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한적한 교외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아름다운 산수를 그린 그림을 걸어놓는다. 하지만 정작 도시에서 몸을 빼내어 대자연으로 돌아가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옛사람도 아름다운 산수화를 벽에 걸어두고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 300여 년 전 조귀명(趙龜命)이 쓴 글을 보자.
진짜 산수는 그림과 비슷하기를 바라고, 산수 그림은 진짜와 비슷하기를 바란다. 진짜와 비슷하다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귀히 여긴 것이요, 그림과 비슷하다는 것은 기교를 숭상한 것이다. 하늘의 자연스러움이야 원래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법이지만, 사람의 기교 또한 하늘보다 나은 점이 있지 않겠는가?
산촌의 으슥하고 빼어난 곳을 지날 때면 말을 멈추고 머뭇거리면서 그곳 사람들이 그림 속의 사람과 같다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 물어보면 그들은 즐겁다고 여긴 적이 없다. 그러니 그림 속의 사람에게 즐거운지 묻는다 해도, 역시 내가 아는 것처럼 그들이 반드시 즐겁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공경대부 집안의 벽에는 대부분 산간의 촌락이나 들판의 별장에 은둔하면서 고기잡고 나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걸어놓고 있다. 눈으로 보면 즐겁지만 직접 살아보면 근심스러운 법이니,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하늘과 땅은 크나큰 밑바탕이요, 조물주는 크나큰 화가이다. 꽃과 잎으로 세상을 울긋불긋하게 칠하고 눈과 서리로 세상을 수묵화처럼 만드니, 고금의 세계는 그저 한 폭의 살아있는 그림 병풍일 뿐이다. 거대한 눈동자를 지닌 사람이 곁에서 본다면, 높다란 수레와 네 마리 말을 타는 고귀한 사람과 짧은 도롱이를 걸치고 가느다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비천한 사람 중에 누가 등급이 높고 누가 낮겠는가?
나는 평생 기구하게 살았으나 유독 산수에만 연분이 있어, 지리산을 오르고 가야산을 구경하며, 삼동(三洞)을 찾아가고 사군(四郡)을 유람하였다. 하지만 이는 모두 스스로 기약하여 뜻을 이룬 것이 아니었다. 올 가을 화양동(華陽洞)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는데, 하늘이 내게 이 그림으로 누워서 실컷 유람하게 해 주었다. 여덟 폭의 환상적인 경관은 진짜 땅과 비교해도 모자랄 것이 없다. 어찌 낫고 못함을 따지느냐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어찌 진짜와 가짜를 가릴 필요가 있겠느냐고 답할 것이다.
조귀명(1693~1737)은 18세기의 우뚝한 산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자는 석여(錫汝), 혹은 보여(寶汝)이며 호는 여럿인데, 그 중 동계(東谿)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풍양조씨(壤趙氏) 명문가의 후손으로 상대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개성적인 산문을 여럿 남겼다. 조귀명의 이 글은 원래 6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그 중 넷만 보인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그림과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짜인 그림이 진짜인 산수 자연보다 아름답다는 뜻일까? 대상을 핍진하게 그려내는 것이 좋은 그림이라고 한다면 산수가 그림보다 더 아름다워야 한다. 상대주의적 시각으로 진짜와 가짜에 대해 이렇게 질문을 던졌을 뿐, 답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림을 사유의 단서로 삼은 것이다.
아름다운 산수를 배경으로 삼은 은자의 그림을 보면서 조귀명은 사유의 전환을 시도한다. 그림 속의 은자는 과연 그림 속과 같은 삶이 즐겁다고 생각할까? 사람들은 한적한 시골 농부의 삶을 부러워하면서도 농부의 삶을 직접 겪으려 하지는 않는다. 조귀명은 이러한 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조귀명이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한 까닭은 위선적인 은자를 넌지시 꼬집기 위함이었다. 이름난 화가의 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은자연해서는 아니 된다. 대자연이야말로 정말 살아 있는 그림이니 그 그림 속에 들어가 진정한 은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조귀명 자신도 말로만 은자로 살고 싶다고 할 뿐, 대자연으로 달려가지 못한다. 그저 그림을 그려놓고 정신의 유람을 즐기겠노라 하였다.
조귀명은 문학과 예술에 대해 주목할 만한 비평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그림에 붙인 짧은 소품체의 글 중에 묘미가 있는 것이 적지 않다. 또다른 그림에 붙인 글 <그림에 쓰다(題畵)>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은 그림 속의 물이 흐르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으며 나뭇잎이 시들지 않는다고 탓한다. 나는 그림을 위하여 이렇게 따진다. 물이 있는데 흐르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바람이 있는데 불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나뭇잎이 있는데 시들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이는 조물주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림에서는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림이 사물의 움직임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탓한다. 그러나 조귀명은 사물의 한 순간을 담아내는 그림이야말로 조물주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평범한 사고를 거부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조귀명의 글을 읽도록 권한다.
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 저서(역서) -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 浮休子談論, 홍익출판사, 2002. - 조선의 문화공간(1-4), 휴머니스트, 2006. - 우리 한시를 읽는다, 돌베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