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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간위 자료-초중고 교과서에 나타난 충렬공 小考(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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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9-03-21 11:25 조회1,9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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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학교 국사 교과서

  1)중학교 제7차 국사과 교육 과정

   중학교 제7차 국사과 교육 과정의 중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사회과 교육 과정 개정의 중점

     (1)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측면에서, 정보화․세계화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시민적 자질을 사회과 교육 과정의 각 구성 요소에 일관되게 반영하였다.

     (2)교육 과정 운영의 측면에서, 교육 과정 운영의 개별화, 다양화를 기하기 위해 내용을 수준별로 제시하였다.

     (3)교육 과정상의 내용 제시 방식에 있어서 활동 중심, 문제 해결 중심의 학습을 뒷받침하기 위해 학년별 내용을 기본적 지식, 기능과 이의 습득을 위한 학습 활동을 결합한 성취 목표의 형태로 제시하였다.

     (4)내용 선정면에서, 학습자의 자기 주도적 학습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용량을 크게 감축하였다.

     (5)교수․학습의 측면에서 구성주의적 학습 환경을 강조하였다.

     (6)평가의 측면에서, 자기 주도적 학습에 따른 수행 평가의 실행을 강조하였다.

   나)사회과의 목표

    (1)총괄 목표 : 사회 현상에 관한 기초적 지식과 능력은 물론, 지리, 역사 및 사회 과학의 기본 개념과 원리를 발견하고 탐구하는 능력을 익혀, 우리 사회의 특징과 세계의 여러 모습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며, 다양한 정보를 활용하여 현대 사회의 문제를 창의적이며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공동생활에 스스로 참여하는 능력을 기른다.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발전은 물론, 국가, 사회,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민주 시민의 자질을 기른다.

    (2)영역별 목표(국사 분야) : 각 시대의 특색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역사적 전통문화의 특수성을 파악하여 우리 문화와 민족사의 발전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며, 이를 바탕으로 인류 생활의 발달 과정과 각 시대의 문화적 특색을 파악한다.

    (3)단원의 목표

     (가)역사는 인간이 의지와 행동에 따라 나타나는 과거의 사실을 시간의 흐름 속에 파악하는 교과임을 이해한다.

     (나)인류가 자연 환경에 적응하거나 극복하면서 각 지역별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 왔음을 이해한다.

     (다)각 지역의 상호 교류가 확대되는 가운데 오늘의 사회와 문화가 형성되었음을 이해한다.

     (라)역사 발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려는 삶의 태도를 기른다.

    (4)고려의 성립과 발전(소단원의 목표)

     (가)북방 민족에 대한 고려의 대외 정책이 어떠한 배경으로 성립되었으며, 어떤 성과와 결과가 있었는지 설명한다.

     (나)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통해 고려 중기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이해한다.

     (다)대몽 항쟁의 구체적 사실을 통해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 의지를 본받는다.

     (라)고려 말 신흥 세력이 성장하면서 반원 자주 정책과 개혁 정치가 시도되었음을 이해한다.

    (5)몽고와의 전쟁과 자주성의 회복(소단원 목표)

    몽고의 침략을 받아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줄기차게 항쟁했으나, 결국 원의 압력으로 일부 영토를 상실하고 내정 간섭을 겪게 되는 과정과 원․명 교체기를 틈타 그동안 성장해 온 신진 사대부 세력을 배경으로 공민왕이 반원 자주 정책을 전개하는 사실을 학습한다.


 위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정보화․세계화 사회로의 변화에 발맞추어 개정하였다.

  2. 내용을 수준별로 제시하였으며 학생들의 활동 중심, 문제 해결 중심의 학습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3. 자기 주도적 학습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용량을 크게 감축하였으며, 교수․학습의 측면에서 구성주의적 학습 환경, 수행 평가의 실행 등을 강조하였다.

