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내고 병이 들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황경(皇慶) 2년 계축년(충숙 즉위, 1313) 10월 18일에 앵계리(鶯溪里)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춘추 54세이다.
<유자우 묘지명, 1313년 최원중(崔元中) 찬 >
21. 1302년 영가군부인 김씨
어느 사찰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경북 북부의 어느 사찰로 추정, *화엄종 계열), 불복장물로 발견된 <1302년 아미타불 복장유물> 중에 김효인의 딸로 추정되는 영가군부인 김씨의 발원문이 들어 있다. 현재 온양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墨書 發願文
淸信戒弟子高麗國永嘉郡夫人金氏
金敏成 / 金孝印 / 宋氏夫人 / 宋耆 / 崔文本 / 上洛公金氏 / 朴氏夫人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