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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구암 사실 서〔久菴事實序〕- 미암 기대래 / 강제 송치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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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26-04-22 15:59 조회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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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 사실 서 [久菴事實序] / 강제 송치규

홍주(洪州)의 노은동(魯恩洞)에는 육신서원(六臣書院)이 있다. 그 별사(別祠)에 모셔진 사람은 성 총관(成總管) 충숙공(忠肅公)이고, 나중에 차례대로 배향된 사람은 미암(薇菴) 김대래(金大來)와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이다. 금상(今上) 경인년(1830, 순조30)에 사림의 여론이 구암공(久菴公) 복한(卜僴)은 향선생(鄕先生)이면서 세 분 현자와 그 절의(節義)가 같기 때문에 원근의 사람들이 함께 도모하여 태학(太學)에 문의하고, 또 추정(秋丁)을 택해 구암공을 배향하였다. 예식이 다 끝나자 공의 여러 후손들이 공의 시문(詩文) 약간 편과 족보 서문이나 읍지(邑誌) 등 구암공과 관계된 글, 그리고 배향하게 된 전말(顚末)을 모아 하나의 책자로 합하여 사실(事實)’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장차 활자로 인쇄하여 전하려고, 후손과 원유(院儒)들이 나에게 와서 서문을 문의하였다. 공에게는 도타운 행실과 깊은 학문이 있었다. 세종 때에 천수(薦授)되어 관직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단묘(端廟 단종)가 왕위를 물려주자 관직도 버리고 자취를 감추어 세상을 떠났다. 경태(景泰, 1450~1457) 연간에 우리 조정에서 효행(孝行)이 뛰어난 사람 10인을 뽑아 명나라 조정에 아뢰었는데 특별히 정려(旌閭)를 명하고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라는 영()을 특별히 받았다. 도설(棹楔 정려문)은 지금까지도 우뚝 서 있는데 비문의 글씨는 세월이 오래된 탓에 글씨가 흐릿하게 되어 알아볼 수 없으니 수록할 수 없는 것이 대단히 애석하다. 오호라! 공은 효성으로 말미암아 천자가 표창하고 충성으로 말미암아 사림이 제사를 모셨으니, 이것은 백대 뒤에도 없어지지 않으며, 동해 바다의 외진 나라에서 태어나서 상국(上國 명나라)이 표창하는 은전을 받았으니, 실로 과거의 기록에서는 듣지 못한 것이다. 생각건대, 공의 천품(天稟)에는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점이 있으니, 학문을 바탕으로 삼은 것임을 또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 책자를 엮는 일은 서원을 드나드는 사람이 사실을 고찰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며, 공의 입장에서는 더하거나 덜 만한 것도 없다. 다만 나는 견문이 좁은 사람이니, 또 어떻게 글을 지어 서문을 쓸 수 있겠는가. 오직 공의 후손들의 정성과 근면함은 아름답게 여길 만하고 나 또한 책자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까지도 있으니, 이에 대략 이 글을 써서 돌려보낸다. 복씨(卜氏)는 면천(沔川)에서 계출(系出)되었으며, 고려(高麗) 태사(太師) 무공공(武恭公)이 비조(鼻祖)이고 공은 10대 후손이 된다. 지금 글을 청하는 사람은 공의 13대 후손 문흠(文欽)이다.

송치규 강제집(剛齋集) 

 

7. 구암사실서(久菴事實序) 

洪州之魯恩洞有六臣書院其享于別祠者成總管忠肅公而先後追腏者金薇菴大來朴駱村忠元也今上庚寅士論以久菴卜公僴是鄕先生而與三賢者同其節義遠近合謀詢于太學以其秋丁又追腏焉禮旣成公諸後孫取公詩文若干篇及譜序邑誌諸文字之關于公者及腏享顚末合爲一冊子而名之曰事實將以活字印出傳示後承及院儒來問序於余蓋公有篤行邃學世宗朝薦授官至掌令端廟遜位遂棄官遯跡以沒世景泰年間本朝以孝行卓異十人奏聞天朝特蒙命㫌立碑紀蹟棹楔至今巋然而碑文字畫歲久漫漶不可辨故不能收錄甚可惜也嗚呼公以孝則天子表章之以忠則士林俎豆之是可以不朽於百世而生左海之偏邦蒙上國之褒典實往牒之所未聞也公之天稟想有邁倫者而其所以資於學亦安可誣也然則是編之成不爲無助於出入書院者之考實而在公無足以加損顧余荒拙又何以措辭而爲之序惟公後承之誠勤可嘉余亦有托名之榮焉遂略書此以歸之卜氏系出沔川高麗太師武恭公其鼻祖而於公爲十世今請文者公之十三世孫文欽也/ 剛齋集 卷五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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