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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의 생애와 행적(8)-(2007. 2. 장동익 편저. 김태홍(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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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5:29 조회1,1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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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義子) 및 막객집단(幕客集團) : 김방경의 열전에 의하면 “그러나 국사(國事)를 오랫동안 담당하고 또 (元으로부터) 金符(金符)를 받아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권세(權勢)가 일국(一國)을 기울이고 전원(田園)이 주군(州郡)에 두루 있었다. 휘하 장사(麾下 壯士)들이 내상(內廂)이라고 칭(稱)하고 날마다 그 문(門)을 옹위(擁衛)하여 권세(權勢)에 붙고 위엄을 빌려 중외(中外)에 횡행(橫行)하였지만 이를 금(禁)하지 아니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서 주목되는 것은 김방경이 1280년(충렬왕 6) 12월 일본원정과정에서 원으로부터 중봉대부․관령고려군도원수(中奉大夫․管領高麗軍都元帥)에 임명되어 금패(金牌, 金符)를 하사받아 고려군의 통솔자가 된 이래 휘하 장사(麾下 壯士)들이 내상(內廂)이라고 칭하였다는 점이다.

  내상(內廂)은 그 의미가 분명치 않으나 고려시대에 사용되고 있는 사례를 통해 볼 때 지휘관의 측근에 위치해 있었던 참모진(參謀陣)을 뜻하며,1) 현재의 군사상 편제상으로 군사령부(軍司令部)의 본부부대(本部部隊)․본부대대(本部大隊)에 속한 장교(將校)와 병사(兵士)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김방경의 내상(內廂)으로 추정될 수 있는 인물로는 삼별초 토벌 및 일본원정에 수종한 둘째 아들 김흔(金忻)․사위 조변(趙抃), 위득유(韋得儒)가 김방경을 무고할 때 언급한 의남(義男) 한휘유(韓希愈)․안적재(安迪材), 막객(幕客) 전유(田儒), 진도(珍島)연안의 선중(船中)에서 삼별초군의 직접적인 공격으로부터 김방경을 구한 군관 김천록․위사 허송연․허만지(軍官 金天祿․衛士 許松延․許萬之), 막객(幕客)으로 추측되는 나유(羅裕) 등이 있다. 이들은 위득유가 김방경이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무고했을 때 병장기(兵仗器)를 은익(隱匿)시켰다는 ‘나유(羅裕) 등 41인’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들 40여명에 속한 인물들이 김방경의 ‘휘하 장사(麾下 壯士)들이 내상(內廂)이라고 칭(稱)하고 날마다 그 문(門)을 옹위(擁衛)하여 권세(權勢)에 붙고 위엄을 빌려 중외(中外)에 횡행(橫行)’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 중 김흔(金忻)․조병(趙抃)과 같은 직계비속(直系卑屬)을 제외한 의남(義男) 한희유(韓希愈)․안적재(安迪材), 막객(幕客) 전유(田儒)의 문제는 고려시대 장군(將軍)들의 양태를 보여주는 주목되는 자료들이다. 먼저 의남(義男)의 경우는 이성(異姓)의 양자(養子)를 가리키는 의자(義子)를 의미하며 의녀(義女)에 대칭되는 개념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피수양자(被收養者)를 가자(假子)라고 하고, 수양자(收養者)를 가부(假父)라고 하는 가부자제(假父子制)는 의제적(擬制的)인 가족관계의 형성에서 나온 이성양자제(異姓養子制)이다. 이 현상은 수말당초(隋末唐初)에서 오대(五代)에 이르는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났으며, 군벌(軍閥) 또는 이에 준하는 무력집단(武力集團)이 자신의 무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수(多數)의 가자(假子)를 양성하였다. 당시 무장 또는 무력을 결집하고자 하는 자들은 각각 자신의 필요에 의해 무인(武人) 혹은 무장(武將)을 가자(假子)로 삼았고, 자기 세력의 확장을 원하는 무장(武將)은 유력자(有力者)를 가부(假父)로 삼아 가부자관계(假父子關係)를 맺어 가부(假父)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군단(軍團)을 형성하였다.2)

