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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 묘지명 번역본(김익수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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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01-30 16:12 조회1,3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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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휘 순) 묘지명> 번역문이 최초 안동김씨 대동보 기미본(1979년)에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문영공 종중 자체 사업계획(묘역 개축사업)에 따라 묘비문 번역문을 정비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이에 우리 문중의 한학자이신 익수님(제, 한학자, 제주 문화재위원)과 국회(익, 유림학당, 공주대 교사)님께서 새로 번역하셨습니다.  국회님의 역문은 이미 소개되었기에 익수님의 번역문을 소개합니다. 

 

1. 원문 (아래 짙은 글씨 중 (  )속의 것은 익수님의 교정 글자임) 

 *출전:『安東金氏大同譜』(1979)〕  

 重大匡判三司寶文閣大提學上護軍金恂 墓誌銘 (幷序)

古所謂君子者德行云乎哉功業云乎哉予曰惟德行耳非功業也何也德行在心功業 在時在心者人所修也在時者天所授也能修人之所可修者爲君子耳夫德行本乎忠孝能以忠孝立揚於當世者惟我判三司相君有焉公諱恂字歸厚系出新羅王金傅□□□□□□□□□□□□□□□□□□□公爲金傅十世孫而安東府卽其桑梓之鄕也曾祖諱敏成追封左僕射行掌冶署丞兼直史관(집.舍+官)祖諱孝印追封中書令行正議大夫兵部尙書翰林學士充史관(집.舍+官)修撰官知制誥考諱方慶宣授中奉大夫管高麗軍都元帥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三重大匡判都僉議司事典理司事上將軍上洛郡開國公食邑一千戶實封三百戶贈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忠烈公母朴氏中書舍人知制誥諱益旌之女封陰平郡夫人公以善書多寫碑文年方志學以門蔭入仕爲掌牲署丞後改爲別將御牽龍行首職雖從東至西 其志未嘗不在文學盖嚴君雖位極兩朝將相惟以未參桂籍爲恨 冀嗣子之能復祖業故也公由是力學不倦至至元十六年己卯春場一擧爲金榜副元是年初拜攝郎將後改爲國學直講此公之能伸大人之遺憤者也自是先公益推偏季之恩常令不離左右賀正上國無不令隨但其東征船上不許追陪者不從軍參危事也公於是扈駕不待命而先登戰艦頗有扶衛救援之功是公惟專忠孝而奮不顧身者也壬午遷殿中侍史翌年出爲尙州判官政聲登聞未一年而入爲典法佐郞□知通禮門事考功正郞壬戌奉使南方爲陪先公拜祖墓於桑鄕也戊子除秘書少尹知通禮門事是年上命公爲世子府行李別監委以師傅之任壬辰加朝顯大夫典法摠郞知制誥累遷少府尹□□□學軍簿摠郞典理摠郎朝奉大夫秘書尹三司右尹皆兼三字元貞乙未冬同知貢擧所取皆當時名士大開綺席□□□□士朝野莫不嘉歎是先公之極於榮孝者也是年加朝議大夫丙申兼世子舍人大德丁酉遷國學典酒又拜奉烈大夫密直使右副承旨驟遷左副承旨寶文閣直學士翌年加右承旨知版圖司事每遷皆兼三字是年春奉使南方旣還改授通議大夫光政副使承旨成均祭酒又改爲正議大夫集賢殿學士左散騎常侍是年七月復爲密直司右承旨國學祭酒寶文閣學士知民曹事依前三字八月加奉翊大夫三司左使崇文관(집.舍+官)學士九月又改爲正獻大夫密直司左承旨判秘書寺事充史관(집.舍+官)修撰官知制誥知軍簿司事十二月拜奉翊大夫密直司副使文翰學士己亥知止乞退翌年八月先公棄世依囑葬于桑梓庚戌冬行祭于先公墓壬子起爲重大匡上洛君承襲先公之茅土己未又拜先公墓上命季子永煦奉使以陪行所以重其行也至治元年辛酉命相以賢擢公爲判三司事八月加寶文閣大提學上護軍至是月二十一日寢疾卒于第享年六十四公性敦厚直柔內實剛毅孝悌忠信出於天眞惜乎以公之才德若延數載則利澤豈不及於蒼生名位豈止如是而已哉娶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贈謚文敬公諱許珙之女生四男三女曰永暾今爲都官直郞知陜州事曰永暉今爲興威衛保勝別將曰思順剃度爲慈恩宗大德曰永煦爲司憲持平女一嫡入內侍中正大夫親禦軍大護軍鄭책(巾+責)二嫡大匡上黨君白이(턱이. 臣+頁)正三嫡舍人別里哥不花大元左承相阿忽反之子也永暾等旣卜兆于德水縣馬山將葬也以予爲先公親舊具公之行狀乞銘甚切予雖病不忍堅拒受而銘之銘曰

