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간위 자료-충렬공 묘소 수호사 대담 녹취록(3)-안동 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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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9-04-20 13:08 조회1,914회 댓글0건본문
김홍식 : 그래 이상한 게 그 사람들 대부분 다 알드라고.
김진창 : 그 집에 거 내려 가면은 혼인할 때 없으껜데 그런 소리를 했다 그래. 그 당시에는 보자, 하회도 없었지, 퇴계 나기 전이지, 없다고... 농암도 없고.
김광득 : 이 알로는 정몽주 밖에 없었거든. 그 다음 권근이가 있었고. 권자 근자가 있었고, 1500년도 전에는 우리 할아버지가 안동 오마, 혼사할 때가 없어. 광산김씨도 그때 입향을 안했어.
김진창 : 그러마 영가지는, 영가지는 나는 특별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을 해.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그게. 동국여지승람에는 첫 번째 나오는 거는 책이 없어졌고, 그 다음에 증보동국여지승람에 지금 존재하는 책이 그 책이라고. 거기도 보라고. 고 책에 안동에 인물들의 수가 말이야 젤 많은 게 안동권씨지. 거의 3분의 1 조금 넘잖아. 그 다음에 우리가 3분의 1. 그 다음에 나머지 다 합치면은 우리 정도라 그래. 그 당시에 사람이 없다고.
사회자(김재교) : 그르이 제수 준비는 양쪽 집에서 번갈아 가면서 했고, 제수 운반은 아까 말씀처럼 아마 지게로 뭐 산길이어서 달구지는 안 될 꺼고, 머슴 등에 지여가주고 뭐---.
김홍식 : 그 당시에는 달구지 없고, 뭐 그르이 뭐, 여간해선 산소 가도 못했어. 그 당시에 나무가 뭐.
사회자(김재교) : 혹시 큰집에 문집을... 얼마 전에 삼소재문집은 국역을 해가주고 발간을 해냈는데, 다른 문집은 혹시 뭐 없니껴. 그때 뭐 있다고 들었는데.
김진창 : 딴 문집은 없고 삼소재할배는 고조부가, 누엣머리 산소 젤 위에 산소 휘자가 뭐, 아, 덕자 윤자 유고가 있는데 발간 못됐어.
사회자(김재교) : 유고가 지금 있니껴?
김석교 : 지금 있어.
사회자(김재교) : 거기에 혹시 제수라던가, 뭐 삼소재문집에는 암만 찾아봐도 제수라던가 제문 같은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김진창 : 제문이 본래 없잖아 축문이 있으면 뭐.
김진창 : 축이라 그는 거는 제사 지내고 나면은 축문을 사르게 되어있다고.
김광득 : 분축
김진창 : 분축하는 장소가 있고 뭐 사르게 되어 있다고.
사회자(김재교) : 홀기라던가 사람이 일단 적으니까 그때는 홀기도 없고 그랬다고 보니더. 그죠?
김진창 : 지금 현재 홀기 그게 언제 껀데, 창홀 그게 오래 안 됐나?
김광득 : 오래 됐다. 창홀 오래 되가, 하마 해방 뒤에겠지
김홍식 : 아니라. 내가 신라 문무대왕 제사 지내는데 직접 가 봤는데, 그때 원형을 했거든.
사회자(김재교) : 아니, 그거 아니고. 이 제에 대한 홀기요.
김홍식 : 그케. 거도 그케 문무대왕에 제사를 지냈다고. 500년만에 처음으로 지내는데 원형을 그대로 복원해 가주고, 경주군에서 그 당시에 신라호텔이지 500만원 냈다고. 500만원 내줘 가주고 원형을 복구해 가주고 제사를 지내는데 참석을 했거든. 경주군 사람들 몇 천명이, 거 뭐 홀기 다 부르는데 우리말로 옮기고 500년 만에 첨했는데.
김진창 : 그 홀기를 우리가 옛날에 쓰던 홀기를.
김진창 : 홀기를 보니까 기록을 해 놨더라구요. 저가 병산서원 향사에 참사를 해보니까, 책으로 딱 되어 있는데 고거를 보관을 해놨더라구요.
김홍식 : 고걸 보고 고대로 읽고.
사회자(김재교) : 그런 식으로 마련되어 있는 홀기가 있는지, 지금 있잖니껴, 그 홀기가 언제껀지.
