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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약재따라 풍류여행(11)삼척 죽서루- 죽서루에 걸려있는 현판-4-記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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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8-01-16 11:32 조회1,6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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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판에는 허목(許穆)이 삼척 부사로 있던 현종 3년(1662)에 쓴 <죽서루기(竹西樓記)>가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竹西樓記  

  東界多名區 其絶勝八 如通川叢石亭 高城三日浦海山亭 䢘城永郞湖 襄陽洛山寺 溟州鏡浦臺 陟州竹西樓 平海越松浦 遊觀者 獨稱西樓爲第一 何也 盖濱海州郡 關嶺以外 東盡大海 其外無窮 日月迭出 怪氣萬變 海岸皆沙 或匯爲大澤 或矗爲奇岩 或鬱爲深松 自習溪以北 至箕城南境 七百里 大體皆然 獨西樓之勝 隔海有高峯峭壁 西有頭陀太白 嵬峨巃嵷 浮嵐積翠 岩峀杳冥 大川東流 屈折爲五十瀨 間有茂林墟烟 至樓下 層岩蒼壁千尋 淸潭修瀨 灣回其下 西日綠波 粼粼澹灩 岩壁別區 勝槪與大海之觀絶殊 遊觀者 其樂此而云云耶 考官府故事 樓不知作於何代 而至永樂元年 府使金孝宗 修廢墟起此樓 洪熙元年 府使趙貫 施丹雘 其後四十六年 成化七年 府使梁瓚 重修之 嘉靖九年 府使許確 增作南檐 又其後六十一年 萬曆十九年 府使鄭惟淸 復重修之 自太宗永樂元年癸未 至康熙元年壬寅 爲二百六十年 樓下古有竹藏古寺 有竹西之名 盖以此云 仍誌之以爲竹西樓記 今上顯宗三年壬寅 月 日

                                行都護府使許穆記


  동계(東界)에는 경치가 뛰어 난 곳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 난 곳이 여덟 곳이 있으니 곧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수성(䢘城)1)의 영랑호, 양양의 낙산사, 명주의 경포대, 척주의 죽서루, 평해의 월송포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을 유람해 본 자들이 단연코 죽서루를 제일이라 하니 무엇 때문인가. 대개 바닷가의 주군(州郡)은 관령(關嶺)을 제외하면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 있고, 그 바다 밖은 끝이 없으니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괴기(怪奇)의 변화가 무상하다. 또 해안은 모두 모래여서 혹 바다 물이 큰 못같이 선회하기도 하고 혹 기암이 우뚝 솟기도 하고 혹 무성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기도 하다. 습계(習溪)2) 북쪽 지역으로부터 기성(箕城)3) 남쪽 경계 지역까지 700리가 대체로 다 그러하지만 유독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치는 바다와 떨어져 있어 높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절벽이 있다.

  서쪽에는 두타산과 태백산이 있으니 높고 험준하여 푸른 기운이 짙게 감돌고 바위로 된 골짜기는 그윽하고 어둑하다. 또 큰 하천이 동쪽으로 흐르면서 굽이쳐 50개의 여울을 이루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무성한 숲과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은 푸른 층암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는데 맑고 깊은 소의 물이 여울을 이루어 그 절벽 아래를 감돌아 흐르니 서쪽으로 지는 햇빛에 푸른 물결이 돌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난다. 이처럼 암벽으로 된 색다른 이곳의 훌륭한 경치는 큰 바다를 구경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유람자들도 역시 이러한 경치를 좋아하여 죽서루가 제일이라고 하였던 것일까?

