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공묘지명 번역 수정 1(전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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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회 작성일08-01-16 17:41 조회2,110회 댓글10건본문
*각주1) 내손(內孫) 문제를 다시 보강하였습니다. 내손 관련 신구안동김씨 선세탐구 게시물과 함께 보시면 좋겠습니다. 유림학당 김국회.
高麗國三重大匡上洛君諡文英安東金公恂之墓
重大匡判三事 寶文閣大提學上護軍 金恂 墓誌銘 幷序
古所謂君子者는 德行云乎哉아 功業云乎哉아 予曰惟德行耳요 非功業也라 何也오 德行은 在心하고 功業은 在時하니 在心者는 人所修也로대 在時者는 天所授也니 能修人之所를 可修者가 爲君子耳라 夫德行은 本乎忠孝하나니 能以忠孝로 立揚於當世者는 惟我判三司相君有焉이시라
옛날 이른 바 군자는 덕행을 이름인가? 공훈을 이름인가? 내가 말한다. 오직 덕행뿐이지 공훈이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덕행은 마음에 달려 있고, 공훈은 시기에 달려 있으니, 마음에 달린 것은 사람이 닦는 것이지만 시기에 달려 있는 것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니 사람이 닦을 것을 닦는 자가 군자일 따름이다. 무릇 덕행은 충효에서 비롯하니 충효로 당세에 떨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우리 판삼사 상군(고인을 가리킴)이 계실 뿐이다.
公의 諱는 恂이요 字는 歸厚라 系出新羅王金傅이니 內孫은 三韓壁上功臣 司徒亞父 三重大匡 金宣平公이요 爲金傅十五代孫이요 而安東府는 卽其桑梓之鄕也라
공의 휘(이름)는 순(恂)이요 자는 귀후(歸厚)이다. 세계는 신라왕 김부(金傅)에게서 나왔으니, 내손(內孫1))으로 삼한벽상공신 사도아보 삼중대광 김선평(金宣平)2)공이 계시며 김부(金傅)의 15대손이 되시며 안동부는 곧 그 집안의 관향(貫鄕)이다.
曾祖의 諱는 敏成이니 追封左僕射 行掌冶署丞兼直史舘이라
증조의 휘(이름)는 민성(敏成)이니 좌복야에 추봉되셨으며, 행장야서승겸직사관이시다.
祖의 諱는 孝印이니 追封中書令 行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舘修撰官知制誥라
조부의 휘(이름)는 효인(孝印)이니 중서령에 추봉되셨으며, 행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이시다.
考의 諱는 方慶이니 宣授中奉大夫 管高麗軍都元帥 推忠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司使 典理司事 上將軍 上洛郡 開國公하니 食邑一千戶에 實封三百戶라 贈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하신 忠烈公이라
부친의 휘(이름)는 방경(方慶)이니 원의 황제로부터 중봉대부 관고려군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전리사사 상장군 상락군 개국공을 받으셨으니 식읍이 1000호에 식실봉은 300호이다. 고려왕으로부터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에 증직되신 (시호는) 충렬공이시다.
母는 朴氏니 中書舍人知制誥인 諱益旌之女로 封陰平郡夫人이라
모친은 박씨니 중서사인 지제고인 (박)익정의 따님으로 음평군부인에 봉해졌다.
公以善書로 多寫碑文이라 年方志學하고 以門蔭으로 入仕하여 爲掌牲署丞이라가 後改爲別將하여 御牽龍行首라 職雖從東至西나 其志는 未嘗不在文學이니 盖嚴君이 雖位極兩朝將相이나 惟以未參桂籍으로 爲恨하시고 冀嗣子之能復祖業故也라 公이 由是로 力學不倦하여 至至元十六年己卯春場하여 一擧에 爲金榜副元이라 是年에 初拜攝郎將이라가 後改爲國學直講하니 此公之能伸大人之遺憤者也라
공은 붓글씨를 잘 쓰셔서 비문을 많이 쓰셨다. 15세 즈음에 문음으로 벼슬길에 들어 장생서승3)이 되었다가 나중에 별장4)으로 어견룡행수가 되었다. 직무는 비록 동에서 서로 이르렀지만 그 뜻은 일찍이 글공부(문과 과거)에 있었으니, 부친께서 비록 지위는 두 임금5)의 재상 반열에 올랐으나 다만 문과에 급제하지 못함을 한으로 여기시고 아들이 할아버지의 위업을 회복하기를 바라신 까닭이다. 공이 이 때문에 힘써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더니 지원 16년 기묘년 춘장(봄 과거)에 이르러 단번에 대과의 부원(2등)이 되었다. 이해에 처음에는 섭낭장6)에 제수되었다가 뒤에 다시 국학직강7)이 되었으니 이는 공이 부친의 남긴 한을 풀어낸 것이다.8)
自是로 先公이 益推偏季之恩하여 常令不離左右하시고 賀正上國에 無不令隨러시다 但其東征船上 不許追陪者는 不從軍叅9)危事也러라 公이 於是에 扈駕不待命而先登戰艦하니 頗有扶衛救援之功이라 是公惟專忠孝而奮하고 不顧身者也러라
이로부터 부친께서 더욱 막내(고인)를 사랑하여 항시 좌우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고 상국(元나라)에 하정할 때에도 항시 따르게 하셨다. 다만 일본을 정벌할 군선에 오르는 것은 따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종군하여 위험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심이다. 공이 이에 호가(扈駕)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전함에 올랐는데 자못 아버지를 지키고 구한 공이 있었다. 이는 공이 오직 충효에 전일하여 분투하고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壬午에 遷殿中侍史하고 翌年에 出爲尙州判官하니 政聲登聞하여 未一年하여 而入爲典法佐郞□□通禮門事考功正郞이라
임오년에 전중시사로 옮겼다가 다음해에 상주판관10)으로 외직으로 나갔는데 정사의 명성이 임금께 알려져 일년이 안되어 내직으로 전법좌랑 □□통례문사11) 고공정랑12)이 되었다.
