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충간위 자료-충렬공 묘소 수호사 대담 녹취록(2)-안동 소산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9-04-20 11:30 조회1,906회 댓글0건

본문

 

김광득 : 그래 가주고, 묘를 지석을 나와 가주고 썼는데, 우리 집안에서는 안동 이 근처에 사지도 안했지만은 사실 우리가 생각으로는 그때까지 수호를 안 하고 있었겠지. 그래서 인제 소산인가 도평의공파 의성인가 따님이 맏딸로 컸데. 종가집에서. 그래서 어른들이 만날 걱정하기를 우리 우에 조상이 예안현 능골이라 카는데, 안동에 능골이 몇 군데 있어요. ‘능골에 어디 조상이 있는데 잃어서 찾아야 된다’ 하는 그 이야기만 듣고 있다가 시집을 딱 오는데, 예안에 외내, 지금에 녹전이 아니고 수몰 지구에 드갔는 외내, 그 편에 하필 맏집에 또 시집을 가게 됐거든. 가서 있는데, 산소를 요새 같으면 향사를 지내는데, 묘는 한 위뿐인데 떡을 두개를 똑같이 괴니까 젊은 애가 “왜 묘는 하나뿐인데 산신 따로 괴고, 두 개를 같이 괴노” 하니까, 아니 어른이 “저 밖에 있는 손부네 저 집 조상인데, 우리가 지금까지 수호하고 있다. 그래 괴 놔라” 이러니까 손부가 그 이야기를 딱 들으니까 자기 아부지한테 들었던 그 기억이 나가주고 그 이튿날 시어머니 한테 친정을 가야겠다고, 그래 친정 가서 자기 아부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사돈간에 와서 그냥 하는 게 아니고 묘를 파내라 카고 사돈간에 이런 언사가 났던 모양이라.

       그래 그게 재판까지는 안하고 서로 이러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꿈에 현몽을 했대. 거 왔는 이한테 “그냥 둬라 내가 외손이든 뭐든 내가 뒤에, 나쁘게 말하면 종이고, 내 뒤에 신하같이 데리고 있으니까 그냥 둬도 너한테 해 없다” 그래서 인제 요새도 그런 그게 있는데, 보통 보마 문관묘는 보마 앞에 세우잖아 우리 익원공 할아버지 같으면 사위묘가 앞에 있잖아요. 그거 괜찮데 왜 그러냐 하면 문관이라서 항상 앞세우고 댕기고, 우리 할아버지는 드가면 문관이고 나오면 무관이랬잖아. 그래서 무관이래서 무관은 항상 장수는 졸병을 뒤세우고 댕기게 되어 있어. 모든 싸움에 그래서 뒤에 두고 있는 입장이라. 그냥 둬라, 이래서 그냥 두고 있고, 현재까지도 광산김씨에서 우리할아버지를 먼저 제례를 올리고 그 다음 올라가서 자기네 산소를 찾아보고 지금도 현재도 그렇게 하고 있거든---.


김동수 : 그렇다면은 참판공 돌아가신 한 150년 세월이 그 양반들이 봉사를 했다는


사회자(김재교) : 예 말하자면 광득이 할배 말씀에 의하면, 1650년경 까지는 소산과 사촌에서 못 모셨다는 그 말씀이세요? 고 무렵에 인제 그 종부로 우리 그 조상 왕고모할머니가 시집을 가셔가지고 그때 찾았다 그 말씀이거든요.


김광득 : 그렇지. 그때 근데 뒤에 썼는 묘가 그 집 책을 내가 봤는데 돌아가신 연도가 확실해. 1535년이야. 1535년에 돌아가셔서 그 앞에 비석을 누가 썼노 하면은 퇴계선생이 썼잖아. 퇴계가 서른 다섯 살 때 쓴 글씨야. 그때 서른 다섯살 때 퇴계가 공부할 때에 칠군자 중에 류성룡대감도 거게 배웠고, 학봉선생도 거게 갈 땍에 나이차가 두 세 살, 다섯 살 차이 이 정도밖에 안났어. (김재교: 누가요) 부필 부로, 그 집 자손들, 그래서 자기 제자가 상주가 되니까 써 준거야. 책 보마 1535년에 썼어.


김진창 : 그 묘 뒤편에 조금 경사가 졌는데 효로.


김광득 : 그게 확실한 근거가 없어 가주고 그래. 150년을 하면은 1700년까지는 그때 까지는 우리가 수호를 안 하고 있었다 그는.