  관부(官府)의 고사(故事)를 살펴보아도 죽서루를 어느 시대에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락(永樂) 원년(1403:태종 3)에 부사 김효종(金孝宗)4)이 폐허화된 옛 터를 정비하여 이 죽서루를 건립하였고, 홍희(洪熙) 원년(1425:세종 7)에 부사 조관(趙貫)5)이 단청을 하였다. 그 46년 뒤인 성화(成化) 7년(1471:성종 2)에 부사 양찬(梁瓚)6)이 중수하였고, 가정(嘉靖) 9년(1530:중종 25)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 처마를 덧대어 지었고, 또 그 61년 뒤인 만력(萬曆) 19년(1591:선조 24)에 부사 정유청(鄭惟淸)7)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 대인 영락 원년(1403) 계미년(癸未年)부터 지금 강희(康熙) 원년(1662:현종 3) 임인년(壬寅年)까지는 260년이나 된다.

  죽서루 아래에는 옛날에 죽장사(竹藏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다. 이 누각이 죽서루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대개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기록하여 죽서루기(竹西樓記)로 한다.

                    현종 3년(1662) 임인년(壬寅年)  월  일

                    행도호부사 허목이 기문(記文)을 쓰다.

  

  【현판 3-2】

  이 현판에는 1921년에 죽서루를 중수할 때 이학규(李鶴圭)가 지은 중수기(重修記)가 쓰여져 있다. 이 중수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竹西樓重修記

  陟州之竹西樓 關東名樓也 古今之來游關東者 必先數八景 而此樓居八景之一 非爲結構之壯輪奐之美而然也 盖因其地之勝 西樓之名 亦著也 乖崖金守溫之記曰 北據大嶺 西臨巨川 川雲嶺月之間 其萬千之勝狀 槩可推知也 樓在千仞絶壁之上 俯臨五十川 水滙爲潭 徹底澄淸 游泳之魚 依欄而可數 儘絶景也 樓之刱造年代 文獻無徵 未得其詳 而年深歲久 上雨傍風 遂成摧棟敗椽 過者彷徨 州人咨嗟 李君範綺 熟鍊之才 被銓選之擧 出宰是郡 莅任未幾 百廢俱興 州之人士 告於李君曰 自明府下車之後 治成制定 百度修擧 而惟玆竹西樓依舊壞敗 盍於此時修繕而保存之 李君曰 保存勝蹟 雖知應行之事 而現今民力不敷 遽興土木 非所當爲 況此州之擅名 以江山之勝狀也 江山固自在 則一樓之興廢 何有也 州人事曰 玆樓之於玆州 猶人之有目 假使西施之美 若無盻兮之目 其可謂之佳人乎 玆州而無玆樓 殆同西施之無目 大爲江山之疵累 迨此民安無事之日 重修名樓 不亦可乎 李君 重違民情 乃許之 於是 各鳩略干金 仍舊結構 加以修繕 不日而工告訖 巍然畵閣 臨于川上 江山動色 草木增彩 仍說白日場於斯樓 與多士觴詠而落之 馳走千里 要余爲之記 余惟物之興廢 固有時也 此樓之壞敗 非一朝一夕 而今之州人士 前之宰是州者 非一人 而夫所謂重修者 寥寥無聞矣 今李君與民相孚 能行前人未能爲之事 而民情益呪 此樓之重新 似有待於今日矣 李君莅纔屬耳 能與民孚 非但此樓之重新 得見於今日 此州民風之重新 又當得見于他日也

                                 歲白鷄陽正之月 上澣

                                  洪陽 李鶴圭記


  삼척 죽서루는 관동의 이름난 누각이다. 예나 지금이나 관동에 놀러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팔경(八景)을 거론하는데, 이 누각이 팔경의 하나로 들어간 것은 건물의 구조가 웅장하거나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대체로 누각이 위치한 지형의 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죽서루의 명성도 또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쓴 기문(記文)에 이르기를 ‘북쪽으로는 큰 산봉우리에 의거하고 서쪽으로는 큰 시내를 마주 대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시내 위에 떠있는 구름과 산봉우리에 걸려있는 달 사이에 그 수많은 아름다운 경치는 대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누각이 아주 높은 절벽 위에 있어 오십천을 내려다보면 물이 돌아나가면서 소를 이루는데 물 속까지 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를 난간에 기대어 서서도 헤아릴 수 있으니 매우 아름다운 경치이다.