壬戌에 奉使南方하여 爲陪先公하여 拜祖墓於桑鄕也라
임술년에 봉사남방으로 부친을 모시고 고향땅에서 조부의 묘에 참배하였다.
戊子에 除秘書少尹 知通禮門事라 是年에 上命公爲世子府 行李別監하여 委以師傅之任이라
무자년에 비서소윤13) 지통례문사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임금이 공을 세자부 행리별감으로 삼아 사부의 소임을 맡기셨다.
壬辰에 加朝顯大夫 典法摠郞 知制誥하고 累遷하여 少府尹□□□學 軍簿摠郞 典理摠郎 朝奉大夫 秘書尹 三司右尹하니 皆兼三字라
임진년에 조현대부가 더해져서 전법총랑 지제고14)를 지내고 여러 번 옮겨 소부윤 □□□學 군부총랑 전리총랑 조봉대부 비서윤 삼사우윤을 지냈으니 모두 봉조하(국가 대사에 조복을 입고 참여하는 예우를 받음)를 겸하였다.
元貞乙未 冬에 同知貢擧所取는 皆當時名士로 大開綺席하니 □□□□士 朝野莫不嘉歎하니 是先公之極於榮孝者也라 是年에 加朝議大夫라
원정 을미년 겨울에 지공거(과거시험 시험관)로써 뽑은 이들은 모두 당시의 명사들로 크게 잔치를 여니 □□□□士 조정과 민심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는 선친께 효도의 영광으로 지극한 것이다. 이 해에 조의대부가 더해졌다.
丙申에 兼世子舍人이라
병신년에 세자사인을 겸직하였다.
大德丁酉에 遷國學典酒하고 又拜奉烈大夫 密直使 右副承旨하고 驟遷左副承旨 寶文閣直學士러라
대덕 정유년에 국학전주로 옮기었다가 다시 봉렬대부 밀직사 우부승지에 제수되었고 곧바로 좌부승지 보문각 직학사로 옮겼다.
翌年에 加右承旨 知版圖司事하니 每遷에 皆兼三字라 是年春에 奉使南方하여 旣還하니 改授通議大夫 光政副使 承旨 成均祭酒하고 又改爲正議大夫 集賢殿學士 左散騎常侍하니 是年七月에 復爲密直司 右承旨 國學祭酒 寶文閣學士 知民曹事하니 依前三字라 八月에 加奉翊大夫 三司左使 崇文舘學士하고 九月에 又改爲正獻大夫 密直司 左承旨 判秘書寺事 充史舘 修撰官 知制誥 知軍簿司事하고 十二月에 拜奉翊大夫 密直司副使 文翰學士라
다음해에 우승지 지판도사사15)가 더해지니 매번 옮길 때마다 봉조하를 겸하였다. 이해 봄에 봉사남방하였다가 돌아오니 통의대부 광정부사 승지16) 성균좨주17)로 제수하고 또한 정의대부18) 집현전학사 좌산기상시로 바꾸더니 이해 7월에 다시 밀직사 우승지 국학좨주 보문각학사 지민조사19)가 되니 봉조하는 전대로 유지하였다. 8월에 봉익대부20) 삼사좌사 숭문관학사를 더하고 9월에 다시 정헌대부21) 밀직사 좌승지 판비서시사22) 충사관 수찬관23) 지제고 지군부사사가 되었고 12월에 봉익대부 밀직사부사24) 문한학사를 제수하였다.
己亥에 知止하여 乞退라
기해년에 그칠 때를 알아 퇴직을 청하였다.
翌年八月에 先公이 棄世하시니 依遣囑하여 葬于桑梓라
다음해 8월에 부친께서 돌아가시니 유언에 따라 고향땅에 장례하였다.
庚戌冬에 行祭于先公墓라
경술년 겨울에 부친의 무덤에 제를 올렸다.
壬子에 起爲重大匡 上洛君하여 承襲先公之茅土라
임자년에 (임금께서) 불러 중대광 상락군이 됨에 부친의 공신전을 이어 받았다.
