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묘소 사초 행사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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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식, 발용 작성일09-04-29 13:03 조회2,309회 댓글1건본문
충렬공 묘소 사초 행사 보고
일시 : 2009년 4월 18일(토)~19일(일)
충렬공 묘소 사초 : 2009년 4월 19일
참석 : 대종회장, 안동종친회장 등 60여 명
장소 :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능동 및 풍산읍 회곡동
<충렬공실기 사진자료 촬영>
대종회 홈페이지에 공고된 충렬공 사초 소식을 접하고, 4월 18일 08:00시 정각 은회, 발용, 영식, 윤식 등 4명은 선발대로 서울을 출발하였다. 충렬공 묘소 사초는 19일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충렬공 실기에 수록할 사진자료를 추가 촬영하기 위해 하루 먼저 출발한 것이다.
11:10분 서안동IC를 통과해 회곡동에 도착하니 11:30분이다. 냉평국대부인 죽주박씨 할머니 단소로 올라가 인사를 드리고, 할머니 단소를 비롯해 충렬공 유허비, 상락재, 장군샘 등을 촬영하였다. 예전에 유허비를 재 보기는 했으나,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다시 실측했다.
▲ 냉평국대부인 죽주박씨 할머니 단소(안동시 풍산읍 회곡동)
▲ 뒤쪽에서 본 죽주박씨 할머니 단소
▲ 죽주박씨 할머니 묘비문
▲ 충렬공 유허비각
▲ 충렬공 유허비각 안의 유허비. 대산 이상정 선생이 해서체로 썼다.
▲ 현지 종친들의 증언에 의하면, 유허비각 뒤쪽 암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 충렬공 유허비 옛 좌대. 본래 휴허비각 맞은편 작은 밭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었다.
회곡동 입구의 도로 개설공사로 옛 좌대가 유실될 위험에 처함에 따라 2005년 12월 3일 안사연에서 상락재 옆으로 이건하였다.
■ 충렬공 유허비 제원
높이 : 1,700mm
폭 : 상단 700mm, 중간 705mm, 하단 700mm
두께 : 270mm
상단 둥근부분 높이 : 140mm
유허비 거북좌대 : 가로 1,090mm×650mm
▲ 상락재
12:15분 회곡동을 나와 상락대 원경을 촬영한 다음 상락대 맞은편 강가로 내려갔다. 그 동안 상락대는 강가에서 찍은 사진이 없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좀처럼 강가에서 촬영할 기회가 드물다며 발용 종친이 빠른 걸음으로 앞장 서서 강가로 내려갔다.
멀리서 볼 때에는 쉽게 강가로 내려갈 듯 했건만, 막상 키를 넘는 갈대를 헤치며 강가로 내려가는 것이 쉽지많은 않았다. 앞장 선 발용 종친이 “어, 노루!”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녀석이 몸을 숨긴 뒤였다.
모래톱에 올라서니 발이 푹푹 빠진다. 상락대와 낙암정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발용 종친이 연신 셔터를 누른다. 멀리서 바라보던 상락대와는 완연하게 달랐다. 잔잔하게 굽이쳐 흐르는 물과 깎아지른 절벽, 우뚝 솟은 마암(馬巖)을 눈앞에서 대하니 장관이었다. 덕분에 멋진 상락대 사진을 얻었다.
▲ 낙동강변에서 바라본 상락대 주위 풍광. 상락대는 강가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다.
상락대 뒤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마암(馬巖)이다. 마암 저 멀리 낙암정이 산 중턱에 앉아 있다.
12:45분 강가에서 나와 12:55분 계평교 인근에서 점심을 먹고, 상락대로 향했다. 오랜만에 가는 길이라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한참을 헤매다 주민들에게 길을 물어 검암리에 도착했다. 다시 길을 묻기 위해 차를 세웠는데, 광득 종친이 주민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덕분에 상락대 가는 길이 쉬워졌다. 오늘 중으로 촬영할 곳이 많아 잠시 쉬었다 가라며 발길을 붙잡는 광득 종친을 뒤로 하고 서둘러 상락대로 향했다. 광득 종친이 일러준 대로 ‘어담’으로 직진하는 길에서 ‘풍산/단호’로 우회전해서 좁은 산길을 따라가니 곧 상락대다. 예전 생각이 절로 난다.
