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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가(金方慶家)의 불교(佛敎)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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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4-30 11:19 조회2,31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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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비명(碑銘)과 묘지명(墓誌銘)을 통해 본

김방경가(金方慶家)의 거주지(居住地)와 불교(佛敎)


1) 수선사 개창조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1210년 입적. 김방경 만년에 보조국사(지눌)의 <목우자사기> 애독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나 종휘선사에게 출가하여 수학하다 승과에 급제하고 <육조단경>을 보다가 깨쳤으며 화엄경합론을 보고 이치를 알았고 팔공산 거조사에서 고사들과 정혜결사를 결성·수련하고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혜어록>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송광산 길상사(얼마 후 조계산 수선사로 이름을 바꿈)로 옮겨 수백명의 입사자를 지도하며 정진하다 입적하였다.

  김방경은 말년(1295년경)에 만월봉 요요암 신화상이 보내준 법어, 게송, 요요암명과 <목우자사기(牧牛子私記)>를 애독하였는데, 목우자사기는 보조국사(지눌)가 입적하기 한 해 전인 1209년 저술한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로 禪修行의 요체를 서술한 것이다.


<전 중봉대부(中奉大夫) 도원수(都元帥)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상장군(上將軍) 판전리사(判典吏事) 세자사(世子師)로 치사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식읍 일천호 식실 삼백호 김방경(金方慶)이 만월봉(滿月峰) 요요암(了了庵) 신화상(信和尙)에게 답한 글>

---지난 번 보내 준 양칙(兩則)의 법어(法語)를 항상 '목우자사기(牧牛子私記)'위에 놓아두고 서로 바꿔 가며 보면서, 보고 음미하며 싫어함이 없었으나, 근기(根氣)가 낮고 용렬해서 아득히 내 코를 찾아도 이해가 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감히 그것을 가슴에 새겨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동안거사집 >


2) 1212년 김방경 출생

  김방경은 1212년 태어나 어려서부터 조부 김민성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김방경의 거주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고 있다.

○ 1212년 광주부(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듯.

○ 1212-1227 (1-16세, 16년) : 어릴때 조부 집에서 성장.

○ 1227-1232 (16-21세, 5년) : 출사하여 개성에 거주.

○ 1232-1270 (21-59세, 38년) : 임시수도 강화도에 거주(전등사가 있는 정족산 아래 길상면 온수리). 강화도 거주시절에 1241년 이규보, 1246년 최종준, 1253년 김효인, 1256년 김창 죽음. 1267년경에는 모 금녕송씨 돌아가시자 고향에 들림.

○ 1270-1300 (59-89세, 30년) : 개성에 거주(?앵계리, 고류동, 앵계리)

○ 1283년(72세) 치사후 고향 안동에 자주 왕래(회곡리 집터, 정자터, 상락대)

○ 1295년 상락군개국공 식읍 1천호 식실 3백호를 받음(?회곡리)

○ 1300년 만년 본댁 거주(개성 앵계리). 앵계리에는 정인경, 유자우(*이승휴의 사위)가 거주.


(수어사 서명응에게 남한산성에 대해 물으시다.)

여조(麗朝)의 김방경(金方慶)·조견(趙?)이 다 이곳에서 났으니, 광주(廣州) 한 부(府)는 인재의 부고(府庫)라 할 수 있을 만하다. 요즈음에도 향당(鄕黨)에서 이행(異行)·기재(奇才)로 이름난 자가 있는가?

<조선왕조실록, 정조3년 己亥(1779, 건륭44) 8월 7일 戊午>


김방경이 태어나서 조부 김민성(敏成)의 집에서 자랐는데 뜻에 조금만 마땅치 않고 노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거리에 나가 드러누워서 울었으나 오가는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3) 수선사 2세(1210-1234년)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 1235년 김방경의 아버지 김효인이 비문을 서함.

