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 교관(金敎官, 대래) 시권(詩卷)의 서문 / 취금헌 박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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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26-04-22 15:44 조회27회 댓글0건본문
1. 김 교관(金敎官, 대래) 시권(詩卷)의 서문 / 취금헌 박팽년
성상께서 평소에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문치(文治)를 크게 일으킨 덕에 인재(人才)를 교양(敎養)하는 법이 실제로 갖추어졌다. 국내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곳으로는 태학(太學)과 소학(小學)이 있고, 종친(宗親)을 가르치는 곳으로는 종학(宗學)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모두 경전(經典)에 밝고 행실을 잘 닦은 자를 선발하여 사표(師表)로 삼았다. 그러고도 오히려 출합(出閤)하지 않은 종친을 미리 양성하고, 내시(內侍)도 학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염려하여, 문학과 행실을 겸비한 한 사람을 선발해서 스승으로 삼고 궁중에서는 항상 칭하기를 ‘사부(師傅)’라고 하였으니, 그 임무가 막중하다 하겠다.
어느 해에 집현전(集賢殿)에 명하기를 “궁중(宮中)에 학도(學徒)가 많아서 한 사람의 교관(敎官)이 감당할 수 없으니, 마땅히 신중을 기하여 간택하도록 하라.” 하니, 모두 적합한 사람으로 생원이 한 사람 있다고 하였다. 그는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대래(大來)인데, 학문이 이미 정밀하고 또 효성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다는 것으로 건백(建白) - 원문 빠짐 -하였다. 상이 또 승정원에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적합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를 명소(命召)하였다.
선생이 이 당시에 충청도(忠淸道) 결성현(結城縣)에 살면서 모부인(母夫人)을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조정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의리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행장을 꾸려 길에 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노래와 시를 지어서 전송하였다. 조정에 온 지 두어 달이 지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모(某)의 어버이에 대한 효성을 안다. - 원문 빠짐 -모친을 두고 왔으니, 세월이 가는 것을 아까워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마를 타고 가까운 곳으로 모셔 올 것을 윤허한다.” 하였다. 이에 김공이 역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훈훈한 화기가 온 집 안에 넘쳐흘렀고 고을 사람들도 흐뭇하게 여겼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다음 모친을 모시고 오려 하자, 고을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영광스럽게 여기고 한편으로는 섭섭하게 여기면서 시를 지어 주어 작별을 하였는데, 그 시를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나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나는 공의 족손(族孫)뻘이고 동년(同年)의 자식인데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대저 사군자(士君子)라면 어느 누가 경전(經典)을 연구하고 글을 읽어서 세상에 나아가 출세하여 자신의 어버이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도(道)와 시기(時機)가 간혹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고, 재주와 운명도 흔히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 법이어서, 비록 현명한 임금이 위에 계시더라도 좌우의 신하들이 먼저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로 선뜻 임금의 문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가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재주를 간직하고 도를 품은 채로 초야에서 여생을 마치는 자가 열이면 팔구 명이 되었다. 과거법(科擧法)이 실시된 뒤로 사람들의 벼슬길 진출이 더욱 어려워졌으니, 잘 알지 못한 가운데 경쟁을 하고 한 사람의 눈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낙방하고 마는 자가 상당히 많았다. 가령 옛날의 호걸스러운 선비들을 시험 보인다 하더라도 합격할 것인지의 여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이 묘령(妙齡)의 나이에 우리 가군(家君)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과거에 응시하자, 동료들이 맨 먼저 등과(登科)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금까지 아직도 급제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어찌 밝은 시대를 만나서 위로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아래로는 자신의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공이 가정에서 행실을 닦았는데 조정에서 그를 채용하였고 집현전이 천거하였다. 상도 역시 공의 효성을 알아서 칭찬을 하였으며, 심지어 역마를 주어서 모친을 모셔 오도록 하기까지 하였으니, 녹봉으로 봉양하기가 충분하고, 대궐에 출입하게 된 것을 사림이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효성이 이 정도에 이르면 가하다고 할 것이니, 어찌 과거에 급제하는 것만 귀하다고 하겠는가. 게다가 지금 국가에서는 강경(講經)하는 법을 다시 세워서 선비들을 뽑고 있는 마당에 공이 경문에 밝은 것으로 성주(聖主)의 인정을 받았고, - 원문 빠짐 -합문 내의 종현(宗賢)들이 추대하여 스승으로 삼았으니, 경문을 공부하여 활용을 다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 하겠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일이 어찌 여기에만 그치고 말 뿐이겠는가. 공은 힘쓰도록 하시오.
1. 金敎官詩卷序
聖上雅崇儒術。文治大興。敎養人才之法實備。敎國 子弟。有大小學。敎親賢有宗學。皆選經明行備者。爲師表。猶慮未出閤之宗親。固當預養。而內侍不可無學識。擇文行兼備者一人。爲之師。宮中常稱之曰。師傅。其任重矣。某年。命集賢殿曰。宮中學徒。多非一敎官所堪。宜愼簡哉。咸以爲有生員在。金其姓。大來其名。學問旣精。又以孝登名于朝。建白。以 缺 之。上又議承政院。僉曰。允哉。於是。命召之。先生時方在忠淸道之結城縣。奉母夫人以供甘旨。一日。朝命下。義不可留。俶裝上道。鄕人咸歌詩以餞之。來朝居數月。上曰。予知某之孝於親也。缺母來。能無愛日之情乎。其許傳處以近。於是。金公乘馹以還。藹然和氣。溢乎庭闈。而薰於鄕里。將歷日侍綵而來。鄕人一榮之。一惜之。以詩別之。聯爲一卷。祈余敍之。余族孫也。且同年之子也。其敢辭諸。夫士君子窮經讀書。孰不欲立身揚名。以顯其親乎。然道與時或不相遇。而才與命喜不相謀。雖明主在上。而左右無先爲容。固不能徑入於君門者矣。由是。懷才抱道。終於巖穴者。十常八九。自科擧之法出。而人之仕進爲尤難。競於蒙昧之中。而決於一夫之目。由是。稱屈者頗多有之。使夫古之豪傑之士試之。未能必其進取也。今公於妙齡。與吾家君。同司馬試。聲名籍籍。戰藝詞場。儕輩推以爲先登。至今猶不第。人皆疑之。然所以貴科第者。豈不以遇明時。上以忠於所事。而下以孝吾親乎。今公行脩於家。而朝廷用之。集賢薦之。上亦知其孝而稱之。至賜驛騎以迎母。而祿養旣足。出入禁闈。士林榮之。人子之孝至此。亦可也。何科第之足貴哉。況今國家。復立講經之法以取士。公以明經。當聖主之知。缺閤內宗賢。推以爲師。窮經致用。此其時矣。孝於親而忠於國。奚止此而已哉。公其勉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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