상락대 입구 고추밭과 솔밭은 벌겋게 깎여 나가고, 건너편에서 본 것처럼 그 자리에 커다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안동시에서 생태공원과 관련 시설물을 조성하는 공사라고 한다. 급히 상락대 표석을 찾았다.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아래쪽으로 내려오니 공사장 펜스를 친 곳에 상락대 표석만 덜렁 남았다. 현장이 어수선해서 상락낭자 묘로 전해지는 장소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 상락대 인근 고추밭과 솔밭에 들어선 생태공원과 관련 시설. 막바지 공사 중이다.
▲ 자갈더미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펜스를 친 그 뒤로 상락대 표석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옅은 동그라미 친 부분)
▲ 상락대 표석. 인근의 상락낭자 묘소로 전해지는 곳은 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은회 종친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 현장소장을 찾았다. 은회 종친이 상락대 표석과 상락낭자 묘소 의 보존을 위해 공사 도면을 볼 수 있느냐고 요구하자, 현장소장인 듯한 사람이 말을 받는다. 우리 신분을 밝힌 뒤에 상락대와 상락낭자 묘에 관해 묻자,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있었다. 이 공사는 2009년 9월 말 완공 예정이라고 한다. 건물 신축공사는 이미 완료되고 내부공사도 상당히 진척돼 있었다. 상락대 표석은 공사 대상지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설명만 들었을 뿐, 더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상락대가 깎여나가 가슴 한켠이 무너지는 기분을 어찌 할 수 없어 한참을 서성이다 영호루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에 낙암정 바로 위 도로에서 회곡동을 향해 상락대를 촬영하고, 길을 되짚어 나갔다. 검암리에 도착한 순간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이 신호를 보낸다. 이런! 광득 종친을 또 만났다. 뒤를 따라 검암리 바로 옆 개곡리(안동시 남후면)로 향했다.
▲ 낙암정 인근에서 바라본 상락대. 오른쪽 강 건너편 멀리 회곡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개곡리는 익원공파 휘 지동 할아버지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룬 곳으로 예전에는 50여 호가 인근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광득 종친을 통해 예전에 상락대 표석을 세운 내력과 상락대 입구 전답 소유자가 변경된 내막을 들었다. 상락대 인근 토지는 여러 차례 소유자가 바뀌었으나 그 동안 우리 종인들이 소유해 왔는데, 최근에 타성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광득 종친의 안내로 개곡리에 거주하는 태수, 용진, 용식 종친들과 인사를 나누고 개곡리 마을회관 뒤쪽의 안동김씨회관으로 들어섰다.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우리 종친은 28호라고 한다. 회관으로 들어서자 ‘안동김씨회관’이라 적힌 큼지막한 글씨가 일행을 반긴다. 실내에는 충렬공 영정과 시조 할아버지부터 현 세대까지 ‘안동김씨 사양공종회’의 상세한 계보도가 걸려 있다. 충렬공 영정에 큰절을 올리고 한참 동안 정담(情談)을 나눈 뒤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 사양공종회의 개곡리 안동김씨회관
▲ 회관에서 정담을 나누는 종친들.
▲ 오른쪽부터 영식, 태수, 광득, 광현, 은회, 윤식
15:45분 길을 재촉해 영호루로 향했다. 해가 짧은 시기라 마음이 급하다. 그 때문에 발용 종친만 더욱 분주해졌다. 16:05분 능골로 향했다. 해가 설핏해지기 전에 충렬공 묘소와 신도비각을 재촬영하기 위해 조금 속력을 높였다.
▲ 영호루 뒤쪽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본 영호루
16:41분 음수재에 도착해 충렬공 묘소로 올라가 인사를 드리고 묘소와 음수재 인근을 촬영하고, 17:15분 신도비각까지 사진을 찍고 나니 더 이상 촬영할 수 없었다. 음수재로 돌아와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밤늦게 안동시로 나와서 묵었다.
▲ 음수재. 재직사에 보관 중이던 '음수재' 현판을 새로 걸었다.