  나주 화순현에서 향공진사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후 보조국사(지눌)에게 출가하여 간화선을 수행하고 보조국사에 이어 수선사의 사주가 되어 강종의 지원으로 수선사를 확장하고 집정자 최우는 두 아들을 국사에 출가시키는 등 연관을 맺고 월등사에서 입적하였다.

  1235년 이규보가 撰하고, 장사랑(將仕郞) 중서(中書) 사인(舍人) 지제고(知制誥) 태자사(太子司)의랑(議郞)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효인(金孝印, *김방경의 아버지)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썼다.

  음기는 입적 후 16년이 지난 1250년(고종 37)에 최자(崔滋)가 짓고 탁연(卓然)이 썼는데, 내용은 음기 건립 사실과 승려와 재가 문도들을 열거하였다. 음기에 시중(侍中) 최종준(崔宗俊), 참지정사(參知政事) 임경숙(任景肅), 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정안(鄭晏, *최우 사위), 지추밀원사(判樞密院使) 최항(崔沆), 우복야(右僕射) 최종재(崔宗梓), 간의대부(諫議大夫) 김군수(金君綏), 우복야(右僕射) 설신(薛愼), 비서감(秘書監) 김효인(金孝印), 국자제주(國子祭酒) 이장용(李藏用), 장군(將軍), 어사중승(御史中丞), 낭장(郎將) 등과 각문지후(閣門祗侯) 최종보(崔宗輔) 등의 이름이 보인다. 당시의 집권자 최이를 비롯하여 이규보, 정안, 몽여, 수기 등은 팔만대장경 제작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4) 원진국사 승형(圓眞國師 承逈, 1171~1221) 1221년 입적. 1224년 김방경의 아버지 김효인이 비문 서함

  상락 산양(현 문경)에서 태어나 운문사 연실선사(淵實禪師)에게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조계산에 가서 보조국사(지눌)에 법요를 묻고 문성암에서 능엄경을 열람하고 유점사 주지를 지내고 서울에 가서 강종·희종·고종의 우대를 받고 보경사 주지를 지냈으며 기도와 덕행으로 감응을 많이 남겼다. 희양산문(문경 가은 희양산) 계로 지눌의 선풍을 계승하였다.

  1224년 청하 내연사(현재의 포항 보경사)에 부도와 비를 세우는데, 비문은 이공로가 撰하고 당시 장사랑(將仕郞) 대관서승(大官署丞) 겸(兼) 보문각(寶文閣) 교감(校勘)으로 있던 김효인(金孝印, *김방경의 아버지)이 교칙(敎勅)에 의하여 書하였다.


5) 1227년 김방경의 출사와 개성 거주

  김방경은 1227년 16세 약관의 나이에 음보로(백부 김창이 정방에서 전선-인사 업무를관장하고 있었음) 양온서 동정으로 출사하여 개성에 거주하였다. 개성 앵계리는 김방경의 만년 본댁이 있던 곳으로 1200년대 초 이규보(1168-1241)가 거처하던 곳이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기록을 통해 주변 지형을 살펴 볼 수 있다. 우선 앵계초당(鶯溪草堂) 앞에는 용수산(龍首山) 곡령(鵠嶺)이 있고, 남쪽에 늙은 전나무가 많아 회동(檜洞)이라 일컬었으며, 창문으로는 보제사(普濟寺)가 보이는 곳이다.


<앵계(鶯溪)에 거처를 정한 뒤 우연히 초당(草堂)의 한적한 풍경과 --->

앵계에 와 거처하니/鶯溪來卜宅

곡령이 마루에서 마주 보이네/鵠嶺正當軒

늙은 전나무는 남쪽 골목에 울창하고/老檜森南巷

  * 이 마을에 늙은 전나무가 있기 때문에 이름을 회동(檜 洞)이라 하였다.

푸른 소나무는 조그만 담장에 덮였네/靑松覆小垣

정원의 네 그루 소나무가 담장에까지 뻗쳤다.

