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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_묘갈문번역] 현토원문 병기를 지우고, 국한문으로 번역문만을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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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회 작성일08-01-17 19:56 조회1,847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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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重大匡 判三事 寶文閣 大提學 上護軍 金恂 墓誌銘幷序

옛날 이른 바 君子는 德行을 이름인가? 功勳을 이름인가? 내가 말한다. 오직 德行뿐이지 功勳이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德行은 마음에 달려 있고, 功勳은 時機에 달려 있으니, 마음에 달린 것은 사람이 닦는 것이지만 時機에 달려 있는 것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니 사람이 닦을 것을 닦는 자가 君子일 따름이다. 무릇 德行은 忠孝에서 비롯하니 忠孝로 當世에 떨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우리 判三事 相君(金恂公)이 계실 뿐이다. 公의 諱는 恂이요 字는 歸厚이다. 世系는 新羅王 金傅에게서 나왔으니, 內孫으로 三韓壁上功臣 司徒亞父 三重大匡 金宣平公이 계시며 金傅의 15代孫이 되시며 安東府가 그 貫鄕이다. 曾祖의 諱는 敏成이니 左僕射에 追封되셨으며 行掌冶署丞兼直史舘이시라 祖의 諱는 孝印이니 追封中書令 行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舘修撰官 知制誥시라 考의 諱는 方慶이니 元의 皇帝로부터 中奉大夫 管高麗軍都元帥 推忠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司使 典理司事 上將軍 上洛郡 開國公을 宣授하시니 食邑一千戶에 實封三百戶요 高麗에서 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을 贈職하신 忠烈公이라 母는 朴氏니 中書舍人知制誥인 朴益旌의 따님으로 陰平郡夫人에 封해졌다. 公은 붓글씨에 능하여 碑文을 많이 쓰셨다. 나이 열다섯에 門蔭으로 入仕하여 掌牲署丞이 되었다가 뒤에 別將으로 御牽龍行首가 되었다. 職務는 비록 東西로 달렸으나 그 뜻은 항상 大科에 있었으니 대개 嚴君이 비록 지위는 두 임금의 將相에 이르렀으나 오직 桂籍에 오르지 못한 것을 恨으로 여기시고 아들이라도 할아버지의 偉業을 回復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公이 이 때문에 힘써 공부하고 게을리 아니하니 至元十六年 己卯年 春場에서 단번에 金榜의 副長元이 되었다. 이 해에 처음에는 攝郎將을 제수했다가 뒤에 다시 國學直講이 되었으니 이는 공이 父親의 남긴 恨을 풀어낸 것이다. 이로부터 父親께서 더욱 막내인 公을 사랑하여 항시 左右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고 上國(元)에 賀正할 때에도 늘 따르게 하셨다. 다만 日本을 征罰할 軍船에 오르는 것은 따르는 것을 許諾하지 아니하였는데, 從軍하여 危險한 일에 參與치 않게 하심이다. 公이 이에 出戰의 命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戰艦에 올랐는데 자못 아버지를 지키고 구한 功이 있었다. 이는 公이 오직 忠孝에 專一하여 奮鬪하고 自身을 돌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壬午年에 殿中侍史로 옮기고 다음해에 외직으로 尙州判官이 되었는데 政事의 名聲이 朝廷에 올라가 一年이 못되어 내직인 典法佐郞□ □通禮門事 考功正郞이 되었다. 壬戌年에 南方使로 父親을 陪行하여 故鄕에서 할아버지 墓所에 參拜하였다. 戊子年에 秘書少尹 知通禮門事에 除授받고 이해에 임금께서 公을 世子府 行李別監으로 삼아 師傅의 責任을 맡기셨다. 壬辰年에 朝顯大夫 典法摠郞 知制誥가 加添되고 여러번 옮겨 少府尹□□□學 軍簿摠郞 典理摠郎 朝奉大夫 秘書尹 三司右尹가 되니 모두 三字銜곧 奉朝賀를 겸하였다. 元貞乙未년 겨울에 知貢擧로 선발한 이들은 모두 當時의 名士들로 크게 잔치를 여니 □□□□士 朝野의 輿論이 感歎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부친에게 극진한 효도이다. 이해에 朝議大夫가 加添되었다. 丙申年에 世子舍人을 兼職하였다. 大德丁酉年에 國學典酒로 옮기고 또한奉烈大夫 密直使 右副承旨가 더해졌고 곧바로 左副承旨 寶文閣直學士로 옮겼다. 다음해 右承旨 知版圖司事가 더해지니 매양 옮길때마다 奉朝賀를 겸하였다. 이해 봄에 南方使를 하고 돌아오니 通議大夫 光政副使 承旨 成均祭酒를 내리고 다시 正議大夫 集賢殿學士 左散騎常侍가 되었다. 이해 七月에 다시 密直司 右承旨 國學祭酒 寶文閣學士 知民曹事가 되었고 奉朝賀는 유지하였다. 八月에 奉翊大夫 三司左使 崇文舘學士가 더해지고 九月에 다시 正獻大夫 密直司 左承旨 判秘書寺事 充史舘 修撰官 知制誥 知軍簿司事가 더해지고十二月에 奉翊大夫 密直司副使 文翰學士를 除授하였다. 己亥年에 그칠 때를 알아 退職을 청하였다. 이듬해 八月에 부친이 돌아가시니 遺言대로 故鄕에 葬禮하였다. 庚戌年 겨울에 先公의 墓에 祭祀를 치렀다. 壬子年에 임금께서불러 重大匡 上洛君을 삼고 先公의 茅土(爵土)를 물려받았다. 己未年에 다시 先公의 墓에 參拜하였다. 임금께서 막내 永煦를 奉使官으로 陪行케하니 그 行路를 重히 여겼기 때문이다. 至治元年 辛酉年에 賢明한 宰相을 뽑고자 함에 公이 判三司事에 拔擢되었다. 八月에 寶文閣大提學 上護軍이 더해지고 이달 21일에 病患으로 私邸에서 돌아가시니 享年 六十四이다. 公의 性稟은 敦厚 溫柔하고 內實은 굳세셨으며 孝悌忠信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왔다. 안타깝다. 公의 才德으로 몇 년만 더 사셨다면 어찌 利澤이 만백성에게 미치지 않았겠으며 名位가 여기에 그칠 뿐이리오. 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文敬公의 諡號가 내려진 許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四男三女를 낳았다. 永暾은 지금 都官直郞知陜州事가 되었고 永暉는 지금 興威衛保勝別將이 되었고 思順은 머리를 깎고 慈恩宗 大德이 되었고 永煦는 司憲持平이 되었다. 따님은 첫째가 入內侍中正大夫親禦軍大護軍 鄭幘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大匡上黨君 白頤正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舍人別里哥不花하니 大元左承相 阿忽反의 아들이다. 永暾等이 德水縣 馬山에 葬地를 정하고 내가 先公의 親舊라 하여 公의 行狀을 갖춰 와서는 墓碣文을 청함이 매우 懇切하니 내 비록 病中이나 차마 굳이 拒絶하지 못하고 짓노라. 銘文에 이른다. 偉大한 忠烈公은 우리 나라의 郭汾陽이로다 / 집안 가득 뛰어난 子孫이 나란히 재주를 뽐내는 중에 / 뛰어난 막내(金恂公)를 당시에 가장 어질다 하였네 / 아버지 섭섭함은 科擧及第가 없음이라 / 公이 그 뜻 받들어 科擧를 準備하였네 / 할아버지 家法을 傳受하여 때때로 詩文을 본받더니 / 젊은 나이에 2등으로 及第하여 名聲을 四方에 떨쳤네 / 臺閣의 重職을 歷任하며 쓰신 글마다 香氣로왔다 / 한 번 文柄을 잡으니 門下의 人材가 成行하였네 / 父親의 기쁜 눈물에 넘치는 술잔으로 長壽를 冀願하며 / 父親 生前에 宰相에 除授되고 金章에 記錄되었구나 / 孝道의 榮光을 힘쓰니 故鄕사람들도 애달파하도다 / 자식의 道理 흠이 없으니 온갖 상서로움 내리도다 / 늘그막에 退職하니 하늘의 뜻 아득하도다 / 父親의 功臣田을 傳承하니 家門의 榮光이로다 / 政事에 參與하지 않고 아홉 해를 보내다가 / 잠시 最高 宰相에 오르니 나라와 百姓이 平安했네 / 어찌 가실 때도 아니온데 급작스레 저승길을 재촉하셨소 / 公께서야 아쉬울게 없지만은 나라에는 傷心일세 / 碑石에 功勳을 새기니 無窮히 미치리라