김광득 : 그게 그래. 지금 홀기는 그때하고 틀리는데, 내가 이야기는 25년 전에 대종회에서 가져온 홀기는 그기 내가 없어졌어.
사회자(김재교) : 아니 그르이 말하자면은 그게 1970년대 이전에 있었는 건지 없었는 건지, 그 이후에 있었는 거에 대해서는 말할 뭐---.
김광득 : 그 전에 꺼는, 내가 젤 오래 된 거는 문종이를 몇 겹, 이래 해 가주고, 유지같이 만들었더라고. 또깝하게 요래 착착착 접으면은 원형씨가 포겟또에 넣어가 댕겼그던.
사회자(김재교) : 그게 지금 있니껴.
김광득 : 그게 어데 대종회에 물어 보마 있겠지. 그게 어데 있어도.
사회자(김재교) : 그게 어디 있느냐 그게 문제죠.
김광득 : 전에는 그것 가지고 했는데.
김홍식 : 홀기 가주고 우리말로 번역한.
사회자(김재교) : 그러니까 충렬공할배 제 지낼 때 부르는 홀기, 그게 있느냐 없느냐 그게 내용이지. 지금 홀기 부르는 것이야 어디서든지 다 구할 수 있거든요.
김홍식 : 대종회 안 있겠나.
김광득 : 대종회에 한 번 문의해보래요. 내가 접었는게.
사회자(김재교) : 대종회에서 보관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거네요.
김광득 : 가능성이 아니고, 거서 가져 있어요. 사촌에 원형씨가 항상 가주 댕겼는데, 이 어른이 돌아가셨을지 모르겠는데. 그 뒤에는 관묵씨가 하고 바뀌면서 이 홀기를 안 가져오고 다시 써가 왔더라고. 그르이 똑같은 홀기인데 글씨가 약간 바뀌었지. 그 홀기는 예를 들어서 그냥 침주 , 그마 술을 붓는데, 그 다음에 뭐라 쓰였나 하면은, 헌작 수 헌관수 이래 하면은 이래 써여 가주고.
사회자(김재교) : 아니 말하자면은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그 홀기가 1970년대 이후에 만들었는 거라는 거는 지금 이야기 하는 아무 의미가 없거든요. 그전에 쓰던 홀기가 혹시 보관되어 있는지.
김광득 : 대종회에 보관되어 있다니까. 그건 있다니까.
사회자(김재교) : 가능성이 있다면, 그면은 그쪽에서 이걸 하는 사람이 서울 사니까 대종회 가서 확인해 볼 수 있으니까.
김광득 : 있을 거야. 거기 있을 거야. 없대도 거서 없앴고.
사회자(김재교) : 소산이나 사촌에서는 가지고 있는 게 없다, 그 말씀이시죠.
사회자(김재교) : 여기 그 다음에 시제와 관련된 일화, 그러는데, 1970년도 이전에 시제에 참석해 가주고 있었던 일 관계, 혹시 들으신 거나 직접 경험하신 거나 뭐 그런 게 있니껴.
-----------한동안 침묵--------------------------------
사회자(김재교) : 그이 뭐 70년도 이전에 맹 참여는 하셨을 꺼 아니껴.
김석교 : 어데.
사회자(김재교) : 시제.
김광득 : 했지 뭐, 석교씨도 하고 40년 전인데.
사회자(김재교) : 40년 전이면 할배(종손의 증조부 수오) 계실 때 아니껴.
-----------------한동안 침묵---------------------------
사회자(김재교) : 70년부터 지금까지 딱 40년 아이껴. 할배 돌아가신 지 40년 안 됐잖니껴.
김석교 : 아..
사회자(김재교) : 그전에 할배 계실 때는 주로 할배가 참석하셨을 꺼 아니껴.
김석교 : 그렇지.
사회자(김재교) : 할배 안 가셨으면 다른 어른이라도 누가 가셨을텐데.
김광득 : 70년도 같으마, 소산에 누구로, 창식이형님, 거는 갔겠지.
사회자(김재교) : 창식이(주손의 종조부)할배가 주로 많이 다니셨겠네요.
김광득 : 전에 보니까, 화수회 거도 보마, 거의 창식이 형님, 형님 글씨 아니마, 우리 아부지 글시고, 그랬지.