사회자(김재교) : 할배나 아재는 다른---. 저도 듣기도 아까 성식이 할배 말씀하신 그런 내용으로 들었고 형님은 뭐 어떻게---.


김석교 : 나도 그래 들었어.


사회자(김재교) : 그러니까 광득이 할배 하시는 말씀은 그쪽에서 들으신 말씀이고, 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우리 조상들이 쫌 그래 가주고.


김성식 : 근데 연도수가 맞아 나가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충렬공할아버지를 실전을 하게 된 년도가 지금 확실히 안나오죠? 나옵니까?


사회자(김재교) : 실전한 년도는 알 수 없죠. 왜 그러나면은 년도를 알면은 실전을 안하거든요. 작년에 모시고 올해 모시면은 그래 잃지는 안하고 계속 관심이 멀어져서 안 모시다가 보니까 내중에 서로 모실려고 보니까 몰라서 못모시는---.


김광득 : 나는 생각에 이래 추측을 해보거든요. 우리 할아버지가 여기서 나도 그 자손이 어느 사화에 말리면은---. 언제 말렸노 하면은 우리 그 문정공 할아버지 같으면은 1450년대에 정승을 했다 말입니다. 개성서 하는데 그래하는데 여기 묘가 실전될 택은 없다고 보고, 종을 보내도 1450년대 그러면 그 다음은 내가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우리 판관공 할아버지 실전 하는 거 하고 대략 보니까 맞는게, 우리 판관공 할아버지 같으마 서른 한 여섯 될 때에 연산군이 즉위를 해요. 연산군이 1492년에 등위를 해가주고 1506년까지 잡는단 말이시더. 십 한 이년동안 우리할아버지가 정창손에 맏사위거든요. 그마 정창손이가 어디에 결렬이 되노 하면은, 연산군에 생모 윤비 폐비에 주도자가 누구로 하면은 정창손이라. 그마 정창손이가 그래 될 때에 정창손이 맏사위 김질(문정공)할배는 정창손이 끈 때문에 붙잡혀 나와 가주고 좌의정까지 됐다 그는 결론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가 서른 여섯 살에 성주판관을 가 있는데 아들  딸은 어떻게 모르고, 족보상에 아들 너이 놨으면은 우리 할아버지 났는 년도는 틀림없이 나와 있어요. 나와 있는데, 돌아가신 년도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다, 묘가 없잖아요. 그러면은 나쁘게 말해서 역적으로 몰렸다 하면은 그때 역적으로 몰리면 묘가 없어, 시신을 절대 못 찾게 해. 그냥 목쳐 뿌리든지 사약 내라뿌마 거서 그만이지, 이걸 시신을 절대 못찾게 하거든. 후에 무슨 일어나는 일 때문에 그래 생각하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서른 여섯살 때 같으면은 천 오백, 한 육년 정도에 성주판관을 그만 뒀을 때에 4형제가 그때 회곡으로, 소산으로, 공주로, 해어졌다고 보는 거야.

       천오백 한 오년 십년에, 년도는 그래서 먼저 우리가 저 부사공할아버지 년도가 안 나와 있잖아요. 그거 안 나와 있는거 내가 어떻게 뽑았노 하면은, 부사공할아버지의 맏형 의자 동자, 거는 출생년도가 있더라고요. 그 다음 고 밑에 동생 났는 년도 있고, 또 고 밑에 성자 동자도, 성자 동자는 누구로 하면은 김자점할아버지의 고조부잖아요. 그죠, 세자 용자의 5대조 그던. 그 어른 년도가 나와 있는데, 내가 생각에는 5년은 절대 안 틀려. 왜 그로 하면은 맏이가 85년에 났고, 동생이 88년도에 나고, 여동생이 이천년에 났으이, 그 중간에다가 끼아 넣은 날짜래요. 이걸 먼저 번에 가이께네, 대종회가 이 족보책이 없는데, ‘인종씨 하고 내보고 연도를 누가 해 넣었노?’, 해서, ‘내가 해였다’ 그랬어요. 왜냐하면 데려온 자식 같으면은 연도가 안 맞는데 5형제가 틀림없이 우리 문정공할아버지의 아들이 틀림 없다면은, 맏이 나고 둘째 나고 우리할아버지는 연도가 없고 성자 동자 그때 이자 동자는 낳는 연도가 다 있는데 요사이가 7년이 비었어. 비었는 중간에다 우리 할아버지 연도를 내가 였어.