상마는 들에 가득하고/桑麻饒野壟

울타리는 산마을을 실감케 하네/籬落似山村

창문은 선궁의 탑을 마주 보고/窓對禪宮塔

  * 보제사(普濟寺)를 가리킨 것이다.

정각은 주점 문에 임해 있네/樓臨酒店門

복숭아나무 옆에 푸르른 대를 심고/傍桃栽翠竹

가시나무 베어내고 꽃다운 향풀을 보호한다오/剪棘護芳蓀

< 동국이상국전집 제5권 고율시 古律詩 44수 >


6) 1232년 강화천도, 김방경 한때 정족산 전등사 아래 거주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김방경은 전등사가 자리잡은 정족산 아래 옛 포구 자리(현 강화도 길상면 온수3리, 강남중학교 앞 마을)에 거주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진종사(=전등사)가 있는 풍수 좋은 언덕에 삼랑성을 축조했다. 김방경이 한 때 이곳에 살았다 하여 원수리(元帥里)라 하였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온수리(溫水里)로 된 것이며, 그가 살던 집의 현판을 해령당(海寧堂)이라고 한 것이 와전되어 해랑당이라 했다고 한다.

  정족산에 있는 전등사의 원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 후에 충렬왕의 첫째 왕비였던 정화궁주(貞和宮主)가 1282년경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해 ‘전등사’가 된 것이다. 정화궁주는 충렬왕의 첫째 아내였으나 몽골의 쿠빌라이 칸(원세조)의 딸이었던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충렬왕과 정략결혼하자 역사의 무대에서 밀려나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정화궁주는 후에(1276년) 무고사건에 김방경과 함께 연루되기도 하고, 1296년 그의 딸 둘이 김방경과 함께 중국의 몽산덕이와 교유하게 된다.


고려 고종때 도원수(都元帥) 김방경(金方慶)께서 한 때 이곳에 살았다 하여 원수리(元帥里)라 하였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온수리(溫水里)로 된 것이며, 그가 살던 집의 현판을 해령당(海寧堂)이라고 한 것이 와전되어 해랑당이라 했다 한다.

< 강화사(江華史), 1994 >


원래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게가 민물과 짠물이 교차되는 이곳에서 알을 낳고 짠물로 간다 하여 해란당(蟹卵堂)이라 부르던 것을 일본 식민지 시절에 어음 변화와 표기 잘못으로 해랑(海浪)이라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또 다시 와전되어 해란(海蘭)이 되었고 또 고목(*현 온수3리 마을 중앙의 가치집이 있는 느티나무)이 있는 근처에 당(堂) 집이 있었다(*현 온수3리 고목나무 옆에 거주하고 있는 강순례씨가 전에 살았던 집-현 강남중학교 뒤-이 당집이었다고 함)고 전한다.그러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해란당이라 부르고 있다." 고 한다.

< 길상지(吉祥誌), 1995 >


7)  수선사 3세(1234-1252) 청진국사 몽여( ? -1252년)

  1235년 월남사지 진각국사(혜심) 비문 건립,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간 계속된 팔만대장경 간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8) 1236년부터 16년에 걸쳐 팔만대장경 제작

  1236년 몽고항쟁 당시 불력(佛力)에 의하여 몽고군을 격퇴하고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하여 이후 16년 걸쳐 1252년에 완성되었다. 팔만대장경의 제작에는 당시의 집권자 진양공 최이를 비롯하여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건립을 주도한 몽여, 정안, 수기, 이규보 등 진각국사 혜심의 문인 문도 등이 주도하였고, 글자체는 단정한 구양순체로 한 사람이 쓴 글씨 같다고 함. 당시 구양순체의 명필이었던 김효인(*김방경의 아버지)도 팔만대장경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9) 1239년 최종준 수국사 아미타불상 조성

  수국사 木아미타불상 ‘현존最古’ : 서울 은평구 수국사에 봉안된 목(木)아미타불상이 13세기 중엽 경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돼 연대가 명확한 목조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1274년에 제작됐다는 서울 개운사 목조 아미타불상보다 35년 빠르다.

