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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미암 김공 묘지명 (서문을 포함함) - 미암 김대래 / 성담 송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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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26-04-22 15:57 조회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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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 김공 묘지명 (서문을 포함함) / 성담 송환기

지난날 단종(端宗)께서 왕위를 물려주셨을 때, 조정 신료들의 곧은 충성과 탁월한 절개는 손가락을 꼽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훗날 그 자취가 혹 묻히거나 어두워져 전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미암(薇菴) 김공(金公) 같은 분이 바로 그러하다. 공은 평성(枰城)의 보개산(寶蓋山)에 은거하며 스스로 정결함을 지키다 생을 마치셨다. ! 이곳 벽지산(碧芝山) 어령리(魚寧里) 갑좌(甲坐)의 언덕이 바로 공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공의 휘(이름)는 대래(大來)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 상락군개국공 휘 방경(方慶)이 중시조이며, 그가 휘 선()을 낳으니 전법사 판서였고, 그가 휘 승용(承用)을 낳으니 보문각 대제학으로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휘 구()는 감찰사 장령이었고, 조부 휘 천순(天順)은 밀직부사였다. 아버지 휘 담()은 통례문 봉례랑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정종(定宗) 17(1417), 공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세종(世宗) 26(1444), 임금께서 "아직 궁궐 밖으로 나가지 않은 종친(대군과 군들)은 마땅히 미리 교육해야 한다"라고 하시며, 집현전에 명하여 문장과 행실을 겸비한 자를 가려 스승으로 삼게 하셨다. 모두가 말하기를 "생원 김대래는 학문이 이미 정밀하고, 또 효행으로 조정에 이름이 알려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다시 승정원에 물으시니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교관(敎官)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공은 당시 결성(結城)에서 어머니를 모시며 정성을 다해 봉양하고 있었다. 조정의 명이 내려지자 의리상 머물러 있을 수 없어 곧 길을 떠나 조정으로 나아갔다. 수개월이 지나자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 사람의 효성을 아는데, 부모와 떨어진 지 오래되었으니 어찌 부모를 봉양할 시간이 아깝지 않겠는가"라고 하시며, 관직을 교체해주어 부모를 맞이해오도록 허락하셨다. 공은 이에 역말을 타고 돌아가 어머니(태석인)를 모시고 한양으로 왔는데, 보는 이들 중에 이를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대 현명한 사대부들이 작별 선물로 준 시문이 매우 많았다. 충문공 성삼문(成三問)과 충정공 박팽년(朴彭年)이 모두 시와 문을 지었는데, 그 칭송함이 매우 성대하였다. 이를 통해 공의 덕망이 영세토록 전해질 것임을 알 수 있다. 만년에 문을 닫고 자취를 거두어 끝내 정절을 지킨 것은 또 어찌 그리 높고 위대한가!

다만 그 자손들이 공의 유훈(남긴 경계)에 따라 과거와 벼슬에 뜻을 끊었기에, 몇 세대 동안 가문이 떨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공의 시종일관 아름다웠던 자취가 묻혀 전해지지 않았고, 집안에 전해지는 옛 물건으로는 공이 조정에 하직하며 받은 첩자 한 장뿐이며, 생몰년조차 고찰할 길이 없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공은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현()으로 소위장군이고, 차남은 진()으로 정평부사이다. 현은 홍윤(弘胤)을 낳으니 적순부위이고, 진은 인상(麟祥)을 낳으니 장악원 정이다. 홍윤은 규()를 낳으니 장사랑이고, 인상은 인()을 낳으니 병조 정랑으로 승지에 추증되었다. 규는 여려(汝礪)를 낳았고, 인은 지사(地四)를 낳으니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여려는 양기(良驥)를 낳았고, 지사는 두 아들을 두었다.

그중 응하(應河)는 무오년(1619)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순절하여, 명나라 황제가 요동백(遼東伯)에 봉했고 우리 조정에서는 영의정에 추증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응해(應海)는 어영대장으로 병자호란 때 정방산성(正方山城)에서 충성을 다했다. 6대 이하 후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 공의 학문과 행실이 이토록 두텁고 지조와 절개가 이토록 높았음에도, 수백 년 동안 기록과 문헌이 증명되지 못했다. 옛날 우리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께서 취금헌(박팽년)과 매죽헌(성삼문) 두 현인의 서문과 시를 보고 비로소 공과 같은 어진 이가 있음을 아셨다. 비록 직접 표창하는 글을 남기지는 못하셨으나, 세상의 평론으로 그 어질음을 논한 것이 어찌 확실하지 않겠는가! 요동백(김응하) 형제의 충렬이 천고에 빛나는 것 또한 그 근본이 공으로부터 연유했음을 볼 수 있으니, , 위대하도다!

