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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가(金方慶家)의 불교(佛敎)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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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4-30 11:24 조회2,1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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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몽산덕이의 수제자 철산소경

  중국 강남 임제종 양기파의 몽산덕이의 수제자로 고려 출신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철산소경은 고려의 산수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관광하기를 바라던 차, 고려 道俗의 요청이 있어서 1304년 가을에 와서 원명국사(충감), 김변처 허씨, 권단, 박전지 등과 교유하였고, 강화 보문사에서 3본의 대장경을 보고 그 가운데 許評의 부부가 봉안한 1본을 얻어서 강서 의춘현의 大仰山으로 옮겼다.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를 세웠는데, 민지 찬, 김순 서, 윤보 전액, 금강산 성불사(成佛寺) 일목(釋 一牧) 입비, 중국 앙산사(仰山寺) 주지 희릉(希陵, *철산의 제자로 생각됨) 참석하였다. 


22-1) 원명국사 충감(圓明國師 冲鑑, 1275~1339), 중국 강남 유학 철산소경과 함께 귀국

  충감은 선원사(禪源寺) 출신으로 중국의 강남지방에 유학한 후 간화선의 대가로 이름이 높던 몽산(蒙山) 덕이(德異)의 제자 철산(鐵山) 소경(紹瓊)과 함께 귀국하여 간화선풍을 널리 퍼뜨렸고, 선종 승려들의 생활규범을 정리한 『선문청규(禪門淸規)』의 보급에도 힘썼다. 1336년(충숙왕 복위5)에 그가 개경을 떠나 보광사로 은퇴하자 지방관과 충감의 가족들이 물자를 시주하여 보광사를 크게 중창하였고, 이후 이 곳에는 그의 문도들이 주석하게 되었다.


(중국의) 오초(吳楚 : 강남지방) 지역에 머물 때에 철산(鐵山) 소경(紹瓊) 선사의 도행이 대단히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모시고 고려로 돌아와서, 3년간 모시니 소경선사도 크게 기대하였다.

소경선사가 중국으로 돌아감에 미쳐 스님은 용천사(龍泉寺)의 주지가 되었는데, ---

< 보광사대보광선사비(普光寺大普光禪師碑) >


22-2) 1306년 강화도 보문사의 허평(허공의 아들) 부부의 대장경을 철산소경이 중국 의춘현 대앙산으로 옮김. <고려국대장이안기>를 민지 찬, 김순 서로 세움.

  <고려국대장이안기(高麗國大藏移安記)>는 충렬왕(忠烈王) 때에 고려를 방문했던 중국 승려 철산(鐵山) 소경(紹瓊)이 강화도 보문사(普門寺)에 있던 고려대장경 1질을 기증받아 중국으로 가져간 사실을 기록한 글이다. 당시 보문사에는 3질의 대장경이 있었는데, 이 중 허평(許評)과 그의 부인 염(廉)씨가 기증하였던 1질을 허평 부부의 허락 하에 중국 의춘현(宜春縣)의 대앙산(大仰山)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철산 소경은 고려 불교계의 초청으로 1304년(충렬왕 30)에 고려로 건너와 간화선을 널리 퍼뜨리는 등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22-3) 1304년 김변처 허씨(허공의 딸), 철산화상 대승계 받음

  1301년 김변이 죽자 부인 허씨(*허공의 딸)은 대덕산(大德山)의 남쪽 언덕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장례가 끝나자 이 산의 서남쪽 가까운 곳에 가히 서로 볼 수 있는 곳에 집을 짓고, 이곳에서 1 리도 못 되는 곳에 절을 지어 고인의 명복을 비는 곳으로 하였다. 이름을 감응사(感應寺)라 하였다.

  1302년 무선사(無禪師)가 강회(江淮)로부터 배를 타고 오자 부인은 사모하여 뵙고 처음으로 법요(法要)를 들었다. 1304년 철산화상(鐵山和尙)이 남쪽으로 와 교화를 하자 대승계(大乘戒)를 받았다.


22-4) 1304년 권단, 철산화상를 스승으로 섬김

  권단(權㫜, 1228~1311)은 남악(南嶽)의 철산화상(鐵山和尙)이 배를 타고 오자 공이 그가 견성(見性)하였음을 알고, 머리를 깎고 스승으로 섬겼다.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만년에 선흥사(禪興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노연(盧演)의 딸과 결혼하여 한 아들을 두었는데 바로 권부(權溥 *이제현의 처부)이다. 묘지는 이진(李瑱 *이제현의 부)이 지었다.


22-5) 박전지 진상에 철산화상이 찬을 지었다.

  박전지는 중국의 소림장로(小林長老)가 한 번 보고는 훌륭하게 여겨 모습을 그려 진상(眞像)을 전하게 하고 남악(南嶽)의 철산화상(鐵山和尙)이 찬(讚)을 지었다. 스스로 호를 지어 행산몽천무구거사(杏山蒙泉無垢居士)라고 하였으며, 항상『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외우면서 ‘무자(無字)’ 화두(話頭)를 더욱 절실하게 하였는데, 즐거운 소식을 들으면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일찍이 한 번도 ‘무자(無字)’를 거론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


23) 1314년 원관(元瓘, 1247~1316, *김방경의 손자 김승용의 처부)의 항주고려혜인사대장경희사기(杭州高麗慧因寺大藏經喜捨記)를 민지 찬, 김순 서함

  첨의찬성사 원관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강절행성 경원로 四明山의 天童禪刹(천동사, *후일 충선왕이 임백안독고사의 무고를 피해 피신한 사찰)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였다. 1314. 2월 고려의 민지 찬, 김순 서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고려국 첨의찬성사원공 사대장경기>를 세웠는데 이저(翥)의 옥잠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6에 실려 있다.