  누각을 창건한 연대는 찾아볼 문헌이 없어 상세히 알 수 없지만, 세월이 오래되다보니 지붕은 비를 맞고 벽은 바람을 받아 결국 마룻대가 부러지고 서까래가 썩게 되어 지나가는 나그네들은 방황하고 고을 주민들은 탄식해 왔다. 그런데 이군(李君) 범기(範綺)가 숙련된 재주로 관리 선발 시험에 합격하고는 삼척군 군수로 왔는데, 부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쇠퇴한 것이 모두 다시 흥성해졌다. 이에 고을 인사들이 이군(李君)에게 이야기하기를 ‘군수님이 부임한 후로부터 정치가 이루어지고 법도가 바로잡혀 온갖 제도가 나아져 훌륭하게 되었습니다만 오직 이 죽서루만 옛날 모습 그대로 무너져 허물어진 채로 있으니 어찌 지금 수리하여 보존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군(李君)이 말하기를 ‘훌륭한 고적을 보존하는 것이 비록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은 알지만 지금 백성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데 갑자기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다. 하물며 이 고을이 크게 이름이 난 것은 강산의 뛰어난 경치 때문이다. 강산이 본래 모습 그대로 있으니 한 누각의 흥폐(興廢)가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고을 인사들이 말하기를 ‘이 고을에 이 누각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서시(西施)와 같은 미인이라도 만약 흘겨보는 아름다운 눈이 없다면 또한 미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고을에 이 누각이 없다면 서시(西施)가 눈이 없는 것과 거의 같아 강산에 크게 흠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편안하고 아무 일이 없는 날을 틈타서 이 이름난 누각을 중수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군(李君)이 거듭 민심과 어긋난다고 하면서도 마침내 허락하였다.

  이에 각각 약간씩의 돈을 모아 옛 모습대로 건물을 짓고는 게다가 수리까지 하였는데 며칠 안되어 완공하였다. 우뚝 높이 솟은 아름다운 누각이 냇가에 자리잡고 있으니 강산의 경치가 변한 것 같고 초목의 빛깔이 더욱 짙어진 것 같았다. 이에 이 누각에서 백일장을 열어 많은 선비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시가를 읊으면서 준공식을 거행하였는데, 천리를 달려와 나에게 기문(記文)을 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만물의 흥폐(興廢)는 진실로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누각이 무너져 허물어진 것은 근래에 있은 것이 아니고 또 지금 고을의 인사와 이전에 이 고을 지방관을 지낸 자가 많은데도 중수(重修) 이야기는 조금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지금 이군(李君)이 백성들과 더불어 서로 믿고서는 이전의 사람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어서 민심이 더욱더 희망적이 되었으니, 이 누각의 중수는 오늘을 기다린 것 같다. 이군(李君)의 지위는 겨우 하급 관리일 뿐이다. 그런데도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었으니 단지 이 누각의 중수를 오늘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고을 백성들의 습속이 거듭 새로워짐을 또한 마땅히 후일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유년(1921) 4월 상순

                           홍양(洪陽) 이학규(李鶴圭)가 쓰다       


  【현판 3-3】

  이 현판에는 1947년에 죽서루를 중수할 때 홍백련(洪百鍊)이 지은 중수기(重修記)가 쓰여져 있다. 중수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竹西樓重修記

  西樓 吾鄕舊物也 樓之刱 不知在何代 而自永樂癸未府使金孝孫修廢墟重起 至今丁亥 爲年凡五百四十五 重修凡十九 而今丁亥之役 沈基達金東錫沈基鴻池禹範朴熙昇李在鏞徐基煥之力最大 樓復翼然自如於千丈層岩蒼壁上 吾鄕愛古之心 不淺也 余嘗愛西樓之高古 月一再登登 輒不忍下 敬誦列聖朝御製及先正詩 令人心感怳然 若超嬴劉而在江沱汝漢之間 嗚呼 自眞珠觀廢 不復登斯樓也 猶不忍決忘 常往來于中 沈基達李在鏞 叩蓬門曰 子記之 余何忍辭 遂書之爲竹西樓記