이제 공의 12대손 승운(升運)이 묘지에 명()을 새겨 불후의 기록으로 남기려 하고, 요동백의 7대손 현감 택기(宅基)와 어영대장공의 7대손 수사 수기(守基)가 각각 재물을 내어 그 일을 도우니, 밝고도 어질다고 할 만하다.

 

 

()하기를

슬프도다, 공의 높은 명망 일찍이 드러나

문명의 시대(세종조)를 만나셨네.

경전을 궁구하여 쓰임에 이르게 하니

종친들의 스승이 되셨도다.

 

 

진실하도다, 취금헌의 글과

더불어 매죽헌의 시여.

백세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오히려 증명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만년에 깊은 산에 은거하시니

그 정절을 뉘라서 알았으리.

남겨진 자취 있는 곳에

지금도 사람들 슬픔만 더하네.

 

 

이곳이 공의 그윽한 집(무덤)이니

여기에 이 명문을 새겨 두노라.

 

 

송환기(宋煥箕, 1728~1807)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성담(性潭). 송시열(宋時烈)5대손이며, 송인상(宋寅相)의 아들이다.

 

 

1766(영조 42) 진사가 되고 177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99(정조 23)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가 되고, 사헌부지평·시헌부장령·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진산군수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796(정조20)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었다. 1800(정조24)년 의정부우찬성 겸 세자이사 (議政府右贊成兼世子貳師) 품계에 제수되었다.

 

 

 

당시 심성(心性)의 변()으로 성리학계에서 논쟁을 벌일 때 한원진(韓元震)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송환기는 학덕을 겸비하여 조야의 존경을 받았으며, 문하에 많은 선비가 모여들었다. 저서로는 성담집(性潭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6. 미암(薇菴) 김공(金公)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粤在端宗遜位時廷臣之貞忠卓節指不勝僂而後來遺蹟或未免堙晦有若薇菴金公隱於枰城之寶蓋山遂自靖以終嗚呼此碧芝山魚寧里甲坐原卽其衣履之藏也公諱大來系出安東高麗上洛郡開國公諱方慶爲鼻祖是生諱愃典法司判書是生諱承用寶文閣大提學寔公高祖也曾祖諱玖監察司掌令祖諱天順密直副使考諱談通禮門奉禮郞贈戶曹佐郞定宗十七年公中生員世宗二十六年上以未出閤之宗親固當預養命集賢殿擇文行兼備者以爲師咸曰生員金大來學問旣精又以孝登名于朝上又詢于承政院亦皆以爲然於是以敎官召之公時方居結城奉慈闈盡其志物之養及朝命下義不可留卽登途趨朝居數月上曰予知某之孝於親離違之久能無愛日之情乎其許傳遞以迎公乃乘馹而還陪太碩人至京師觀者莫不榮之當世贒士大夫贐章頗多忠文成公三問忠正朴公彭年皆有詩文而所穪揚甚盛矣是可諗夫永世也若其晩歲杜門斂跡克守貞節者又何其卓偉也惟其子孫以遺戒絶意科宦以致數世不振公之始終徽蹟泯沒不傳傳家舊物有公朝謝帖一張至於生卒年月亦不可攷惜哉公有二男長曰鉉昭威將軍次曰鎭定平府使鉉生弘胤迪順副尉鎭生麟祥掌樂院正弘胤生奎將仕郞麟祥生軔兵曹正郞贈承旨奎生汝礪軔生地四贈戶曹參判汝礪生良驥承仕郞地四生二男應河殉節於戊午深河之役皇朝詔贈遼東伯我朝贈領議政謚忠武公應海御營大將丙子之亂效忠於正方山城六世以下不能盡錄嗚呼以公學行之篤志節之卓而數百載之間文獻無徵昔我尤菴文正公因醉琴梅竹兩賢之序若詩而始知有公之賢雖未及有表章之辭而其以世論其賢者亦豈不的確哉遼東伯之昆季忠烈炳烺千古者可見其有自來焉吁亦偉矣今公十二代孫升運將寘銘幽竁以圖不朽遼東伯之七世孫縣監宅基御將公之七世孫水使守基各捐財相其役其可謂明且仁焉者歟銘曰

嗟公隆望夙著際文明時窮經致用爲宗英師允矣醉琴之文與夫梅竹之詩百世之下尙可徵而不晩歲隱于深山繄貞節其誰知之遺躅所在秪今使人增悲是維公之幽堂于以寘此銘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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