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손'을 규명하기 위한 관련된 신구안동김씨 선세 탐구[추정근거 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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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회 작성일08-01-17 18:07 조회2,127회 댓글2건본문
*구안동김씨 : 평장사 김숙승을 시조로 모심
*신안동김씨 : 태사공 김선평을 시조로 모심
1. 구안동김씨의 선세 추적
(01세) 金閼智 → (02세) ①勢漢 → (03세) ①阿道 → (04세) ①首留 → (05세) ①郁甫 → (06세) ①仇道 → (07세) ①末仇 → (08세) ①奈勿王 → (09세) ②卜好 → (10세) ①習寶 → (11세) ①智證王 → (12세) ③眞宗 → (13세) ①欽運 → (14세) ①摩次 → (15세) ①法宣 → (16세) ①義寬 → (17세) ①魏文 → (18세) ①孝讓 → (19세) ①元聖王 → (20세) ④禮英 → (21세) ②均貞 → (22세) ①神武王 → (23세) 文聖王 → (24세) ①安 → (25세) ①敏恭 → (26세) ①實虹 → (27세) ②孝宗 → (28세) 敬順王 傅 → (29세) ④殷說 → (30세) ③叔承 [구안동김씨 시조. 平章事]11) |
2. 신안동김씨의 선세 추적
(01세) 金閼智 → (02세) ①勢漢 → (03세) ①阿道 → (04세) ①首留 → (05세) ①郁甫 → (06세) ①仇道 → (07세) ①末仇 → (08세) ①奈勿王 → (09세) ②卜好 → (10세) ①習寶 → (11세) ①智證王 → (12세) ③眞宗 → (13세) ①欽運 → (14세) ①摩次 → (15세) ①法宣 → (16세) ①義寬 → (17세) ①魏文 → (18세) ①孝讓 → (19세) ①元聖王 → (20세) ④禮英 → (21세) ①憲貞 → (22세) ①僖康王 → (23세) 啓明 → (24세) ①景文王 → (25세) ①憲康王 → (26세) ①孝恭王12) → (27세) ①宣平 [신안동김씨 시조. 太史公] |
신안동김씨는 고려 태조로부터 삼태사로 태사공을 받은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데, 그 선대 기원에 대해서는 고증된 바가 없다. 다만 태사공 김선평(901-?)에 대하여 신라 효공왕(孝恭王) 5년(서기 901년)에 흥덕궁(興德宮)에서 태어나셨다(신안동김씨 족보) 하였다.
그렇다면 김선평은 어떻게 901년에 흥덕궁 안에서 태어날 수 있었을까?(신안동김씨기록) 또한 경애왕 피살 당시(927년) 28살의 젊은 나이에 고창(古昌 ; 본래 고창녕국(古昌寧國)의 땅이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고령군(古寧郡)으로 고쳤다가, 고려 태조 13년(930년)에 삼태사의 공으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영가군(永嘉郡)으로 개명됨) 성주가 되어 있어, 경애왕이 견훤에게 피살되었을때(927년) 분연히 일어나 고려태조를 도와 3년만에 견훤을 물리치고 삼태사로 임명되는 결정적인 공을 세울 수 있었을까? 삼태사가 고려대조 13년(930년)에 논공행상하면서 견훤을 물리친 공으로 김행(金幸;안동權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안동장씨의 시조)과 함께 김선평(안동김씨의 시조)을 고려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보공신 태사(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에 봉하고 이때 고창군이 안동부로 승격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할 때 그 연대가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연대로보나 김선평의 아버지는 바로 효공왕(신라의 제52대 왕 : 재위 897∼912)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른 왕의 아들일 가능성을 찾아보았지만, 효공왕의 선대는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은 태어난 시기와 동떨어져 있고, 제50대 정강왕(재위886∼887)은 재위 2년만에 후사없이 죽어 누이동생인 제51대 진성여왕(재위 887∼897)에게 왕위가 이어졌으므로 901년 당시의 신라 군주인 효공왕을 제외하고는 궁내에서 출산할 만큼의 김씨 근친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효공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53대 신덕왕은 박씨로서 효공왕이 후사가 없기 때문에 왕으로 즉위하였다고 한다. 후사가 없다는 효공왕에게 태사공 김선평이 아들일 수 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신덕왕의 뒤를 이은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은 모두 신덕왕의 두 아들로 당연히 박씨이다. 따라서 김선평은 이들과는 혈통적으로 무관하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효공왕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효공왕은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의 서자인데, 50대 정강왕(재위886∼887 ) 즉위 당시 역시 헌강왕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에 동생인 정강왕이 즉위하였다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후사가 없다'는 말은 후사가 아예 없다는 말이 아니라, 왕위를 물려받을 정도로 성숙한 왕자가 없거나 아직 어려서 태자로 임명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53대 신덕왕의 즉위 사유에 52대 효공왕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더라도, 효공왕에게 아들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김선평이 효공왕의 아들이라 할 지라도, 적자가 아닌 서자였거나 효공왕이 죽을 당시에 너무 어려서 아직 태자로 임명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쩔수 없는 정황에 따라 제53대 신덕왕 박경휘(朴景暉)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고, 효공왕의 아들 김선평은 역사속에서 잊혀진 가운데, 고창(안동)성주로 임명된 것이다. 효공왕의 왕위가 자연스럽게 김선평에게 전해져야 하는데, 아직 어렸기 때문에, 아니면 서자의 한계 때문에, 왕위가 신덕왕과 두 아들 경명왕과 경애왕으로 이어졌다고 한다면, 신덕왕 입장에서 비운의 왕자 김선평에게 이에 대한 보상조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보상조치가 바로 신라의 주요 요충지인 고창(안동)성주 임명은 아니었을까?