▲ 충렬공 묘소
▲ 뒤쪽에서 바라본 충렬공 묘소. 이 날 사초행사에 참관한 주민(광산김씨)에 의하면, 충렬공 묘소로 인해 앞쪽 큰 산이 '국사봉'으로 명명되었다는 말이 전해 온다고 한다.
묘소 바로 앞 외따로 떨어진 작은 산[獨山]을 중심으로 좌우에 독산이 두 개 더 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생긴 지형이 인근에 3군데가 있다고 하며, 모두 명당 터라고 한다.
<충렬공 묘지석 3차 발굴>
06:55분 능골로 들어오니 벌써 음수재 앞마당이 요란하다. 참석자들은 대략 30여 명이 넘어 보였다. 충렬공 묘소 사초 행사는 안동종친회에서 08:00시 정각 고유제를 시작으로 이곳 풍속에 따라 진행되었다.
■ 산신제
헌관 : 장수
독축 : 동수
집사 : 재은, 재영
■ 고유제
헌관 : 광회(대종회 부회장. 안동종친회장)
집례 : 재영(대종회 이사. 익원공파 부회장)
독축 : 봉수
집사 : 동수, 장수
▲ 산신제
▲ 충렬공 묘소 사초행사 고유제
▲ 사초 행사에 참석한 종인들.
고유제에 이어 남응 대종회장의 인사말씀, 태운 사무총장의 작업방법 안내 등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대종회장께서는 먼 길을 마다않고 참석한 종친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뒤 오늘 행사가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는 뜻을 밝혔다. 또한 안동종친회 용준 사무국장은 충렬공 탄신 800주년 준비작업을 설명한 뒤 전 종인의 참여 등을 부탁하였다. 사초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서울과 인천, 수원 등 수도권과 충북 오창, 안동, 의성, 대구 등지에서 종인들이 속속 도착해 참석 인원이 60여 명으로 늘어났다.
▲ 인사말씀 중이신 대종회장.
한편, 이 자리에는 한국국학진흥원의 권진호 책임연구위원(목판연구소장), 김형수 책임연구위원(유교문화박물관 국학자료실장), 김경희 씨 등 3명이 입회하여 사초 행사를 참관하였다.
충렬공 묘소로 올라가는 지형이 매우 가팔라 포크레인이 묘소 인근으로 올라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재직사 뒤쪽은 너무 경사가 심해 포크레인이 거의 충렬공 묘소 부근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서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 쪽 골짜기로 다시 올라와야만 했다. 그러느라 10:10분경에야 진입로를 확보해 10:15분부터 작업이 시작되었다.
태운 사무총장과 작업 인부들이 작업방법을 논의한 뒤 10:20분부터 탐침봉을 찔러 가며 조심스럽게 작업을 시작하였다. 대종회 창립 직후인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사이에 대종회 주관으로 충렬공 묘지석을 발굴하여 탁본을 하고 복사본을 제작한 다음 다시 묘소 인근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왔기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주관하셨던 분들이 타계하시고 한 분만 생존해 계시는데 고령과 노환으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아무도 그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상석을 중심으로 혼유석과 봉분 등 여러 곳을 탐침봉과 삽으로 파면서 찾아보았으나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모두들 긴장한 얼굴이었다.
▲ 탐침봉을 이용해 묘지석을 찾는 종친들
▲ 사초작업을 참관 중이신 어르신들. 왼쪽부터 남응 대종회장, 관묵 전 대종회 사무총장, 상천 제학공파종회 회장, 재호 종친(문), 광도 종친(문온공파 종손)
작업인부와 여러 명의 종인들이 한참 동안 여러 곳을 탐색한 뒤 드디어 봉분을 중심으로 묘지석을 찾기 시작했다. 11:49분 드디어 고대하던 충렬공 묘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묘지석은 봉분 전면을 향해 세워진 형태로 모셔져 있었다. 혼유석 바로 뒤쪽으로 지표면에서 봉분 안쪽으로 정확히 1m 깊이였다. 짧은 감탄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 충렬공 묘지석 출토 장면. 혼유석 뒤쪽으로 봉분 1m 깊이에 세워서 모셔져 있었다.