  2006년 발견된 이래 2년간의 연구 후 공개된 목아미타불좌상의 복장품은 다량의 경전, 개금발원문, 다라니, 목화솜 뭉치, 사리 장엄구 등 200여 종이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시주연대와 시주자를 알 수 있는 다라니다. 다라니에는 ‘일체여래전신사리보협진언 기해(己亥)십월일 시중 최종준’이 인쇄돼 있어, 기해년(1239년)에 시중 최종준이 공양했음을 시사한다.


10) 수선사 4세(1252-1271년) 진명국사 혼원(眞明國師 混元, 1191∼1271)

  황해도 수안에서 태어나 사굴산문으로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쌍봉산과 변선사와 조계산의 진각국사(혜심)를 예방하고 청진국사(몽여)의 제자가 되어 공안을 수행하였으며 최우의 요청으로 정혜사에 주석하고 1245년(고종 32) 최우가 강도에 선원사(禪源社)를 창건하자 주맹이 되었으며 스승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4세 사주가 되었고 자운사에 물러 나와 원종이 왕사에 책봉하고 와룡사에서 지내다 입적하였다.


11) 1270년 김방경 개경환도후 개경 거주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후 김방경은 개성에 거주하였다. 고류동(孤柳洞)으로 이사를 가기도 하였는데, 고류동 집은 후에 손자 김승용(承用)에게 물려준 듯하다.


집이 달로화적의 숙소와 가깝기 때문에 고류동(孤柳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국가에서는 때마침 여러 섬들의 인민들에게 육지 깊이 들어와서 살 것을 명령하였는데 김방경의 부자(父子)는 그에 복종하지 않고 인민들을 해변에 살게 하였으며---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1329년) ---원나라에 하례(賀禮)하고 돌아오다가 압록강을 건너면서 병에 걸려 신안(新安)의 여관에서 죽었다. 이달 경진(庚辰)일에 영구(靈柩)가 역마(驛馬)로 운송되어 서울에 들어와서 고류동(孤柳洞)에 있는 사저(私邸)에 빈청(殯廳)이 마련되었다. 다음 달인 四월 병신(丙申)일에 묵동(墨洞)의 북쪽 산 기슭에 장사 지냈다. 아아! 공의 휘(諱)는 승용(承用)으로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고호>가 본관이다.

< 김승용묘지명(金承用墓誌銘) > 


12) 수선사 5세(1271-1286년) 원오국사 천영(圓悟國師 天英, 1215~1286)

  진각국사(혜심)에게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청진국사(몽여)의 휘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진명국사(혼원)에게도 배우고 단속사와 선원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구산선문의 주맹이 되었고 수선사의 5세 법주를 지냈으며 대원사와 불대사를 중창하는 등 수행과 문도 양성 활동 끝에 입적하였다.


13) 1274년 김방경 일본원정시 김해 금강사 주둔

  1274년 金方慶 장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金剛社에서 留宿(유숙)했는데, 그때 개경의 松嶽神을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戰勝을 빌었으므로 이 구릉을 松嶽堂이라 부르게 되고, 김해 사람도 城隍神과 함께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고을 사람들이 여기에 김방경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졌다. 東征하는 함선의 출발지점인 합포(마산)로 가기 위하여 왕이 금주(김해)로 내려왔을 때 이곳에 行宰(행재)하고, 金剛社 앞의 한 茶나무를 보고 將軍茶(장군차)의 이름을 내렸다.


○ 松嶽壇(송악단) : 옛날의 松嶽堂(송악당)으로 金剛社의 서북 약 200步許에 있는 작은 구릉으로서 神祠(신사)를 松嶽堂이라고 했다. 고려의 충렬왕 즉위년(1274) 金方慶 장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金剛社에서 留宿(유숙)했는데, 그때 개경의 松嶽神을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戰勝을 빌었으므로 이 구릉을 松嶽堂이라 부르게 되고, 김해 사람도 城隍神과 함께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세종때 지리지를 보면 府北 3里에 있는 [盆山城隍護國之神](분산성황호국지신)에게 守令이 行祭한다고 나와 있다. 지금은 高麗葬터, 白雲臺라고도 부르고 있다.

