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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영정 제작을 위한 수집 자료(5)-종합 판단 및 결론(제작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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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6-05 16:26 조회1,8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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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각종 수집 자료 및 정보의 종합 판단

  1) 영정 제작의 등급과 종류

   가) A급-표준영정 제작

     1)문화관광부의 표준 영정심의위원회를 통과하는 영정 제작

     2)국내 최고 작가 선정 : 권오창, 윤여환, 김종섭, 최웅, 손연칠

     3)금액 : 최하 1억원-2억원

       4)문중, 지방관청의 합작으로 추진해야 가능함


     나) B급-고급영정 제작

       1)국내 최고작가 선정 : 권오창, 윤여환 등

       2)복식 및 인물 고증에 따른 작업

       3)금액 : 약 5천만원


     다) C급-중급영정 제작(가장 효율적)

       1)중견작가 선정 : 한국 초상화 협회 등록회원, 기타 중견 작가

       2)복식 및 인물 고증 자료 제공, 협의

       3)금액 : 약 3천만원


     라) D급-하급영정 제작

       1)일반 초상화 작가 선정 : 인사동, 홍대 앞, 삼각지 등의 화랑 작가. 

       2)복식 및 인물 고증 자료 제공, 협의

       3)금액 : 약 1천만원-2천만원


   2)복식 및 초상화 자료 수집 결과

     가)복식문제

       1)현재 고려시대 영정 중 유일한 것은 이제현(1287∼1367)과 안향(1243-1306)의 영정밖에 없음.

        *이제현 영정 : 전남 강진군 대구면 구수리의 귀곡사에 보존되고 있다가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 중국 원나라 진감여의 작인 원본의 훼손으로 인해 18세기에 충실히 옮겨 그린 것이다(93×177.3). 입고 있는 의상은 중국 송나라 사인도의 양식과 비슷하다. 그런데 문제는 공복이 아닌 일상복(質孫)이다. 신발만 참고할 수 있다.

        *안향 영정 : 1318년(충숙5) 왕명으로 미상의 작가가 그려 문묘에봉안했다가 1559년(명종14) 이불해(李不害)가 모사 현존. 문제는 상반신이 복두이며, 공복이 아닌 질손(평상복)을 입고 있었음.     

         leejehyeon.jpg  anhyang.jpg     

                   <이제현 영정>                                <안향 영정>   


       2)복식관련 전 문헌에 고려시대의 복식(公服)에 대한 정확한 고증 자료는 없음. 다만, 원나라의 복식에 준한다는 개략적 기술만이 있음.

       3)우리나라 복식 연구의 상아탑인 단국대학교 <전통 의상학과>에서도 고려시대 복식에 대해서는 출토 유물이 전혀 없어 아무것도 정립해 놓지 못한 현실이다. 다만, 원나라 공복(公服)에서 그 원형을 찾아야 한다는 추상적 답만 있을 뿐임.

       4)표준영정제도에 의해 지정된 고려시대의 영정(13개)이 그래도 현재까지 연구하여 정립된 고려시대 복식의 가장 확실한 학술적 자료가 됨.

       5)고려시대 표준영정 분석 자료 (별지 참조)

     나)인물 문제

       1)정문부 영정의 경우-후손 중 문중회에서 정한 정통 혈통자 다수(수십 명의 유전자를 채취하여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 종합하여 인물을 그리는 방법-윤여환 작업)

       2)후손 중 문중에서 정한 정통 혈통자 다수(수십 명)의 사진을 모아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 종합하여 인물을 그리는 방법

       3)후손들의 요청과 작가의 판단에 의해 그리는 방법

       4)주인공의 행장 등에서 나타난 성격, 외모 등을 중심으로 그리는 방법

       5)작가와 문중인들의 협의에 의하여 제작하는 방법

       6)조선시대 초상화 기법에 따른 제작 : 철저한 사실주의적 표현, 정직한 표현, 피사인물의 성격과 교양과 인품 등 내면적 정신세계 표현, 기(氣)가 살아 있는 눈, 약간 오른쪽으로 튼 모습, 섬세한 붓질, 배경을 넣지 않음.

     다)표준영정 지정 문제에 대해

         지명도가 높은 인물인 경우 제작과정에서 표준영정 심의 위원들의 지도와 조언을 받고, 현재까지 정립된 고려시대 복식 제도와 피사인의 성품에 걸맞는 인물로만 그린다면 제작 후라도 지정 요청을 거쳐 지정받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 (윤필구님 의견)

라. 충렬공 영정 제작안(고려시대 표준 영정을 기초로 본 복식과 인물)

   1)기본 방향

     가)작가 : 충분한 영정 제작 경험과 명성을 갖고 있는 중견작가 이상

     나)제작 방법

       (1)지도 조언 : 표준영정 심의위원의 지도와 조언을 받아 가며 제작

       (2)복식 : 고려시대 복식 연구자료(표준영정 및 각종자료)를 충분히 참고하고 최대한 적용하여 제작

       (3)인물 : 현 영정, 윤관얼굴, 김부식얼굴, 충렬공 행장(외모, 성격) 등을 종합하고 작가의 의견을 포함하여 제작

   2)세부 제작안

     가) 제작규격

       (1)크기 : 80호(146×89cm)

       (2)화판질 : 명주(실크)판

       (3)기법 : 동양화법

       (4)염료 : 전통염료(안료-내구성 고려)

     나)영정내용

       (1)전체 윤곽 구도 : 의자 좌상. 전신상-김윤후, 왕건 구도 참조

                         약간 오른쪽으로 틀은 모습

       (2)배경 : 없음(은은한 연미색)

       (3)나이 : 70여세

       (4)관 : 날개-반원형, 모자-둥근선--김윤후, 최영, 김부식 등의 관

       (5)얼굴 : 눈,코,입,턱,수염- 윤관, 김부식, 현 영정, 행장자료 종합.