김홍식 : 얼마 오래 안 됐다 해도, 거참 분정기가 없다는 거는, 참 그게 있어야 되는데.
사회자(김재교) : 재실은 언제 지었니껴, 74년도 지었니껴.
김광득 : 아니야, 훨씬 그 전에 지었어.
사회자(김재교) : 그전에 있었니껴.
김광득 : 있었어. 음수재 지었는 그 연도로는.
사회자(김재교) : 위토 마련 관련이야기.
※ 채록자 주 : 1920년 경에 위토를 마련하였다고 하며, 위토를 마련하기 위하여 모였던 사진이 있음
김광득 : 자료는 내가 다 가지고 있어. 옛날 어른들 모이면 돈 낸 것 따로, 참석 시도 따로, 했는 문종이에 썼는. 그것은 내가 다 가지고 있어. 잊아 불까봐 내가 다 갖고 있다.
김동수 : 근데 다른 건 없고 그 뒤에 꺼(책이라는 게 그 전에 받아 갖고 했을 수도 있단 말이야)
김광득 : 아이래, 그 전에 껀 내가 누구한테 받았냐 하면은, 영주 있는 영수씨가 내가 마흔 두 살인가, 이래 될 적에(그게 고때 만들었는게 아니고 그전에 께...)그때 인제 대종회에서, 전부가 그때 60 넘으니까니, 젊으니까, 억지로 덮어 씌운거야. (김재교:그게 몇 년도 이껴). 그게 80년.. 78년도인가, 이래 돼. 그래가지고 뭐 때문에 시켰나면, 나 많은 이한테는 일 시켜 놓으니께네 걸어 댕겨야 되고, 전화도 그때는 안동만 해도 다 없을 때래. 우리도 다 없을 때래. 그래 하이께네, 내가 오토바이 가지고 있으니까 회곡집은 지어야 되고, 능애 저도 신도비가 관리해야 되께네, 젊으니께 니를 시켜야 퍼뜩 서울서 전화 오면 가보고, 오라 그면 가보고 오지. 억지로 덮어 씌고 2년만 해라 이래 된거야. 그래 2년을 딱 하고 나이, 요새는 보수가 있는데 그때는 보수가 없었어. 2년 딱하고 나이, 안 되. 한 해 더해, 더해. 딱 5년을 하고 나이 그 다음부터 안돼. 인제는 차비를 줄게. 줘도 니가 더 해야 된다. 그래 하다 보이 11년을 했는 거라.
사회자(김재교) : 주제하고 가까운 이야기를 해 가지고 빨리빨리 해가지고 이래 해야 될 거 같니더. 그럼 벌초는, 그러면은 위토를 마련하고 난 뒤부터는 위토를 붙이는 사람이 벌초를 하고, 그르이 1920년 위토를 마련한 이후에는 제수 마련도 거기서 다하고 벌초도 거기서 다하고, 그래 했겠네요. 그 이후로는 제관도 좀 많이 늘어나 가지고.
김동수 : 택호야.
사회자(김재교) : 그래 아시는 거 보이, 택호야 나는 알아. 그걸 왜 여 쭈냐며는 거기 가 보셨겠네.
김성식 : 택호씨가 거기(재실에) 있을 때 내가 유사를 했다고. 작품을 내가 했다고, 한 10년 밖에 안 돼. 곡수를 정해.
사회자(김재교) : 그럼 한 10년 정도 됐으면 돌아가실 때는 연세가 얼매랬니껴?
김광득 : 아이래, 여기 있다 돌아가신 게 아이고, 지금 거저 대구 밑에 현풍.
사회자(김재교) : 그러면 1970년도 이전에도 그 분이 거기 저, 이걸 했다는 말이껴, (그전부터 있었지) 그럼 70년경에는 연세가 얼매나 되니껴
김광득 : 지금 한 80 한 둘 서이 정도 될 거야.
김동수 : 그럼 한 5,60대네
김광득 : 그건 젊을 때고,
사회자(김재교) : 그럼 한 70년 이전에도 한 30년은 계속 그래 했겠네요?
김광득 : 그 집 부인이 우리 할아버지의 후세래. 그래 가지고 그래....
사회자(김재교) : 그러니까 그 1970년 이전에도 한 2,30년은 거기에 맹 벌 초도 하고 제수도 마련하고 했겠네요.
김동수 : 6.25가 1950년도 이께네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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