                                      丁亥秋七月旣望

                                     鄕人唐城洪百鍊記


  죽서루는 우리 고을의 오래된 건물이다. 누각의 창건이 어느 시대에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락 계미년(癸未年)에 부사 김효손(金孝孫)이 황폐화된 옛 터를 정비하여 다시 건립한 이후 지금 정해년(丁亥年)까지 무릇 545년이나 되었다. 그 동안 중수한 것이 총 19번인데, 금년 정해년의 중수 공사는 심기달(沈基達)․김동석(金東錫)․심기홍(沈基鴻)․지우범(池禹範)․박희승(朴熙昇)․이재용(李在鏞)․서기환(徐基煥) 등의 노력이 가장 컸다.

  누각이 다시 날아갈 듯이 높고 푸른 층암절벽 위에 옛 모습 그대로 솟았으니 우리 고을이 고적을 사랑하는 마음이 얕지 않다. 내가 항상 죽서루의 고상한 옛 풍취를 좋아하여 달마다 한두 번 올랐는데 번번이 차마 내려가지 못하여 역대 임금들이 지은 시와 선현(先賢)들이 지은 시를 공경하여 읽으면 사람의 마음에 황홀감을 느끼도록 만드니 마치 시대를 뛰어넘어 장강(長江)․타강(沱江)․여수(汝水)․한수(漢水)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아! 슬프다. 진주관(眞珠觀)이 허물어진 이후로는 다시 이 누각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차마 결코 잊지 못하여 항상 누각에 왕래하였었는데, 심기달(沈基達)과 이재용(李在鏞)이 나의 집을 찾아와 말하기를 ‘자네가 기문(記文)을 쓰게’라고 하니 내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 이에 마침내 죽서루기(竹西樓記)를 썼다.

                              정해년(1947) 가을 7월 16일

                       향인(鄕人) 당성(唐城) 홍백련(洪百鍊)이 쓰다


【현판 3-4】


  이 현판은 1991년에 당시 삼척시장이었던 김광용(金光容)이 지은 죽서루 중수기(重修記)를 일죽(一竹) 홍태의(洪泰義)가 서각(書刻)한 것이다. 김광용이 이 중수기를 쓴 것은 1981년 10월 18일부터 1982년 12월 14일까지 약 1년간 벌어졌던 대대적인 죽서루 중수를 실질적으로 가능하도록 도와준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배려에 감사하는 삼척 시민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중수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수기(重修記)

  관동 팔경의 하나인 죽서루(보물 제213호)는 오십천 푸른 물이 감돌아 흘러 수십 길 기암절벽에 어울려진 천혜의 단애(斷崖)위에 터를 잡아 장관인데 옛부터 시인 묵객이 다투어 찾아와 시정(詩情)에 젖었던 유서깊은 곳으로 이 고장 젊은이들의 꿈과 낭만이 충만한 이상적 역사의 현장으로써 찾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토록 자랑스러운 관동의 제1루로 만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 당시 최규하 대통령께서 취임직후 경내 확장을 칙지(勅旨)함에 따라 1981년 10월 18일부터 1982년 12월 4일까지 2억 1백만 원을 들여 경내 면적을 3천 8백 1십 3평으로 확장하고 누각 개수, 화장실 신축, 평삼문(平三門) 개축, 담장 설치 등 대대적으로 중수함으로서 독특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누각과 수려한 주변경관은 세계적인 명소로 불멸의 문화유산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늦게나마 최규하 전대통령께서 배려해 준 은혜에 감사하는 삼척 시민의 뜻을 모아 이 중수기를 쓴다.