이런 정황으로 보면 제55대 경애왕이 견훤에게 굴욕을 당하고 자결함에 따라, 신라왕실에 위기가 왔을때 김선평도 이를 좌시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물리침으로써 삼태사의 공을 세우면서 역사 기록속으로 재등장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관계를 따지고 보면 경순왕에게 왕위가 가지 않았다면 김선평에게 갈 왕위이기도 하다. 어쨌든 신라의 마지막 제56대왕 경순왕(재위 927년 - 935년)이 즉위하면서 박씨로 넘어갔던 왕위가 김씨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나 불과 8년만에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의할 수 밖에 없었다. 15촌숙질간이자 상호간 고종사촌 내지 외사촌간이 성립되는 경순왕과 김선평이 나란히 신라왕국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경순왕은 고려 왕조에 귀부하고, 김선평은 태사공으로 공훈을 세우는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가?
위와 같은 추론을 토대로 한다면, 신안동김씨의 시조 태사공 김선평을 효공왕의 아들로 추정 가능하고, 이를 수용한다면 베일에 싸인 신안동김씨의 선세가 밝혀짐은 물론, 구안동김씨와의 혈계가 연결되는 통로를 찾는 일이 될 것이다.
3. 신구안동김씨의 교차점, 근원세계
위의 선세 추적에 근거하여 볼 때, 부계 혈족을 기준으로 하여 신구 안동김씨의 분기점은 바로 (20세) ④禮英의 두 아들인 (21세) ①憲貞[신안동]과 ②均貞[구안동]이다. 따라서 신구 안동김씨는 의당 한 선조에서 분가한 同家인 것이다.
4. ‘내손(內孫)’의 해석 문제
문영공 김순공의 묘지명에서 나온 '경순왕김부내손.(중략).김선평공'에서의 내손(內孫)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위에서 추정한 것을 토대로 하면 효공왕의 아들이 김선평이라는 전제를 인정하게 되고, 따라서 신구 안동김씨가 한 선조에서 분가한 同家가 된다. 그렇다면 구안동의 경순왕과 신안동의 태사공이 과연 얼마나 가까운 사이일까? 혈족간의 세계 계산은 구체적으로 촌으로 환산 가능하다.
(20세) ④禮英 → (21세) ②均貞 → (22세) ①神武王 → (23세) 文聖王 → (24세) ①安 → (25세) ①敏恭 → (26세) ①實虹 → (27세) ②孝宗 → (28세) 敬順王 傅 → (29세) ④殷說 → (30세) ③叔承 [구안동김씨 시조. 平章事] ※(20세) 禮英으로부터 8대 |
(20세) ④禮英 → (21세) ①憲貞 → (22세) ①僖康王 → (23세) 啓明 → (24세) ①景文王 → (25세) ①憲康王 → (26세) ①孝恭王 → (27세) ①宣平 [신안동김씨 시조. 太史公] ※(20세) 禮英으로부터 7대 |
위의 계촌으로 보면 두 사람은 상호 15촌에 해당하고 세대수가 태사공 선평이 1대 짧으므로 15촌숙(아저씨)이 되고, 경순왕 부는 1대가 더 나아갔기 때문에 15촌질(조카)이 되어 상호간에 叔姪관계가 된다. 이를 토대로 보면 ‘內孫’관계가 바로 15촌 숙질관계에 있다는 표현이 된다.
그런데 왕실의 결혼이 족친간에 이루어지면서 계촌에 혼선이 생긴다. 예를 들면 그것은 서로 족친간이 되는 바로 (25세)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가 경순왕의 아버지 (27세) 효종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경우 태사공 선평은 고모인 계아태후를 따라 계촌하면 경순왕 부와 고종 4촌간이 되고, 경순왕 부 입장에서는 모계 계아태후를 따라 계촌하면 외4촌이 될 수 있다. 위에서 이미 15촌숙질간인 사람이 족친간의 결혼을 통해서 상호간 고종4촌 내지 외4촌이 되니 이를 드러내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내손(內孫)이란 이런 사정때문에 정확히 족친 관계를 밝히지 못하고 이를 기휘(忌諱)하기 위한 우회적인 표현이 아닐까 싶다.
※儒林學堂(hanja4u.com.ne.kr) 金國會 頓首頓首.
댓글목록
김좌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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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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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후안동김씨는 김선평 이전의 자료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조상인지 자체 문중에서도 못 밝히고 있습니다. 동 문중에서도 효공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선안동)가 추측해서 효공왕을 가정해서 15촌 14촌 하는 것은 신뢰성이 떨어집니다.
김국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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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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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물론 저의 陋見이 그러할 뿐이니 확증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