       틀림없다고는 못 그지만은 10년은 안 틀린거야. 데려 왔으면 틀리는데. 그래 그 이야기하니까 대종회 저 아무소리 못하더라고. 맞잖아요. 그거 찾니라고 내가 몇 집 책을 봤어요. 우리 충렬공 할아버지도 이거 참 나쁘게 말해서 어느 누구하나 우리 고조부나 5대조 쯤 된 이가 이거는 확실하다, 웃대에서 내가 보니까 언제 어디 했다, 이래 되뿌마 그게 역사가 되뿌는데, 그죠. 그런데 그게 지금 고증이 안되니까, 이거 자꾸 토의를 하잖아.


김진창 : 열전 고려사를 보든지 고려사절요를 보면은 거기에 충렬공 할아버지는 경순왕 16세손이라고 나와 있어요. 그 담에 우리 족보 젤 먼저 나온 경진보에 보면은, 11대손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 치면은 16대가 맞다고. 그런데 그거는 과하다, 그래 가주고 경진보에서는 그 말 언급이 없는데, 고 다음 나온 게 기미본가, 거기 보면 그게 안 맞는다고, 나온다고. 그래서 요렇게 맞추면 연대가 맞다고 나온다고. (관중: 30년을 대략 맞춰놨다고) 그것도 또 문제가 생기는게 뭔고 하니까, 경순왕이 나라를 개성에 가서 바쳐 버리고 거기에서 부마가 돼서 아들낳은 어른이 은자 열자로 나오는데, 그때는 이미 이태만에 나왔는지, 삼년만에 나왔는지 몰라도 애는 놨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30년이라는 계산이 그래 되고---.


사회자(김재교) : 다음은 묘소 시제시 제수 비용은 얼마나 들었는가. 지금 이야기 말고 하여튼 1970년 이전에 내용은 있는지.


김광득 : 그전에는 내가 듣기로는 소산서 하든지 의성서 하든지, 소산서 하면은 거 가서 재물을 장만하는 게 아니고, 소산서 해 가주고 짊어지고 삼일동안 걸렸다고 하더라고. 하루 가고, 지내고, 하루 나오고, 그거 내 우리 아부지한테 들은 이야기래요.


김성식 : 짊어지고 그러니까 위토 장만하고. 저 재실 장만하기 전에는 한 해는 소산서 장만하고, 한 해는 사촌서 장만하고. 그 당시에는 방법이 그러니까 사촌서도 삼일 걸리고, 소산서도 삼일 걸리고.


사회자(김재교) : 1920년 이전이시더 그죠? 1920년도에 위토를 장만했으니까 말하자면은 그 산소를 찾을 때부터 1920년간까지는 대체로 소산서 한 해 지고 가고, 사촌서 한 해 지고 가고, (관중: 그렇지) 그때 그러면은 제수 장만은 소산서 하고, 또 한 해는 사촌서 하더라도 제의에 참여하기는 다 같이 했죠.


김성식 : 제사를 참석하는 사람도 사촌하고 소산사람 뿐이래.


사회자(김재교) : 그렇죠, 말하자면은 저가 말씀 드리고 싶은 거는 소산서 제수 장만할 때는 안동사람만 가고 그렇게까지는 안했다, 그 말씀이죠. 제관은 다 같이 참여를 하고 제수 장만은 한 해는 소산서 하고, 한 해는 사촌서 했다 그 말씀이죠.


사회자(김재교) : 혹시 제수가 어느 정도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 거기에 대한---.


김광득 : 그때는 돈이 있어도 지고 갔으니까 떡을 한 말을 안했겠지. 어에 하든 간에 적게 했겠지.


사회자(김재교) : 그런데 전부 모이시면은 가는데 하루, 하루 지내고 오는데 하루, 이랬다고 하면은 거기서 숙식을 해야 되잖니껴. 장소 주무시는 장소야 그렇더라도 일단은 드실꺼는 아무래도 맹 장만을 해 가꼬 가야 되기 때문에 상당히 안 많이 했을리껴. 제관이 어느 정도 참여했는지.