  4. 고려 중․후반기인 <몽고와의 전쟁과 자주성의 회복> 단원에서는 학습 목표로 ‘몽고의 침략을 받아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줄기차게 항쟁했음과, 원의 압력에 의한 일부 영토의 상실, 내정 간섭을 겪게 되는 과정, 신진 사대부 세력의 성장과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 전개’ 등을 그 중심으로 삼았다. 


  2)중학교 교과서의 삼별초난과 일본 정벌, 그리고 김방경 기술

   가)고려시대 기술 내용

 교과서 총 328쪽 중 33쪽(90-125p. 11.0%)에 이르는 고려시대 내용 가운데 고려 중․후반기에 대해서는 8쪽(110p-117p, 24%)에 걸쳐 모두 3개 소항목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어떻게 맞섰는가? 

  (삽입사진-1)처인성 전투 장면 2)팔만대장경 3)공민왕릉)

  가. 몽골과의 접촉

   1) 13세기 고려에 많은 물자를 요구하러 왔다가 귀국하던 몽골 사신이 피살되자 몽골과 고려의 외교관계는 단절되고 몽골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나. 몽골에 맞서 싸우다

   1)1231년 몽골군이 침입하였으나 귀주성에서 박서의 지휘 아래 성을 지켰다.

   2)충주지방에서는 몽골군이 침입하자 관리들은 도망했으나 관노비들은 끝까지 싸워 성을 지켰고, 반정부자들이었던 초척들도 몽골군과 싸웠다. 

   3)최씨정권은 항전을 강조하며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4)광주(廣州)에서는 주민들이 몽골군을 격퇴했다.

   5)처인성(경기도 용인)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고 몽골군을 철수시켰다.

   6)그 후 계속하여 몽골은 고려를 침입하였으나 김윤후는 노비들과 함께 충주성을 지켰다.

   7)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 조성 작업을 시작하였다.

   (삽입 사진-1)대몽항쟁기의 강화도 일대, 2)강화산성 남문  3)처인성 승첩비, 4)대장경판)


 다.몽골과의 강화

  1)최씨정권은 백성을 외면한 사치와 무리한 조세 정책 등으로 민심을 잃고 최의가 피살되자 무너졌다.

  2)최씨정권의 몰락으로 몽골과 강화가 이루어지고 무신정권의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라.삼별초의 항쟁

  1)무신정권의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개경환도에 반대하고 대몽항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진도로 내려가 여 ․ 몽 연합군과 싸웠다.

  2)진도가 함락되자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3)삼별초의 대몽항쟁은 고려인의 자주정신을 보여 준 것이었다. 이로써 40여 년간의 몽골과의 전쟁은 끝났다.

    (삽입 사진-1)항파두리 항목 유적지


2. 고려사회가 원 간섭기에 변화된 모습은?

 가.원의 내정 간섭

  1)고려는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국왕 중심과 문신 세력이 다시 정치를 주도하였다.

  2)원은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인정하면서도 고려에 그들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3)원은 일본원정을 계기로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을 이용하여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4)고려 국왕은 원의 공주와 혼인하고, 왕자는 원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고 국왕이 되는 등 원은 고려 국왕을 자기들 통제 아래 두고 그를 통해 고려를 간접 지배하는 정책을 폈다.

 나. 개혁 정치의 시작

  1)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권문세족이 등장하였다.

  2)권문세족의 횡포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다.

  3)충선왕과 충목왕은 이를 개혁하려 했으나 원의 간섭과 잦은 정치세력의 변화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나) 삼별초난 기술

 초등학교 교과서와는 달리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삼별초난 문제를 한 소단원으로 설정하여 ‘삼별초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 대몽 항쟁을 계속하며 여․몽 연합군과 싸운 것은 고려인의 자주정신을 보여 준 것’이라며 삼별초의 대표적 명분인 대몽항쟁을 특히 강조 ․ 찬양하고 있으며, 삼별초난을 고려의 대표적인 자주정신의 표상으로 승화시켜 놓고 있다. 

