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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김미암사(書金薇菴事) / 김미암(金大來)의 일에 대하여 쓰다. / 연경재 성해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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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26-04-22 16:04 조회4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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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서김미암사(書金薇菴事) / 김미암(金大來)의 일에 대하여 쓰다. / 연경재 성해응

개산(葢山)은 서해의 구비진 곳에 있는데, 미암(薇菴) 김대래(金大來) 공이 은거하시던 곳이다.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를 캤던 고사 이후로, 맑은 절개를 지닌 선비들이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자신의 자취를 감추려 할 때면 흔히 '()'자를 호로 삼아 그 뜻을 나타내곤 했다.

공은 안동 사람으로 고려의 명신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중간에 결성(結城)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태종 17(1417)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는데, 충민공(忠愍公) 박중림(朴仲林)이 동기였다.

세종 26(1444), 임금께서 집현전과 승정원에 명하여 "왕자들의 스승이 될 만한, 초야에 묻힌 인재(遺逸)를 추천하라"고 하시자, 모두가 공을 추천했다. 이에 교관(敎官)으로 임명되어 부름을 받으니, 공은 "임금의 명령을 지체할 수 없다"며 그날로 한양으로 향했다.

한양에 머문 지 몇 달 뒤, 세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대래(大來)의 효성이 지극함을 아니, 어버이를 떠나 마음 아프게 할 수 없다" 하시며 역말을 타고 내려가 어머니를 모셔오게 하셨다. 공이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한양에 이르자,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 등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시와 문을 지어 그 영광을 축하했다. 공은 본래 지방의 이름 없는 선비(布衣)였으나, 맑은 덕과 아름다운 행실로 임금의 존중과 총애를 받았으며 당대 명사들의 칭송이 이처럼 대단했으니, 그 인품을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확실한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아마도 기미를 알아채고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하여 일찌감치 세상 밖으로 멀리 벗어난 것일까? 아니면 계유정난(1453)과 갑술년(1454)의 환란 중에 연루되어 스스로 폐인처럼 지낸 것일까?

세조에게 왕위가 넘어갈 무렵,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이미 죽음으로 충절을 지켜 그 빛남이 저토록 뚜렷했다. 반면 조정이 평온할 때 최항(崔恒)이나 신숙주(申叔舟) 같은 이들은 유학과 문장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세상을 호령했다. 공이 만약 전자의 길(순절)도 아니고 후자의 길(출세)도 아니었다면, 마땅히 자신이 쌓은 바를 발휘하여 세상에 드러냈어야 했다.

그러나 공은 홀로 빛을 감추고 자취를 거두어 깊은 산과 못 사이에 숨어 살며, 세상과 소식을 끊었다. 심지어 자손들에게 "과거 공부(功令)를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몇 대 동안 가문이 떨치지 못하게까지 했다. 공이 머물던 '개산'이라는 지명도 들판의 노인들에게 물어서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를 볼 때, 공이 단종(端廟)을 위해 절개를 지켰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옛날 송시열(宋時烈) 선생께서 충신과 열사를 표창할 때 거의 빠뜨림이 없었으나, 김공에 대해서는 성삼문·박팽년의 시문을 근거로 그 '효성'만을 논하셨다. 이는 당시 문헌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제 공의 11대손 승운(升運)이 세월이 흐를수록 공의 업적이 잊힐까 두려워하여, 비석을 세워 기록하려 하고 있다. 현감 택기(宅基)와 수사 수기(守基)가 각각 재물을 내어 이 일을 돕고 있다.

내가 일찍이 생각하기를, 충절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진다. 백이와 숙제의 절개도 은나라와 주나라 교체기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수백 년이 지나 공자(夫子)에 의해 일컬어지면서 비로소 세상에 밝게 드러났다. 공의 삶이 숨겨졌다가 드러나는 과정 또한 백이·숙제의 기풍을 사모하여 닮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공의 현손(4대손)인 김응하(金應河) 장군은 명나라를 위해 싸우다 순절하여 대대로 임금의 포상을 받았고, 그 아우 김응해(金應海) 또한 동선령에서 절개를 세웠다. 이들의 뿌리가 어디인지는 공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승운 등이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정성 또한 가히 기록할 만하다.

 

 8.서김미암사(書金薇菴事) / 김미암(金大來)의 일에 대하여 쓰다. 

葢山在西海之曲薇菴金公大來所隱居也夷齊採薇以後淸節之士有不可於世而欲自晦其跡者多以薇爲號而見其志云公安東人高麗名臣方慶後中世徙結城太宗十七年擧生員試忠愍朴公仲林其同榜也世宗二十六年命集賢殿及承政院擧遺逸可師王子者皆以公對於是以敎官徵之公以爲君命不可留卽日詣京師居數月上曰余知大來孝不可使離親而慽于懷其乘傳歸迎母於是公以大夫人至京師忠文成公三問忠正朴公彭年皆作詩文榮之公下州一布衣也以淸德懿行爲人主所尊寵而一時名公詡奬甚盛者足以論其世也顧乘史罔缺考公謝事還鄕之故而無得焉豈或志在炳幾自靖而早已超然遠擧歟抑或癸甲芟夷之際有所株連而自廢也當禪授之際成朴諸公旣皆成仁炳烺如此及當朝野安樂無事時崔寧城申高靈諸人皆以儒學文章馳騁上下又如彼公若不于此而于彼則亦將發揮所蓄振耀當世而顧獨鞱光斂跡深藏山澤間漠然不與世相聞遺戒子孫勿習功令業以致數世之不振獨其所謂葢山亦憑野人遺老而得之公之爲端廟盡節無疑也昔尤菴宋先生表奬忠烈殆無遺蘊然因成朴二公詩文而只論其孝文獻無徵故也公十一代孫升運懼公愈遠而愈微將伐石而誌之縣監宅基水使守基各捐財相其役余甞謂忠烈之感人久而後益深如夷齊之節不見於殷周之際至幾百年爲夫子所稱遂章顯于世觀公之顯微之際亦可謂慕其風而似之者歟公之玄孫曰應河爲天朝殉節列聖褒奬荐降其弟應海亦樹節於洞仙嶺可以徵其源而若升運等報本之誠又可書也

硏經齋全集卷之十七 / 書事 / 성해응(成海應 : 1760(영조 36)1839(헌종 5)

 

 

 

댓글목록

김천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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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사무총장님 감사드립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미암공할아버지에 대한 귀감이 되는 미담과 연혁을 발굴하여 대종회 자료실에 올리시어 종친은 물론 후손들에게도 전해
주시려는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