       (6)포 : 적색, 포-김윤후, 소매-이규보(소매의 회장 제외)

       (7)흉배 : 없음

       (8)대 : 적색, 장식-중앙3. 양쪽2--김윤후, 김부식, 최영 참조

       (9)신발 : 검은색에 바닥 흰색-김윤후, 왕건 참조

       (10)글씨 : 우상, 좌하에 기록

              우상 : 忠烈公 金方慶之像   

              좌하 : 西紀 二00八年 十月  日 (             )謹寫

       (11)기타

        (가)덧집 제작 설치    (나)질 좋은 것으로 표구,   (3)성금자 동판, 또는 와비 제작.  (4)전 제작 관련 내용 백서 제작 배포, 보관. 

마. 충렬공 약력 및 성품 소개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 1212년∼1300년)

자(字)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한림학사와 병부상서를 지낸 김효인(金孝印)의 아들이다. 1227년(고종14) 16세에 양온사동정(良醞史同正)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산원(散員)과 식목녹사(式目錄事)를 지내고,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1247년(고종34.36세)에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 견룡행수(牽龍行首),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고, 1258년(고종45.47세)에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에 이르렀다.

 1263년(원종3.52세)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1271년(원종12.60세)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 병마원수(兵馬元帥)로서 판추토사(判追討使)가 되어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하고, 이어 1273년(원종14) 62세에 제주에서 남은 삼별초(三別抄)를 평정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그런데 1278년(충렬4.67세) 무고로  대청도에 2개월간 유배갔다가 혐의가 없자 곧 석방 복직되었다.

 1274년(원종15.63세)과 1281년(충렬7.70세) 2차에 걸친 여원연합군의 일본 정벌 때 고려군 도원수(都元帥)로서 출정하였고, 1276년(충렬2.65세)에 고려에서는 유일하게 원으로부터 호두금패(虎頭金牌)를 받았다. 

 1283년(충렬9.72세) 추충정난정원공신 벽상삼한 광정대부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推忠靖難定遠功臣 壁上三韓 匡靖大夫 三重大匡 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치사(致仕)하고, 1295년(충렬21.84세) 첨의령(僉議令)에 가자(加資)되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으며, 식읍(食邑) 일천호(一千戶) 실봉(實封) 삼백호(三百戶)를 받았다.

 1300년(충렬26) 8월 16일, 89세로 개성 백목동 앵계리에서 훙(薨)하고 9월 3일 유언에 따라 고향인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 능골에 안장되었다. 1307년(충렬33.훙 후 7년)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宣忠協謀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 충렬(忠烈)을 하사(下賜) 받았으며, 왕명으로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었다. 

 안동김씨(安東金氏)에서는 공을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세수(世數)를 정한다. 시제(時祭)는 음력 10월 9일이다


*성품 및 외모 : 충렬공 행장(안진 찬) 참조


  1)천성(天性)이 충직(忠直)하고 신의(信誼)가 돈후(敦厚)하며 기량(器量)이 크고 식견(識見)이 넓어서 사소(些少)한 일에 구애(拘碍)되지 않음.

  2)엄(嚴)하고 굳세고 과묵(寡默)하여 비록 자질(子姪)들이라도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함.

  3)박식(博識)하고 규범(規範)이 있어 일을 결단(決斷)함에 백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으며 서도(書道)는 가전(家傳)한 법(法)이 있고 시(詩)에 또한 능(能)하였음.

  4)기골(奇骨)이 장대하고 추위나 더위에도 병(病)이 없었으며, 잠이 적으며 늙으셨어도 머리가 희지 않았음.

  5)자신(自身)을 살펴서 근검하고 낮에는 잠시도 눕지 않으셨으며, 세수할 때에는 한 사발 물을 더 쓰지 아니하셨음.

  6)벗들을 잊지 않고 상사(喪事)가 나면 바로 가서 조문(弔問)하며 의식(衣食)은 화려(華麗)함을 배척하였으며, 손님이 오면 친소(親疎)의 구별(區別)없이 대접(待接)을 극진히 하고 평생(平生)에 임금의 실책(失策)은 말하지 않았음.

  7)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퇴관(退官)해 계셔도 언제나 걱정하시고, 큰 잔치가 있으면 반드시 초청(招請)을 받아 가시며 큰 회의(會議)가 있으면 반드시 공(公)을 불러 의논(議論)하였고, 매년(每年) 정초(正初)에는 공경(公卿)과 장상(將相)들이 모두 먼저 와서 배례(拜禮)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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