   다) 일본정벌 기술

 일본 정벌에 대해서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는데,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일본정벌’이라는 말이 한 번 나타나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 정벌 그 자체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정벌을 계기로 원나라가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 고려를 내정 간섭하였다’고 기술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라) 김방경 인명(人名) 기록

 초등학교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김방경’이란 인명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동일한 시기인 몽골 항쟁과정에서 박서, 김윤후, 부곡민, 임유무 등의 인물명이 나타나는데 반해 고려 중․후반기의 중요 사건인 삼별초난 진압과 일본 정벌의 핵심에 있던 김방경의 인명은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3) 문제점과 발전적 제안

 초등학교와 같이 중학교 교과서에서도 고려시대는 분량상 11.0%만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가운데 중․후반기를 초등학교에서는 7%(1/14p)만 다루었던 데 반해 중학교에서는 3배 이상인 24%(8p/33p)를 다루고 있는 점이 다르다. 그렇지만 삼별초난과 일본 정벌, 김방경에 대한 기술에 대해서는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이에 다음과 같은 몇가지 문제점 및 발전적 제안을 해 본다.

   가)교육 과정상

 중학교 사회과 교육 과정에 대한 문제점 및 발전적 제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 과정에 고려 중․후반기의 중요 사건인 삼별초난과 일본 정벌에 대한 것이 누락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추가 보완돼야 한다고 본다. 

 둘째, 삼별초난에 대해서는 종합적 사고라는 교육목표 상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기술하는 교육 과정을 설정했으면 한다.   

 셋째, 자기 주도적 학습을 위해 내용을 크게 감축했다고 하더라도 왕조별로 적절한 분량이 되도록 고려시대를 증가 편성했으면 한다. 

   나)삼별초난 기술상

 삼별초가 개경환도(開京還都)에 반대하고 난을 일으켜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 가며 여․몽 연합군과 싸운 것은 ‘고려인의 자주정신을 보여 준 것’이라며 삼별초의 명분인 ‘대몽항쟁’을 찬양 일변도로 기술하고 있으며, 난을 일으킨 것을 ‘고려인의 자주정신’이라고 비약(飛躍)시켜 표현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는 당시 고려 조정이 힘의 열세 상황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몽골과 강화하자 삼별초는 자신들의 안위(安危)에 대한 불안으로 이를 거부하였으며, 새로운 왕[왕온]을 옹립하고 정부 조직까지 구성한 반국가 군사단체였으며, 이들이 항쟁과정에서 백성들에게 각종의 만행을 저질렀던 부정적 역사 사실들을 은폐했다는 지적을 받는다고 본다. 삼별초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지적한 다음의 것들을 보자.


  (1)閔賢九. <몽고군․김방경․삼별초>(한국사 시민강좌. 1991. 101p.)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사병적 군대로서 항몽 전쟁을 수행한 전위조직이었다. 무인 정권이 몰락하고 개경 환도가 이루어지려 하자 이들은 신상에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2)李相哲. <金方慶 硏究>(청주대학교 대학원. 석사. 1986. 22p)

   "진도로 들어간 삼별초는 용장성을 쌓고 일대 해상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육지에서의 활동도 활발하여 장흥을 비롯하여 합포(마산), 금주(김해), 동래 등은 물론 나주, 전주까지 進功하였다. 이렇게 삼별초가 진도에 있으면서 육지의 州․郡을 침략하자 전라도 討賊使 申思佺, 전주부사 李彬이 도망--<하략>”

  

  (3)박재우.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김방경)> (돌베게. 2003. 12. 255p)

   "삼별초의 항전이 삼별초 전체의 입장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중략>--고려 원종이 삼별초를 해산한 것은 삼별초가 임연 정권의 수족이 되어 왕권 확립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략>--삼별초는 오랜 기간 항전을 이끌어왔던 그들의 명부가 몽고에 알려질까 두려웠다. 당시 몽고군은 고려와 전쟁을 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몽고의 힘을 빌려 임연 정권을 몰락시키려 했던 원종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삼별초는 이것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중략>--전쟁 말기에 나라가 잿더미가 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강화를 체결했는데, 전쟁이 끝난 지 11년 만에 다시 항전을 표방하며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결코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삼별초의 최초 항몽 동기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함께 난을 일으킨 부정적 부분도 함께 기술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종합적, 합리적인 역사 인식을 갖게 해야 한다고 본다.