10:55분 묘지석 전면의 흙을 걷어내고 사진촬영을 실시하였다. 11:16분 묘지석을 조심스럽게 들어내 상석 앞으로 옮긴 다음 후속작업이 이어졌다.
▲ 충렬공 묘지석. 자획이 매우 선명하다.
▲ 봉분 앞으로 묘지석을 옮기는 종친들.
▲ 묘지석이 모셔져 있던 위치.
충렬공 묘지석은 이번이 3차 발굴이다. 제1차 발굴은 조선 중기에 처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제2차 발굴은 대종회 창립 직후인 1969년과 1971년 사이라고 한다. 이때, 앞에 언급한 것처럼 충렬공 묘지석을 보고 복사본을 제작해 현재까지 대종회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탁본 1매도 대종회 서고에 보관 중이다. 이로써 충렬공 묘지석은 제3차 발굴인 셈인데, 이 날 묘지석 외에는 자그마한 청자 파편 두어 점과 토기 편 1점 외에는 수습된 것이 없다.
충렬공 묘지석은 문영공(휘 순) 묘지석처럼 양쪽 상단 두 부분을 비스듬히 다듬은 귀접이 형태이다. 앞면에만 해서체로 정교하게 글자를 새기고 뒷면은 글자가 발견되지 않았다. 행(行)과 행 사이에는 머리카락처럼 가는 실선을 그었으며, 그 사이에 비교적 작은 글자를 정교하게 새겼다. 글자는 마치 방금 새겨 넣은 듯 자획의 삐침 등이 손을 벨 정도이다.
▲ 충렬공 묘지석. 오석에 해서체로 묘지문을 새겼다.
▲ 충렬공 묘지석(부분). 3째줄에 충렬공께서 개성 "백목동 앵계리에서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 묘지석 실측
■ 충렬공 묘지석 제원
재질 : 오석(烏石)
서체 : 해서
높이 : 805mm
폭 : 620mm(상단, 중간, 하단 동일)
두께 : 30mm
귀접이 부분(왼쪽) : 75mm(그림의 ②부분)
귀접이 부분(오른쪽) : 90mm(그림의 ③부분)
귀접이 부분의 높이 : 42mm(좌우 동일)
귀접이 제외 직선 부분 : 510mm(그림의 ①부분)
외선과 내선 사이의 폭 : 부동(不同, ④부분)
묘지석 뒷면에는 제2차 발굴 당시 주관하였던 종친들 이름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먹으로 글자를 적었는데, 판독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일부 글자는 매우 희미해 확인하지 못하였다. 연도가 ‘1979년’인 것으로 보아 묘지석을 다시 안장한 시기로 추정되는데, 발굴한 뒤 한동안 대종회에서 보관한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 묘지석 뒷면 먹글자
서기 1979년 6월 11일
후손 昌植 元榮 崙會
▲ 묘지석을 음수재로 옮기기 직전 묘지석을 살펴보고 있는 은회 종친.
이후 현장에서 묘지석 앞면을 촬영하고, 11:45분 음수재로 옮겨서 탁본 3매를 떴다. 한편, 대종회장과 사무총장, 그리고 한국국학진흥원의 관계자 3인 등은 묘지석 기탁과 보존 등에 관한 논의를 가졌다. 현재 충렬공 묘지석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가기탁 중인데, 대종회와 한국국학진흥원이 구체적인 세부 협의를 논의하는 중이다. 묘지석 출토 이후 참석 종인들은 음수재로 내려와 점심을 먹은 뒤 13:05분 평토제를 올리고 태운 대종회 사무총장, 재호 종친(문) 등 일부 종인과 작업 인부만 남고 삼삼오오 귀가하기 시작하였다.
▲ 묘지석 탁본 장면
▲ 충렬공 묘지석 탁본. 행과 행 사이에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새긴 실선이 너무나 생생해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 평토제
▲ 사초 후 충렬공 묘소.
이번 사초 행사 및 묘지석 출토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교훈을 주었으며, 향후 유사한 사례에는 더욱 철저한 준비가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이상 충렬공 묘소 사초 및 묘지석 출토에 대한 보고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발용, 글 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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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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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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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역사적 인물, 김방경란에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