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약재(문온공)선조님과 동방(대과에 같이 합격하신분들)-1- 권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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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02-01 11:23 조회1,732회 댓글0건본문
牧隱文藁卷之三
葵軒記
永嘉權希顏。吾所愛敬者也。淸而不苟異。和而不苟同。立于朝久矣。未獲施其志。取葵花向日之語。題其軒曰葵。請予記。予則義不辭。從而誦所聞曰。夫理無形也。寓於物。物之象也。理之著也。是故。龍圖龜書。聖人之所則。而蓍草之生。所以盡陰陽奇耦之變。而爲萬世開物成務之宗。則雖細物。何可少哉。如近世觀梅之學。亦本於此。觸類而長。烏可已也。是以。希顏之曾大父文正公道德文章。式百寮。號其所居曰菊齋。大父昌和公功名富貴冠諸君。號其所居曰松齋。而尊公腰萬戶之符。踞外戚之勢作樓于崇敎里蓮池之傍。額曰雲錦。樂其親以及宗族。益齋文忠公爲之記。吁盛矣。今希顏之取於葵也。蓋家法也。葵之爲物。傳於春秋。凁水先生又取之着于詩。葵之遇也大矣。水陸草木之花甚蕃。獨葵也能衛足焉則知也。能向日焉則忠也。君子之有取焉者。豈徒然哉。霜露零而菊黃。氷雪盛而松靑。風雨離披而蓮香益淸。大陽照耀而葵心必傾。其異於尋常草木也遠矣。孰不愛而敬之哉。菊也隱逸。松也節義。蓮也君子。葵也智矣忠矣。胡然而華乎一家哉。祖子孫相繼奕世。所取以自表者如此。權氏之不與尋常草木同腐焉者亦明矣。垂耀士林。敷華王國。可竢也。請志之。丁巳臘月。記
규헌 기(葵軒記)
영가(永嘉) 권희안(權希顔)은 내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자다.
맑으면서도 구차히 남보다 다르게 하지 않았고, 화하면서도 구차히 남과 같으려 하지 않았는데, 조정에 선 지 오래도록 그 뜻을 얻어 베풀지 못했다.
이에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뜻을 취해서 자기 마루에 규헌(葵軒)이라고 써 붙이고 나에게 기(記)를 쓰기를 청하였다.
내 이를 사양하지 못하고 전에 들은 바를 더듬어 다음과 같이 쓴다. 대개 이치란 형상이 없고 물(物)에 붙어 비로소 물의 형상이 되고 이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용도(龍圖)와 귀서(龜書)는 성인들이 법으로 삼는 바이며, 시초(蓍草)가 나와 음양의 기우(奇耦)의 변화를 다 궁구하여 만세(萬世)의 물을 열고 일을 이루는 근본이 되었으니, 비록 적은 물건이라도 어찌 이것을 적다고 할 것이랴.근세의 관매(觀梅)를 점치는 학문도 또한 여기에 근본하여 점차 발전한 것이다. 어찌 이것을 그만 둘 수가 있는가. 이로써 희안의 증대부(曾大父) 문정공(文正公)은 도덕과 문장이 백료의 본보기가 되어 그 거처하는 곳을 국재(菊齋)라 했고, 그의 대부(大父) 창화공(昌和公)은 공명과 부귀가 여러 사람들의 으뜸이 되었더니 그 거처하는 곳을 송재(松齋)라고 하였다.또 그의 아버지는 만호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외척의 세력을 잡아서 숭교리(崇敎理) 연지(蓮池) 옆에 누각을 지어 여기에 운금(雲錦)이라 하되, 그 어버이를 즐겁게 하고 이것이 종족에게까지 미쳐서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이 기까지 지어 주었으니, 실로 장한 일이로다.
이제 희안이 해바라기를 취한 것은 대개 그의 가법(家法)인데, 해바라기의 물건됨은《춘추(春秋)》에도 전해졌고, 속수선생(涑水先生)이 또 이것을 취해다가 시(詩)까지 지었으니, 해바라기가 대접을 받은 것이 크도다.
물과 물에 있는 초목의 꽃이 아주 많지만, 유독 해바라기가 능히 뿌리를 보호할 줄을 아니 이는 슬기가 있음이요, 능히 해를 향하니 이는 충성됨이라, 군자들이 이를 취하는 것이 어찌 부질없는 일이랴. 서리와 이슬이 내려야만 국화는 누르고, 얼음과 눈이 쌓여야만 소나무는 푸르며, 바람과 비가 흩어져야만 연꽃의 향기는 더욱 맑으며, 태양(太陽)이 비쳐야만 해바라기꽃은 기울어지는 것이니, 그 보통의 초목과는 매우 다르도다. 누가 이를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으리요.