   다)일본정벌 기술상

  ‘일본정벌’이란 용어가 한 번 나오기는 하나 실제 일본정벌 과정 자체에 대한 내용은 없고 이를 계기로 원은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고려의 내정을 간섭했다는 내용만을 기술하고 있다.

 고려의 2차에 걸친 일본정벌이 비록 원나라와 함께 이루어졌고 모두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긴 했지만 우리의 적극적 대외 정책과 자존심을 보인 중요한 사건이었다1)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생략함으로써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자존심을 약화 시켰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한반도 역사에서 왜구의 침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그 피해 또한 엄청나게 컸다. 그리고 일본은 국가 정책적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켜 7년간이나 우리를 전쟁의 참화 속에 빠뜨렸고, 1910년부터 35년간은 우리의 국권을 강제 침탈하여 민족 최대의 고난과 비극을 겪게 했다. 이런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처에 대한 정신적인 치유와 함께 자존심을 지키는 역사 교육을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 정벌에 대한 기술이 좀 더 상세하게 기술돼야 한다고 본다.


   라)김방경 인명(人名) 기록상

 중학교 교과서에도 ‘김방경’의 인명 기록은 초등학교와 같이 없다. 이는 동일 시기의 몽골 항쟁과정에서 박서, 김윤후, 부곡민, 임유무 등은 나타나는데 고려 중․후반기의 중요 사건인 삼별초난 진압과 일본 정벌의 핵심적 위치에서 활동했던 김방경의 인명을 누락시킨 것은 다른 인명 기록과의 형평성에서 어긋난다고 본다.

 ‘대몽항쟁 과정에서 몽고군과 적극적으로 싸웠고, 고려 조정의 상하 관료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신망과 존경을 받아 온 그가 몽고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고려의 자주성을 주장하며 독립된 정권을 세운 삼별초와 대결하게 된 사실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2)는 주장과 ‘김방경은 몽고와의 강화, 삼별초의 난, 일본 침략, 여․원 관계와 측근정치 등과 같은 중요한 사건을 거친 인물이므로, 고려 후기 역사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김방경의 생애에 대한 이해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3)이라는 것에서 보듯이 이 시기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김방경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기에 그의 인명 기록은 당연한 것이라고 본다. 

1)이런 시각의 논문으로 다음의 것들이 있다.

 (1)尹愛玉. <김방경 연구>(성신여대 교육대학원. 석사. 1993). 28p.

   "여러가지 부담을 지고 遠征에 참가한 고려는, 戰鬪에 있어서 元의 소극적 태도와 달리 적극적인 자세로 전투에 임했으며, 특히 김방경은 赫赫한 功勳을 세웠던 것이다. 귀국 후 왕은 김방경에게 判御使臺事의 관직을 주었으며, --중략--元帝는 김방경에게 “고려는 義理를 아는 나라다”라고 하면서 융숭하게 대접하였으며 虎頭金牌를 주니, 고려사람으로서 金府를 차게 된 것은 김방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李相哲.<金方慶 硏究>(전게서. 38p).

   "두 번의 원정에서 실패한 원인이 태풍에도 있지만 水戰에 익숙지 못한 원군이 용기를 잃은 점도 들 수 있겠다.--<중략>-- 오랜 전란으로 피폐한 고려가 원의 무리한 요구에 응하여 일본 원정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김방경 때문이었다.


2) 尹愛玉. <김방경 연구>(전게서. 42p)


3) 박재우.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전게서. 2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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