大元至治元年 辛酉年十月十四日에 宣授朝列大夫 翰林直學士 三重大匡 檢校僉議政丞 右文舘大提學 監春秋舘事 驪興君인 閔漬가 짓다.

※졸역 : 儒林學堂(hanja4u.com.ne.kr) 主人 金國會

문영공 김용주님의 요청에 따라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문만을 정리해 올립니다. 內孫은 번역문에 그대로 內孫으로 명기하였습니다. 만일에 오역했을 가능성이 있기에,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內孫으로 번역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댓글목록

김좌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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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신)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에 대한 내손(內孫)문제를 다루며 예전에 어느분은 아에 삭제를 해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묘지명에 나온 글을 임의로 넣고 빼면 절대로 안됩니다. 이번 새로운 묘비를 세우면서 녛기는 넣테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살리기만 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즉 김문의 손 가운데는 삼한벽상공신.......김선평이 있다. 가 좋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생각은 다릅니다. 내손이라는 문구를 빼거나 풀어서 표기할 사항이 아닙니다. 원어 그대로 內孫은 살려서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국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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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말씀대로 저도 섣부른 판단으로 오역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원문을 보존하고 번역도 內孫을 그대로 살려 번역해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위 번역문에 '內孫'을 그대로 살려 두었습니다.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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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님 고맙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