○ 金剛川 : 盆山에서 흘러내리는 시내로 西上洞과 大成洞의 경계가 되며, 지금은 대부분 복개되었다.

○ 金剛社址 : 송악산 아래에 있었던 큰 사찰이며, 그 때문에 이 마을을 大寺里라고 불렀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까지는 金剛社라고 했으며, 충렬왕때(1274-1281) 東征하는 함선의 출발지점인 합포(마산)로 가기 위하여 왕이 금주(김해)로 내려왔을 때 이곳에 行宰(행재)하고, 社 앞의 한 茶나무를 보고 將軍茶(장군차)의 이름을 내렸다.

< 증보 김해지리지, 김해문화원, 1996 >


14) 1270년대 김방경 보제사 5백나한당 건축

  김방경은 만년 본댁이 있던 앵계리 인근에 있는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다.

수선사 5세(1271-1286) 원오국사 천영(圓悟國師 天英, 1215~1286)은 보제사(普濟寺)내에 별원(別院)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 김방경 이전 시대의 보제사 >

  최사위(崔士威, 961~1041)는 자 동환(動寰), 수주(水州 : 지금의 경기도 水原市) 사람으로 보제사 금당(普濟寺 金堂)과 나한전(羅漢殿), 서경(西京)의 사천왕사(四天王寺)와 장락궁(長樂宮)·태조진전(太祖眞殿) 등 15곳의 사찰과 관사를 창립하거나 고쳤다.

<1075 최사위 묘지명>

  연복사는 개성시 한천동에 있던 절로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 또는 보제사라고도 하였다. 정전(正殿)인 나한보전(羅漢寶殿)에 석가삼존상과 5백나한상을 봉안하였는데 극히 웅장하여 왕실보다 더하였다고 『고려도경』에 기술하고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7권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

< 김방경 이후 시대의 보제사 >

  1346년(충목왕 2년)에 고려출신으로 원나라 고관이었던 강금강(姜金剛)과 신예(辛裔) 등이 원나라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장인들을 이끌고 금강산에 종을 주조하러 왔을 때 고려측에서도 황실의 안녕을 축원한다는 명분으로 원나라 장인들을 시켜 연복사의 종을 새로 만들었다. * 연복사종은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개성 남대문에 걸려 있다.

  종의 주조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에 고려의 국왕과 모후(母后)를 비롯하여 정동행성과 고려의 주요 관원들이 망라되어 있고, 작업을 실제 담당한 원나라 장인들의 이름도 적혀 있다. 찬성사(贊成事) 김영돈(金永旽), 찬성사 안축(安軸),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김영후(金永煦),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인승단(印承旦),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 박충좌(朴冲佐),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 이제현(李齊賢), 밀직부사(密直副使) 김광재(金光載) 등의 이름이 보인다.

<연복사종 명문, 1346년 이곡 찬>

  개성 도성 안에 있던 천 여 간의 대찰 연복사에 오층탑이 있었는데 언젠가 허물어져 공민왕이 중건하려다 못하고 공양왕이 1391년에 중창을 시작하여 하부 6간의 오층탑을 만들다가 다시 중단되었다. 조선 태조 원년(1392년)에 완성하여 이듬해 단청을 입혀 준공하였다. 태조 3년(1394년)에 권근(權近)이 지었다.

<연복사탑중창비, 1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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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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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충렬공 김방경가의 거주지와 불교 관련 기록을 모아 보았습니다.
불상 속에 복장물로 전해 오고 있는 불교 관련 유물은
최근에도 속속 발굴되고 있습니다.
충렬공 가의 불교 관련 유물은 앞으로도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추가로 발굴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불기 2553년 부처님 오신날을 이틀 앞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