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간위 자료-초중고 교과서에 나타난 충렬공 小考(3)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9-03-21 11:27 조회2,018회 댓글0건본문
1)고등학교 제7차 국사과 교육 과정
고등학교 제7차 국사과 교육 과정 중 중요한 몇 가지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가)목표
(1)우리 역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고 민족 정체성의 근원이기 때문에 이를 주체적으로 이해한다.
(2)우리 역사는 현재의 뿌리이며 미래를 전망하는 단서이기 때문에 이를 발전적으로 파악한다.
(3)역사 자료를 분석, 비판, 종합하는 능력을 길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운다.
(4)우리 역사를 삶의 과정으로 이해하여 새 문화 창조와 사회 발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태도를 기른다.
나)주제별 학습내용(중세의 정치적 변천)
(1)12세기에 이르러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귀족 사회가 동요되었음을 학습한다.
(2)고려 초기에는 능동적인 외교 정책을 펼쳐 거란, 여진 등 북방 민족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영토의 확장을 꾀하였으나, 무신 정변을 계기로 고려 사회의 성격이 크게 변질되어 갔음을 학습한다.
2)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삼별초난과 일본 정벌, 그리고 김방경 기술 내용
가) 고려시대 기술 내용
교과서 전체(335쪽) 중 49쪽(62-77p. 143-151p, 203-211p, 271-286p, -14.6%)에 걸쳐 기술된 고려시대 내용 가운데 고려 중․후반기는 고려시대 총 6개 단원 중 제3단원(통치구조와 정치활동)에서 4쪽(72-76p), 제5단원(사회 구조와 사회생활)에서 3쪽(208-210p)으로 7쪽(14.2%)에 걸쳐 기술되어 있다.
고등학교 교과서 내의 충렬공 관련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3단원>
5. 대외관계의 전개-몽골과의 전쟁
가. 몽골은 금을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한 이후 고려에 무리한 요구를 일삼았고 고려를 방문했던 사신이 귀국길에 피살되자 이로부터 40년간 고려와 몽골과는 전쟁을 벌였다.
나. 무신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다. 김윤후가 이끈 민병과 승군이 처인성(경기도 용인)에서 몽골장수 살리타(撤禮塔)의 군대를 물리쳤다.
라. 노비와 부곡지역의 주민까지도 몽골에 대항하여 싸웠다.
마. 최씨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은 끝났고 몽골은 고려의 완전 정복을 포기하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저항의 결과였다.
바.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고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대몽항쟁을 계속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항쟁은 몽골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6.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원의 내정 간섭
가. 몽골과 강화한 이후, 고려는 두 차례 실시된 원의 일본 원정에 군대와 물자의 제공을 강요받았다.
나. 고려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의 부마가 되었고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다. 원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계속 유지하여 내정 간섭 기구로 삼았고, 군사적으로는 만호부를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라. 원의 공녀 및 금, 은, 베, 인삼, 약재 등의 요구로 고통이 컸다.
마. 원의 내정간섭으로 자주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원의 압력과 친원파의 책동으로 비정상적인 정치로 운영되었다.
<5단원>
3. 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몽골의 침입과 백성의 생활)
가. 일반 백성은 --<중략>--전쟁의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동원됨으로써 막대한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나) 삼별초난 기술
고등학교 교과서는 중학교 교과서보다 삼별초난 문제를 단지 한 개의 문단으로 간단히 축소하여 기술했다. 그리고 삼별초에 대해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항쟁은 몽골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라고 기술하여 중학교 교과서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며 민중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 일본정벌 기술
일본 정벌에 대해서는 3군데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고려는 두 차례 실시된 원의 일본 원정에 군대와 물자의 제공으로 막대한 희생을 강요당했으며, 원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계속 유지하여 고려의 내정 간섭 기구로 삼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처음 내용은 중학교 교과서에 없던 내용이 추가 된 것이고, 뒤의 내용은 중학교와 동일한 것이다.
라) 김방경 인명(人名) 기록
초․중학교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김방경’ 인명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무신정권에서는 정중부, 이의방, 최충헌, 최우가 거명되었고, 거란의 침입과 격퇴에서는 서희와 강감찬이 기록됐으며,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개척에서는 이자겸이, 몽골과의 전쟁에서는 김윤후가, 삼별초에서는 배중손 등이 거명되었는데도 삼별초난 진압과 일본 정벌의 핵심적 인물이었던 김방경은 누락되었다.
3)문제점 및 발전적 제안
가)교육 과정상
교육 과정상의 문제점과 발전적 제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첫째, 교육 과정 목표에서 ‘분석 비판 종합하는 능력을 기른다’고 했는데 본문의 삼별초 활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측면만 기록했다. 따라서 교육 과정 속에 삼별초에 대해서는 긍정만이 아닌 부정적 측면도 함께 기술하는 규정을 설정해야 한다고 본다.
둘째, 주제별 학습 내용(중세의 정치적 변천)에서 삼별초난과 일본 정벌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는 고려 중․후반기의 중요한 역사 사건이기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나)삼별초난 기술상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중학교와 같이 삼별초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며 민중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삼별초에 대한 이런 예찬 일변적 기술은 삼별초난을 국토 수호 정신 앙양이란 국민정신 교육에 활용하려는 교육 목적으로 인해 부정적 측면을 의도적으로 은폐했다는 지적을 받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삼별초에 대한 부정적 측면도 함께 기술하여 학생들에게 종합적 역사 인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다)일본정벌 기술상
일본정벌이란 용어가 나타나긴 하나 일본 정벌 자체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정동행성을 세워 고려의 내정을 간섭했다는 것과 군대와 물자의 제공을 강요받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급됐을 뿐이다. 이는 우리의 적극적 대외 정책과 자존심을 지키는 중요한 사건임에도 이를 생략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수많은 피해에 대한 정신적인 치유와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역사 교육을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 정벌 자체에 대한 기술이 좀 더 상세하게 기술돼야 한다고 본다
라) 김방경 인명(人名) 기록상
초․중학교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김방경’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삼별초난 진압과 일본 정벌 등 당시 고려․원․일본 삼국의 국제 관계에서 핵심적 인물이었던 김방경이 누락된 것은 동시대 다른 인명 기록의 형평성에서 어긋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시기의 중요한 역사인물인 김방경의 인명은 반드시 기록돼야 한다고 본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