                           1991년 12월 20일

                   삼척시장 김광용(金光容) 근지(謹誌)

  

  4) 기타의 현판 


  【현판 4-1】 


  이 현판에는 1971년 죽서루 중건 시 홍종범(洪鍾凡)이 지은 상량문(上樑文)이 쓰여져 있다. 그 상량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竹西樓重建上樑文

  興替有數 聿覩百尺華構重建之辰 平陂無關 固知千層岩壁自在之地 溪山依舊 風景如新 竊惟三陟西樓 九郡南阜 金使君修廢墟重起 亶在永樂元年 李居士次板韻尙傳 盖自勝國中葉 屛鳳凰高坮 而隔滄海之觀 自成一家 依葛夜古城 而案頭陀之雄 遠照三面 浮嵐積翠 岩峀杳冥 名勝無爭 膾炙聞三千里 群湍有力 屈折爲五十川 脩瀨灣回 綠波瀲灩 鳥時行而白沙成篆 魚或躍而碧浪破紋 雲漢逈昭 回於紗籠 烟霞幷品題於玉軸 四境無事 太守風流 古寺有傳 竹藏鐘磬 庾樓夕月 縢閣朝雲 雖在官衙城頭 如入蓬萊島上 然且有形而立 焉能無年而長 夫何降雨之隤 往在白狗之祀 鄕父老胥爲嗟惜 國道郡競乃佽相 肆諏吉辰重營土圭之定 一仍舊貫 僉同堂構之謀 杞梓여樟 乃斧乃鉅 甃甓磉礎 奚탁奚磨 不日告工 如子來父 今玆衆人眼前突兀 實自徐侯心上 經營助擧 虹梁式騰燕賀

  抛梁東 鳳凰臺屹碧天東 自成一局元由此 桑海風波籠隔東

  抛梁南 三樂亭墟草沒南 昔日鄕人兄弟會 洽如晉阮北而南

  抛梁西 頭陀雄相遠臨西 凝然如涉石船坐 應是爾時來自西

  抛梁北 古城葛夜鎭堅北 一時崔相遷移 略侵掠憂 深蒙古北

  抛梁上 十二欄干碧落上 仙笛戞然 群鶴舞謠 民耕鑿渾忘上

  抛梁下 長川五十始灣下 銀刀玉尺 浮沉穩 爰得所哉魚樂下

伏願上梁之後 海波不起 溪山永淸 四野農歌繼擊壤之餘韻 一聲絃誦 保鄒魯之遺風

                                  唐城洪鍾凡 製

                         檀紀四千三百四年辛亥四月二十六日巳時上樑


  흥망성쇠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 이에 높고 화려한 구조를 가진 누각을 중건하는 날을 보게 되었지만, 누각의 온전함과 기울어짐에 관계없이 층암절벽이 제멋대로 기이하게 우뚝 솟아 있는 곳이라 시내와 산은 옛 모습 그대로이지만 경치는 새로워진 것 같음을 새삼 알겠다. 생각건대 삼척의 죽서루는 아홉 개 군(郡) 가운데 남쪽에 있는 높고 큰 누각으로서 김 부사8)가 황폐화된 옛 터를 손질하여 다시 세운 것은 확실히 영락(永樂) 원년(1403)의 일이었고, 이 거사(居士)9)가 현판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가 아직도 전해오고 있으니 대체로 고려 중엽부터 있었던 것 같다.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높은 봉황대와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경관은 원래 매우 아름답고, 뒤쪽의 갈야산 옛 성과 마주 보이는 두타산의 웅장함은 저 멀리 세 방향에서 빛나는데 푸른 기운이 짙게 서려있어 바위로 된 골짜기가 그윽하고 어둑하다. 이에 아름다운 경치로는 겨룰 곳이 없다는 평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전국에 알려졌다.