김홍식 : 내가 기억을, 처음에 참석했는데 6.25전에 해방되고 내가 참석했거든. 그랬는데 내가 고때 기억이 나. 집안에 어른들하고 따라 갔어. 제수를 어에 했는지, 그거는 전혀 모르겠고, 그때는 여관이라는 것도 없으니까, 갔다가 당일 못가면 낭패 잖는가. 그래 가 중간에 어디 누 집에 가서 잤는데 그런 기억이나. 친척 뭐 그런 기억이 나는데 제수는 내가 1946년 해방되고, 고 이듬해 쯤 되가 참석 한 번 했는 거 같은데, 좌우간 그래 갔다 왔어. 그런 기억은 없어 소산서도 한 해 한 분이나 두 분밖에 못가. 그때 그 당시에 왜냐하면, 교통도 나쁘고, 모두 바쁘고, 소산 대소가에서도 한 두 분 가마 많이 가고, 사촌도 그 정도. 그래서 인원수 굉장히 적다고 봐야 돼. 밥 사먹을 때 있나 잘 때가 있나.


김광득 : 요새 사람들 잘 이해를 못하는데, 안동 같아도 가마 주막이라고 있어. 요새 같으마 모텔 여관도 하고 밥도 주고 술도 파는 데가 한 50리 간격에 다 있어. 안동도 여 안기동에 역이 있지. 예안도 가면은 선성카는데 그 모티에 가면, 한 군데 주막이 있어. 중간 중간에 하룻 걸음에 갈 만큼 70리 내지 80리 가면은 한 군데 있고, 그 다음 뱃나들에 가면은 자에도 주고, 먹에도 주고 돈 안주고 비단 줘도 되고---.


사회자(김재교) : 당시에 여행할 때는 저기 그 삼소재문집에 보면은, 삼소재할배가 서울 상소문 드리러 갔다가 오시면서 쓰셨는 일기가 있거든요. 그 일기에 보면은, 주막에 가서 묵으시는 것 보다는 근처에 연비 그런데 가서 많이 묵으셨더라구요. (관중; 그렇지 연비집에 가서 자지). 아부지 어렸을 때 소산에 마당에 대추나무 있잖니껴. 대추나무 밑에 당나귀가 없던 적이 없다 그러더라구요. 


김홍식 : 그 얘기 들었다고. 내가 어렸을 때 봤는 기억은 아닌데, 들은 기억이라. 우리는 남인집 아니라. 그래 우리 집하고 저쪽 집(후안동김) 종가가 저쪽 건너인데, 그런데 서울서 오는 손님이나 외부손님이 우리집에는 많이 오고 저 집에는 별로 많이 안 갔다,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고 그래. 우리는 살림은 별로 없었는데도 말하고 당나귀는 늘 자주 왔다고.


사회자(김재교) : 손님이 오시면은 구담할배가 도포 채려 입고 같이 내려 오셔 가주고 할배하고 같이 손님 맞고 그런 이야기는 들었거든요.


김광득 : 당나귀가 요새 같으면 자가용이---.


사회자(김재교) : 그러니까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는 거네요. 그래 보면 되겠네요, 제관이 참여해봐야


김성식 : 비용이 중요한 게 아니고 제사를 안 잊어 뿌는데 목적을 두는 거지.


사회자(김재교) : 제관이 많아야 20명 정도...


사회자(김재교) : 그럼 제수비용은 주로 맹 번갈아가면서 했으니까 또 그래도 어느 정도 안 그랬으겠니껴. 맹 또 다 우리나라 사람이 저 집에서 이마이  하마, 우리도 체면이 이 정도는 해야 안 되나. 이런 게 맹 있어 가주고 참 뭐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할라고 맹---.


김석교 : 제물을 장만할 때 그 당시에 공식이 있어. 향사는 어떻게 한다는.


사회자(김재교) : 예, 공식이 어떤 게 있는지.


김석교 : 뭐 뭐, 내용이 뭐 맹, 편은 뭐 몇 대를 한다던가, 양 문중에 실과는 몇 가지 한다던가---.


사회자(김재교) : 혹시 그런 내용이 어디 있는 게 있니껴?


김석교 : 없지 뭐. 상식적으로.....


김홍식 : 그 내용이 요새, 뭐 큰 차이는 없으깨라. 맹 과일은 종류는 그 정도 하고.


사회자(김재교) : 주과포


김홍식 : 그렇지, 주과포 하고 편이지 뭐요.


사회자(김재교) : 그렇겠네요. 그러고 맹 거기 가신 분들이 음복하실 정도는.


김홍식 : 그렇지 그 정도는---. 크게 다르지 않을 꺼라. 지금 하는 거 하고.