  1312년 겨울에 충선왕이 홍약으로 하여금 중국 강남의 강절행정 항주로 고려 혜인사를 중건하고 금자 대장경을 시납하였고, 그 2년 후에 원관이 대장경의 인본과 토지를 제공하였다. 재상 원관이 혜인사를 위해 토지를 기진한 것을 기념하게 위해 1314. 3월 고려 혜인사의 주지 혜복이 지은 <고려국상원공 치전(置田)비>가 이저(翥)의 옥잠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7 에 실려 있다.


강절(江浙)에서 대장경 한 부가 만들어져서 항주(杭州)의 혜인사(惠因寺)에 모셔두었는데, ▨ 실로 만세(萬世)의 보물이었다. 이를 아울러 사들이면서 ▨전(田)▨장(藏), ▨백찬(白粲, 白米) 15▨를 바쳤다. 몇 년에 걸쳐 토지와 노비[田藏]의 경비를 들여 기울여 장수를 비는 비석을 세우니, 강남의 도인(道人)과 속인(俗人)이 노래를 지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시를 이은 것이 한 축(軸)이나 되었는데 이를 보내왔다.                                                                          <원관 묘지명>


24) 김순과 김영돈 거주지, 개성 동쪽의 덕수현(德水縣) 마산(馬山), 앙동산(仰洞山)

  김방경의 아들 김순은 노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시정(時政)에 참여하지 않은 채 마음을 비우며 지냈다. 예서(隸書)에 능하였고 성기(聲伎-노래 잘하는 기생)를 집에 데려다 두고 날마다 악기(거문고와 퉁소)를 듣는 것으로써 낙을 삼았다. 1321년 개성 동쪽 덕수현(德水縣) 마산(馬山) 위에 장사지냈다. 민지가 지은 묘지석은 1942년 개풍군 임계년 가정리 마산 동록 장씨 성을 가진 무덤 부근에서 誌石을 발견되었다.

  손자 김영돈은 일찍이 덕수현(德水縣) 동쪽의 강과 산이 아름다운 곳에 별장[野莊]을 지었다. 1348년 덕수현 앙동산(德水縣 仰洞山)에 장례지냈다. 


영돈 등은 이미 장지를 德水縣 馬山 위에 묘지를 점지하고 장차 장례를 지내려고 하는데 나(=민지閔漬)는 선공(=김순)의 친구가 되기 때문에 공의 行狀을 갖추고 와서 銘을 간절히 요구하므로 내가 비록 병들었으나 세워놓고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여 銘을 쓰노라.

< 김순 묘지명, 1321년 민지 찬 >

⇒ 1942년 개풍군 임계년 가정리 마산 동록 장씨 성을 가진 무덤 부근에서 誌石을 발견


공(=김영돈)은 일찍이 덕수현(德水縣) 동쪽의 강과 산이 아름다운 곳에 별장[野莊]을 지었는데, 매 번 문득 가면 열흘이나 한 달을 머무르니 마치 장차 세상을 버린 것 같았다. ---  무자년(충목왕 4, 1348) 7월 무신일에 병이 들어 돌아가시니, 춘추가 64세이다. 빈소를 성 안의 공의 집으로 옮겼는데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슬퍼하고 서로 조문하였다. --- 8월 병술일에 덕수현 앙동산(德水縣 仰洞山)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추증하여 문숙(文肅)이라고 하였다. 내(=안진)가 이미 공(=김영돈)을 만나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그 행적을 자세하게 적었다.

< 김영돈 묘지명, 1346년 안진 찬 >


25) 김방경 사위 채홍철 만년 불교에 심취

  채홍철은 1300년대 초 장흥부사(長興府使)의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한가로이 있은지 무릇 14년이었다. 스스로 중암거사(中菴居士)라 부르면서 항상 불교의 선지(禪旨)와 거문고 책 약 짓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특히 불교에 조예가 깊어 그 도를 논함에 비록 승려라 하더라도 공이 한 마디 말로 굴복시켰다. 일찍이 집 북쪽에 전단원(旃檀園)을 창설하여 항상 선승(禪僧)을 봉양하니 자못 득도한 자가 나왔다. 또 약방을 (전단)원 가운데 베풀어 나라 사람들이 의뢰하였으며, 활인당(活人堂)이라 불렀다. 뒤에 집 남쪽에 당(堂)을 짓고 중화당(中和堂)이라 이름하고, 때로 영가군 권공(永嘉君 權公 : 權溥, *권단 아들, 이제현 처부) 이하 국상(國相) 8인을 맞아들여 기영회(耆英會)를 만드니, 대개 옛 어진 이를 사모한 것으로 풍류가 줄어들지 않았다.  

  서울 북한산(삼각산) 경국사(慶國寺)는(정릉 4동 사무소 앞 하차)는 1325년(충숙왕12) 자장율사가 청암사란 이름으로 창건하여, 김방경의 사위 채홍철(蔡洪哲)이 1331년(충혜왕1) 선방을 증축하여 선승들의 수도를 적극 권장하였으며 장모(?상월)를 거처하게 한 곳이라 전함. 사찰 경내의 요사채엔 만월(滿月)이라는 당호가 있음.

  고려 말의 고승 원증국사 태고보우[圓證國師 太古普愚, 1301~1382)는 37세 되던 해 겨울에 전단원(栴檀園)에서 안거(安居)하였고, 후에 한양(漢陽)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 주석하게 되었는데, 동봉(東峯)에 자그마한 암자를 짓고는 편액(扁額)을 태고암(太古庵)이라 하고, 그곳에서 영가(永嘉)스님(*?권단)의 증도가(證道歌)를 본받아 태고암가(太古庵歌) 한 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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