  여러 세찬 급류가 굽이치면서 오십천을 이루고는 여울을 만들며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데 푸른 물결은 번쩍번쩍 빛나고, 새들은 때때로 거닐면서 흰모래 위에 전서체(篆書體)의 글자 모양을 만들고, 물고기는 간혹 뛰어올라 푸른 물결의 무늬를 흩뜨리고 있다. 은하수가 저 멀리 밝게 빛나니 사롱(紗籠)10)에 둘러 쌓인 것 같고 연기와 노을은 아름다운 두루말이에다 품평(品評)하는 것 같다.

  온 고을이 무사태평하면 태수가 풍류를 즐겼는데 옛 절에서는 전해오는 죽장사(竹藏寺)의 종소리와 경쇠소리가 들리고, 유루(庾樓)11)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저녁달이 떠오르고, 등왕각(滕王閣)12)에서 보는 것과 같은 아침 구름이 피어오르니 비록 몸은 관아의 성 부근에 있으나 봉래도(蓬萊島)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러나 형체를 가지고 서있는 것이 어찌 무한정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지난 번 흰 개를 잡아 제사를 지내던 날 약간 내린 비에 무너져 내려 고을의 어른들이 모두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겼는데, 국도(國道) 변의 여러 군(郡)들이 곧 다투어 보조해 주었다. 이에 좋은 날을 택하여 중건을 시작하되 오로지 옛 모습대로 할 것을 물었더니 모두가 옛 모습 그대로 수리하는 계획에 찬성하였으므로 좋은 목재를 마련하여 자르기도 하고 깎기도 하고, 벽돌과 주춧돌을 깨기도 하고 갈기도 하여 며칠만에 완공하였는데 백성들이 자진해서 공사에 참여하여 도왔다.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 우뚝 높이 솟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서 군수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니 공사를 함에 도와서 거들어주었고, 들보를 올리는 의식에서는 축하의 글을 써 전해주었다.

  동쪽 들보를 올리니 봉황대(鳳凰臺)가 푸른 하늘 동쪽에 우뚝 솟았구나. 그곳이 스스로 하나의 형세를 이룬 것은 본래 이것 때문이니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풍파가 동쪽으로 보이지 않게 멀리 떨어져 있네.     

  남쪽 들보를 올리니 삼락정(三樂亭) 옛 터의 풀이 모두 남쪽으로 향하여 누웠구나. 옛날 고을 사람들과 형제들의 모임에서 화목함이 남북으로 나뉘어 살던 진(晉)나라 완씨(阮氏) 집안13) 같았네.

  서쪽 들보를 올리니 두타산의 웅장한 모습이 멀리 서쪽에 마주 보이는구나. 그 견고함이 석선(石船)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으니 마땅히 그 옛날 서쪽에서 왔을 것 같네.

  북쪽 들보를 올리니 옛 성이 있는 갈야산이 북쪽에 진산(鎭山)으로서 굳게 서있구나. 잠시 최 재상(宰相)14)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침략의 근심을 줄이고 몽고를 북쪽으로 멀리 물러나게 하였네.

  위쪽 들보를 올리니 열두 난간이 푸른 하늘에 떠있구나. 신선의 피리소리 들리니 여러 학들이 춤추고 노래하는데 백성들은 농사일에 정신이 없네.

  아래쪽 들보를 올리니 긴 하천 오십천이 굽이돌아 아래로 흐르기 시작하는구나. 은도(銀刀)15)․옥척(玉尺)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함이 평온하니 여기에서 물고기가 즐기기에 알맞은 장소를 얻었네.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후로는 바다에 파도가 일지 말고, 시내와 산이 영원히 맑아지고, 온 들녘에서 농부들이 계속 격양가(擊壤歌)16)를 부르고, 오로지 거문고 타고 시 읊는 소리만이 울려 퍼져 공맹(孔孟)의 학문을 지켜가도록 해주소서.

                     당성(唐城) 홍종범(洪鍾凡) 지음

 단기 4304년(1971) 신해년(辛亥年) 4월 26일 사시(巳時) 상량(上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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