 赫赫忠烈 東國汾陽 滿庭蘭玉 幷秀爭芳 白眉爲季 時號最良 家尊所겸(부족할 겸.兼+欠) 未入桂堂 公承厥志 銳意文場 世傳祖法 時效錦囊 妙齡乙第 名振四方 揚歷臺閣 演誥含香 一提文柄 桃李成行 高堂喜淚 流溢壽觴  眼前拜相 錄(또는 綠)빈(구렛나루.髮의 윗부분+賓)金章 力彈(또는 )榮孝 哀極재(가래나무. 木+宰, 또는 梓)鄕 子道無缺 宜降百祥 暮年閑退 天意范范 終傳茅土 門戶更光 不參時政 虛度九霜 俄登極品 民固邦寧 胡未卒歲 遽促仙裝 在公無慊 爲國可傷 刻銘流耀 庶及無彊

   大元至治元年辛酉十月十四日

   宣授朝列大夫 翰林直學士 三重大匡 檢校僉議政丞 右文관(집.舍+官)大提學

   監春秋?事 驪興君 閔漬 撰

 

2. 역문 (김익수본)

중대광판삼사보문대제학 상호군 김순묘갈명병서


 옛날 君子라고 하면 德行을 이룬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功業을 이룬 것이라고도 말한다. 나는 말하건대, 덕행이지 공업은 아니라고 하겠다.

어째서인가. 덕행은 마음에 있는 것이고 공업은 때(時機)에 있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것은 사람이 수양할 수 있는 것이고, 때에 있는 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다. 사람으로 수양할 수 있는 한 수양한 자가 군자이다.

  덕행은 忠孝에 근본을 두어 충효로써 當世에 입신양명할 수 있었던 자는  오직 우리 판삼사 相君이 계실 뿐이다.

 공의 휘는 恂이요 자는 歸厚이다.  신라왕 金傅의 혈통으로 태어났다. 내손으로 삼한벽상공신 사도아보 삼중대광 김선평(金宣平)이 있고 공은 김부의 10세손(?)으로 안동부가 곧 그 고향 고을이다. (김선평부분 19자 생략)

 曾祖의 휘는 敏成이니 좌복야로 追封된 행장야서승 겸 직사관이며, 祖의 휘는 孝印이니 중서령으로 追封된 행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수관수찬관 지제고를 지내셨고 考의 휘는 方慶이니 제왕이 중봉대부 관고려군 도원수 추충정난 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전리사사 상장군 상락군개국공 食邑 1천호, 實封 3백호를 주시고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충렬을 내리셨다.

 공의 어머님은 박씨요 중서사인 지제고 益旌의 따님으로서 陰平郡夫人으로 봉하셨다.

 공은 글씨를 잘 쓰셔서 비문을 많이 쓰셨다. 나이가 들자 학문에 뜻을 두어 문벌의 음직으로 벼슬에 들어가 장생서승이 되었고 후에 별장어견룡행수직을 맡아서 비록 동에서 서로 이르면서도 그 뜻은 항상 문학에 둔 것은 아마  부친(=휘방경)께서 비록 두 조정의 최고위인 將相 자리였지만, 오직 과거급제자 명단에 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으므로 사자(嗣子:휘순)가 능히 조상의 업적을  회복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공은 이 때문에 힘써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더니 至元 16년 기묘 봄 과장에서 과거급제명단에 부장원이 되어 그 해에 처음으로 섭랑장에 임명되더니 후에 다시 국학직강이 되시니 이는 공이 능히 부친(=휘방경)의 遺恨을 펴신 것이다. 이때부터 부친(=휘방경)께서는 막내아들(=휘순)을 더욱 편애하여  항상 신변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하정사로 중국에 가실 때에도 수행하게 하였으나 다만 일본을 정벌하는 배위에서는 쫓아가 모시지 못하게 한 것은 從軍하여 위태한 일에 참여치 못하게 함이었다.

 공은 이에 어가를 수행하는 명령도 받지 않고 먼저 전함에 올라타고 갔는데 마침내 부친을 호위하고 구원한 공이 자못 컸으니 이는 공이 충효를 오로지하고 분발함에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壬午(임오)년에 전중시사에 옮겨져 그 이듬해에 상주판관으로 나갔는데, 선정한다는 소문이 나서 1년도 못되어 들어와 전법좌랑00 통예문사 고공정랑이 되었다.

 壬戌(임술)년에 남방사신의 명을 받고 선친(=휘방경)을 모시고 고향 조상묘소에 배례하였다.  戊子(무자)년에 비서소윤 지통예문사를 除授(제수)받고 그해에 주상의 명으로 공은 세자부 행이별감이 되어 사부의 책임을 맡겼다. 壬辰(임진)년에 조현대부 전법총랑 지제고에 가자되어 여러차례 자리를 옮겨  소부윤000학 군부총랑 전리총랑 조봉대부 비서윤 삼사우윤이었는데 모두 三字(: 知制誥의 다른 이름)를 겸하였다.