국화는 은일(隱逸)이요, 소나무는 절의(節義)이며, 연꽃은 군자요, 해바라기는 지혜와 충성인데, 이들이 어찌해서 한 집에 모두 모였는가. 할아비와 아들과 손자가 서로 계승하여 세상에 혁혁하고, 물건을 취하여 스스로 자기를 나타냄이 이와 같으니 권씨(權氏)가 보통의 초목들로 더불어 같이 썩지 않을 것이 또한 분명하여 사림에 빛을 드리우고 왕국에 명예를 넓힐 것을 가히 기다릴 만 하니, 청하건대 이를 기억하기 바라노라.
정사년 납월(臘月)에 쓴다.
삼봉집 제1권
三峯集卷之一
圃隱先生道德宗。照人文彩最風流。遁老意氣傾群公。兩鬢華髮吹颼颼。
蔡軒淸標奪玉潔。[按蔡當作蔡卽葵軒權鑄也]。陶齋文焰凌雲浮。
又有東隱是長者。忠民至今猶歌謳。去年今夜山寺會。談笑縱謔同忘憂。
可憐欲之在萬里。三峯幸得出林丘。歲月幾何聚散多。莫負諸公招我遊
제공의 시에 차운하다[次諸公韻]
포은선생은 도덕의 종이시라 / 圃隱先生道德宗
비치는 문채 풍류의 으뜸일레 / 照人文彩㝡風流
둔옹(遁翁)의 의기는 군공들을 경도하여 / 遁老意氣傾羣公 둔옹(遁翁) :이집(李集
두 귀밑 하얀 머리 찬바람에 날리네 / 兩鬢華髮吹颼颼
채헌의 맑은 의표 옥의 깨끗함 빼앗았고 / 蔡軒淸標奪玉潔
【안】 채(蔡)는 당연히 규(葵)로 되어야 한다. 즉 규헌(葵軒)권주(權鑄)를 이름이다.
도재의 문염(文焰)은 뜬 구름을 능가하네 / 陶齋文焰凌雲浮
동은이 또 있어 이야말로 장자이라 / 又有東隱是長者
충주 백성 지금까지 노래불러 기린다네 / 忠民至今猶歌謳
거년의 오늘밤 산사에 모이어 / 去年今夜山寺會
웃고 해학하며 근심 함께 잊었더니 / 談笑縱謔同忘憂
가련하다 가고 싶어도 만리 밖에 있는데 / 可憐欲之在萬里
삼봉은 다행히도 임구를 벗어났소 / 三峯幸得出林丘
세월이 얼마더냐 모이고 흩어짐 많으니 / 歲月幾何聚散多
제공은 버리지 말고 날 불러 놀아다오 / 莫負諸公招我遊
고려말의 명필로 금석문 글씨는 다음과 같다.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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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에 있는 대장각(大藏閣) 창건과 운영에 대한 사실을 기록한 비.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써서 1383년(우왕 9)에 세웠다. 높이 1.33m이며 보물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귀부와 이수 대신 장방형 대석과 가첨석으로 바뀐 형태이고 비신의 보전을 위하여 비신의 양쪽을 돌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다. 비신은 왼쪽 아랫부분이 크게 파손되고 윗부분에도 파손 자국이 크게 나 있으나 남아 있는 부분의 글자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신륵사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던 대장각은 고려말의 유학자 이색(李穡)과 신륵사에 입적한 나옹(懶翁)의 문도들이 발원하여 경율론 삼장을 수장하던 건물로서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 유래를 기록한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이색이 상총의 권유로 돌아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을 판각·보시하고자 하나 힘이 부족하여 나옹의 문도들과 함께 각지에서 사람들을 모아 대장경을 인쇄하고 책으로 꾸며 신륵사에 봉안한 사실을 기술하였다. 특히 이 대장경 불사는 매년 정월 5월 9월에 경전을 읽는 모임을 유지해 나갈 것을 명시하였다. 또한 대장경 봉안과 함께 각각의 인물이 시주한 비로자나, 문수, 보현의 삼존상을 봉안한 사실도 기술하였다. 음기에는 사부대중으로 나누어 단월들의 이름을 열거하였는데 특히 우바새(남자 신도)에 당대 고위 관료들이, 우바이(여자 신도)에 고관 부인들이 대거 망라되어 있다. [자료;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
북한산태고사 [원증국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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