김진창 : 음복은 거기서 하는 게 아니고, 소산서 채린다고 가정을 하면, 소산 돌아 와가지고 음복을.

김광득 : 해방 뒤에만 해도, 소산에 나이 많은 어른들 전부 다 가짓수만 해서 봉지로 유사가 봉지로 싸 가주고, 그래 주면은, 요새 같으면은 복주라 해 가주고, 우리 어릴 때도 아버지 갔다 오시면은.. 밤하고 인제 가주 와서는 어떤 이야기가 있었냐 하면은, 그 집에도 이제 종부가 왔니가 딸만 놓는 집 있잖아, 할아버지가 가 왔는 밤 먹으마, 그 이듬해 아들 놓는다고, 그 집에 주고 이래 하더라고.


사회자(김재교) : 음복 풍습은 지금도 우리 그 정월대보름에 안동 부신목에다가 제  지내면 동사무소까진 안 주더라구요. 시청에 있을 때는 그 떡을 전부 서에 다 돌렸거든요. 맹 거 갔다가 와서 음복 정도 될 정도는 했을 꺼다. 예.


사회자(김재교) : 그래도 그것 마련하는 거는


김진창 : 음복이 양이 그 만큼 많이 줄만큼은 안 되고


김진창 : 그기 아주 영광스러운거라.


사회자(김재교) : 예전에 음복 돌리는 거, 저도 보니까, 인제 한지에다가 전부 떡도 조금하고 떡도 종류별로 과일도 짤라 가주고 종류별로 해 가주고는 한지로 싸고, 새끼줄로 쫙 묶어 가주고 그렇게 돌리더라구요. 예전에 조기도 굉장히 귀해 가주고, 전에 저도 할배 노끈 꼬시는거 봤거든요. 요래 요래 말아 가주고는 끈을 꼬아서 그걸로 책을 묶고.


김광득 : 그게 없어진 지가 지금 한 30년 정도밖에 안 됐다.


김홍식 : 요 이야기하고 또 다른데, 내가 초임을 어디갔노 하면은, 저게 예안면 동계학교라고. 1947년에 근무했거든 2년 있었는데, 나는 지금도 우리 집안이야기 잘 모르잖아. 왜 그로 하면은, 나는 우리 집에 아버지가 글공부 안하셨고, 또 중간이고 맏이도 아이고, 뭐 우리 중부님도 똑똑하시고. 우리 아부지는 뭐 농사만 지이 나도 그 영향을 받고 공부(문중공부)는 할 새도 없었는데, 그런데 거게 부임을 해 가주고 1년을 있는 동안에, 그 어데 있냐 하면은, 영양군하고 바로 접경이라. 우리 안동군에 젤 오지라. 그런데 거게 한 서 너집, 요게 한 서 너집, 요래 사는데, 거게 예안이씨들이 많이 있고, 또 농암선생 영천이씨 그 집이 몇 집 있고, 또 여러 성이 권씨도 있는데, 내가 ‘소산서 왔다’ 그러니 다 소산이 어떤 집인가요, 노인들이 다 알드라고. 내가 열 아홉 살 때인데, 50-60노인들이 와 가주고 인사하는데 전부 다 알아, 우리 집이 대여섯 집 밖에 안 되는데 다 알더라고. 나는 뭐 내가 그리 잘난 집도 아니께고. 어떻게 아노 싶은데 다 알아. 그래 자기들이 과거에 연비가 다 있어 가주고 그렇겠기도 하고, 퇴계집이나 영천집이나 우리하고 뭐 과거에 인연이 좀 많고 하니까 하이튼 내가 인사하니까 다 알더라고. 그래 내가 놀랬지. 다 알드라고.


사회자(김재교) : 저가, 저 사실 아부지한테 들은 말씀으로 그런 말씀 하시더라고요. 첨에, 낙남하실 때 다른 분하고 의논을 했대요. 낙남을 한다니까, 안동을 간다 하니까, ‘안동 가면은 교혼할, 혼사할 집도 없는데 거게 왜 갈라 그러노’ 그래. 이야기를 했다고 아부지는 그카시더라구요. 말하자면은, 음 그때 우리가 낙남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중앙에 귀족이고, 안동에 있는 사람들은 귀족이 아니었다는, 그런 걸로 그래 들리더라구요. 그래 내려 와 가주고는 인물을 못 내가주고---.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