元貞 乙未년 겨울에 과거로 선발된 동지들은 모두 당시의 명사들이라 크게 화려한 연회를 여니 0000사 朝野가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는 선친(=휘방경)에 대한 극진한 영광이요 효도인 것이다. 이해에 조의대부에 가자되고 丙申년에 겸세자사인이 되고 大德 丁酉년에 국학전주로 옮겼다가 또 봉열대부 밀직사 좌부승지를 배명하고 별안간 좌부승지 보문각 직학사로 옮겼고 그 이듬해에 우승지 지판도사사에 가자되었는데 늘 三字(:知制誥)를 겸하였다.

 이 해 봄에 南方으로 사신 갔다 돌아와서 이윽고 다시 통의대부 광정부사 승지 성균제주에 제수되고 또다시 정중대부 집현전학사 좌산기상시가 되었다. 이해 7월에 다시 밀직사 우승지 국학제주 보문각학사 지민조사가 되었는데 여전히 三字였다. 8월에 봉익대부 삼사좌사 숭문관학사에 가자되고 9월에 또다시 정헌대부 밀직사 좌승지 판비서시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 지군부사시가 되고 12월에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문한학사를 배명하였다.

 己亥(기해)년에 공께서 그만둬야함을 아시고 퇴직을 청하였다. 그 이듬해 8월에 선친(=휘방경)께서 세상을 하직하셨는데 遺願(유원)에 의하여 고향에 장례를 모셨다.

 庚戌(경술)년 겨울에 선친(=휘방경) 산소에 제사를 지내고 壬子(임자)년에  중대광 上洛君으로 되살리니 선친(=휘방경)의 茅土(:봉작)을 이어 받았다.

 己未(기미)년에 또 선친(=휘방경) 산소에 배례하고 주상의 명으로 季子(계자 =막내아들) 永煦를 사신을 받들고 배행하게 하였는데, 그 사행은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至治원년 (1321) 辛酉에 재상에게 명하여 현인을 발탁하는데 公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8월에 또 보문각 대제학 상호軍을 가자하였다. 그달 21일에 병으로 누워 자택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64세이다.

 공은 성품이 敦厚(돈후)하면서 곧고 부드러우며, 마음속은 독실하면서 강인하여 孝悌와 忠信은 천성으로 타고났다.

 참으로 아깝도다! 공의 才德으로 만일 몇 해만 더 사셨더라면 이익과 은택이 어찌 만민에 미치지 않았겠으며 명예와 지위가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었겠는가. 광정대부 첨의충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 증시 문경공 휘 許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으셨는데 永暾(영돈)은 현재(*1321) 도관직랑 지합주사이고, 2남 永暉(영휘)는 현재 흥위위 보승별장이고, 3남 斯順(사순)은 삭발하고 출가하여 불도가 되어 慈惠宗 大德이고, 4남 永煦(영후)는 사헌부 지평이다.

 장녀는 입내시 중정대부 친어군대호군 鄭幘에게 시집가고 2녀는 대광 상당군 白頤正(백이정)에게 시집가고 3녀는 사인 별리가불화인 원나라 좌승상 아홀반의 아들에게 시집갔다.

 영돈 등은 이미 장지를 德水縣 馬山 위에 묘지를 점지하고 장차 장례를 지내려고 하는데 나(=민지閔漬)는 선공(=휘순)의 친구가 되기 때문에 공의 行狀을 갖추고 와서 銘을 간절히 요구하므로 내가 비록 병들었으나 세워놓고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여 銘을 쓰노라.


 銘文에 이르기를

혁혁한 충렬로

우리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마당 가득한 훌륭한 제자들

모두가 뛰어나 명성을 겨루네.

白眉는 막내라

당시 가장 훌륭하다며

집안의 존귀에 한이 된 건

등과에 들지 못한 것.

公은 그 뜻을 받아

科場에 뜻을 확고히 하여

대대로 전해오는 조상의 법도대로

때때로 錦囊에 힘썼네.

젊은 나이에 을과급제로

이름을 사방에 떨쳐

臺閣에서 경력을 나타내고

스며든 誥命에는 향기 머금었네.

한번 文柄을 틀어쥐니

桃李같은 후배가 줄을 지어

부모의 기쁜 눈물

축수의 술잔에 흘러넘쳤네.

눈앞에 절을 올리는 재상

검은 수염에 높은 관복

영화와 효도에 힘을 다하여

매우 애달파하는 고향사람들.

자식된 도리에 흠이 없어

마땅히 많은 상서로움 내려

만년에 한가로이 은퇴하니

하늘 뜻 그대로이네.

茅土<봉작>을 끝까지 전하여

집안이 다시 빛나

時政에 참여 않고

9년을 헛되이 보냈네.

잠시라도 최고품계에 올랐으면

백성편안하고 나라 안정했을 걸

어찌하여 돌아갈 나이도 아닌데

갑자기 신선의 짐을 꾸렸나.

공에게는 유감이 없겠지만

나라에는 손상이라

이에 銘을 새기니 번쩍번쩍 빛나며

바라건대 끝없이 다다르기를.....


대원 지원 원년 신유 10월 14일.

선수조열대부 한림직학사 삼중대광검교첨의정승 우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 여흥군 閔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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