己未에 又拜先公墓라 上命季子永煦奉使하여 以陪行하니 所以重其行也라
기미년에 다시 선공 무덤에 참배하였다. 임금이 막내아들 영후를 봉사로 명하여 모시게 하였으니 (임금께서) 그 원행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至治元年 辛酉에 命相以賢하니 擢公爲判三司事라 八月에 加寶文閣大提學 上護軍이라 至是月二十一日하여 寢疾로 卒于第하시니 享年六十四라
지치 원년 신유년에 어진 이로 재상을 뽑고자 하니 공을 발탁하여 판삼사사25)로 삼았다. 8월에 보문각 대제학 상호군26)이 더하여졌는데, 이달 21일에 병환으로 자택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64이다.
3) 장생서 : 제사에 사용되는 희생 제물을 관리하던 곳
7) 국학직강 : 국학인 국자감의 직강 곧 국학박사로 정7품의 문관직
11) 지통례문사 : 통례문(조회의 의례를 담당하던 부서)의 지사 곧 5품의 문관직
12) 고공정랑 : 고공사(관리의 공과를 심사하던 부서)의 정랑 곧 정5품 문관직
13) 비서소윤 : 비서성(왕의 측근에서 축문(祝文)과 경적(經籍)을 다루고, 임금의 명령을 행하는 기관인데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과 같은 관청)의 소윤으로 종4품의 문관직
14) 지제고 : 조서(詔書)·교서(敎書) 등을 지어 왕에게 올리던 관직(官職)
15) 판도사 : 고려시대에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錢糧) 등을 관장한 중앙행정관서
16) 승지 : 1275년(충렬왕) 추밀원(樞密院)을 밀직사(密直司)로 고치고, 다음해 추밀원의 승선(承宣)을 승지로 개칭하여 품계는 그대로 정3품관으로 함
17) 좨주 : 고려시대 국자감(國子監) ·성균감(成均監) ·성균관의 종3품 벼슬로 학식이 높은 사람으로 임명
18) 정의대부 : 고려시대 문산계(文散階) 중 정4품 상의 관계(官階). 충렬왕 때 정3품으로 격상됨
19) 민조 : 고려 ·조선시대에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토 및 식량과 기타 재화 ·경제에 관한 정무(政務)를 맡아보던 중앙관청
22) 판비서시사 : 비서시 곧 비서성(고려 때 축문(祝文)과 경적(經籍)을 맡아본 관청)의 판사로 정3품
23) 수찬관 : 고려시대 사관(史館:春秋館)에 두었던 관직으로, 2품 이상이 겸하던 수국사(修國史)·동수국사(同修國史)의 다음이며 한림원(翰林院)의 정3품 이하의 관원이 겸직함
24) 밀직사 : 고려시대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군기(軍機) 등을 관장한 관청.
25) 판삼사사 : 삼사(호부(戶部)와 함께 고려시대 국가재정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했던 중앙 기구)의 판사로 종1품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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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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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문영공 묘지명 번역 및 수정 작업은 이 시기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곧 묘비에 새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맞추어 정리해 주시어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상기 김선평과 관련한 <內孫>의 해석은 자의(字意)만을 가지고 번역하기 보단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야만 될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좌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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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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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많은 부문)
공의 휘(이름)는 순(恂)이요 자는 귀후(歸厚)이다. 세계는 신라왕 김부(金傅)의 손자(內孫1))인 삼한벽상공신 사도아보 삼중대광 김선평(金宣平)2) 공에게 나왔으니 김부(金傅)의 15대손이 되시며, 안동부는 곧 그 집안의 관향(貫鄕)이다.
김좌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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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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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부문)
공의 휘는 순(恂)이요 자는 귀후(歸厚)이며 신라왕 김부에서 계출하였다. 삼한벽상공신 사도아보 삼중대광 金宣平은 경순왕과 내손의 관계에 있다. 公은 김부(金傅)의 15대손이 되시며, 안동부는 곧 그 집안의 관향(貫鄕)이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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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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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님, 여러 모로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뵈었으면 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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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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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본)에 대해서,
연속 되는 국역 수정 작업에 적극 임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고 기쁩니다. 이 모두가 선조님, 곧 자신을 빛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 홈 게시판 12487 <고려시대의 묘지 제도8 -문영공의 묘지석 조사 분석> 내용 중 내손, 김선평 부분을 다시 살펴 보시고 재평가, 또는 재 해석을 바랍니다.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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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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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님 바쁘신 중에도 이러겧 빨리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함니다.자문위원 여러분들과 의논하여 부지런이 진행 시키겠 읍니다.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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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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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MIRACLE79, KO0855 CHOL CON 나의 홈. 주소입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림니다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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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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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궁금했던 내손의 의미가 이 기회에 밝혀지기를 기대합니다.
김국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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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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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손에 대한 잠정 결론을 얻었습니다. 12506번 자료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김좌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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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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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해석이 분분할 수록 묘지명 원어 내손(內孫)을 살려두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