  이러한 의미의 가부자제(假父子制)가 고려시대에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지방분권적인 성격을 띠며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던 나말여초(羅末麗初) 시기의 호족(豪族)들 간에는 어느 정도 기능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중앙집권화의 진행에 따라 사병(私兵)이 혁파되어 가부자제(假父子制)는 소멸되어 갔을 것이지만, 무장들 사이에는 자신의 기반을 확장하기 위해 가자(假子)를 만들기도 하였을 것이고, 가부(假父)의 세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현달을 도모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의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윤관(尹瓘)과 척준경(拓俊京)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가부자관계(假父子關係)이다. 곧 윤관이 여진을 정벌할 때 여진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원한 척준경(拓俊京)에게 ‘이제부터 내가 마땅히 너를 보기를 아들과 같이 할 것이니 너는 마땅히 나를 보기를 아비와 같이하라(自今 我當視汝猶子 汝當視我猶父)’고 하였다고 한다.3) 이는 전선(戰線)에서 군사령관과 하급무관 사이에 이루어진 가부자관계(假父子關係) 형성의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며, 이후 한미한 행오(行伍)출신의 척준경(拓俊京)이 재상의 지위에 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윤관의 후광(後光)이 개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무장과 하급군관 사이에 이루어진 가부자관계(假父子關係)는 문객(門客)과 사병(私兵)을 양성하여 자신의 무력적 기반을 양성하였던 무인집권시기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곧 김준(金俊)이 고성현인(固城縣人) 박기(朴琪)를 양자(養子)로 삼았던 것,4) 임연(林衍)이 ‘늘 무인집권자 김준(金俊)을 아비라고 부르고 (김준의 동생) 김충(金冲)을 숙부(叔父)라고 불렀다(故衍常呼俊爲父 冲爲叔父)’고 하는 것,5) 등도 가부자관계(假父子關係)의 형성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풍조에 영향을 받아 김방경도 그의 휘하에 있던 군관 한희유(韓希愈)와 안적재(安迪材)를 가자(假子)로 삼아 자신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아 후원하면서 자신의 참모인 내상(內廂)으로 이용하였던 것 같다.

  다음으로 막객(幕客) 전유(田儒)와 막객(幕客)으로 추측되는 나유(羅裕)가 있는데, 막객(幕客)은 막빈(幕賓)과 같은 의미로 오늘날의 참모(參謀)를 의미한다. 고려시대의 무관들 사이에는 상하(上下)관계가 긴밀하여 논공행상․승진․처벌 등에 있어서 연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하급무관의 승진은 개인별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이의 표기(表記)를 소속된 영(領)의 지휘관인 장군(將軍, 정4품)의 인명(人名)과 함께 기재하였는데,6) 이는 군관(軍官) 사이의 연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연대 관계에 의해 장군(將軍)의 지휘 하에 있었던 하급 군관들을 자신의 막객으로 불렀던 것 같다. 그러므로 전유(田儒)와 나유(羅裕)는 김방경이 40대 중반에 장군에 임명된 이후에 그의 부하로 근무하였던 무관으로 추측된다.

  경쟁관계에 있었던 인물 : 김방경과 경쟁 관계에 있었던 인물로는 중견 관료시기의 유천우(兪千遇, 1209-1276)와 재상 시기의 조인규(趙仁規, 1227-1308)가 찾아진다. 유천우는 김방경보다 3세 연상(年上)으로 관료의 승진에 있어 한걸음 먼저 나가고 있었는데, 이들의 경쟁은 1263년(원종 4) 김방경이 어사중승(御史中丞, 종4품)으로서 인사행정권[銓選]을 장악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종4품)․좌승선(左丞宣) 유천우(兪千遇)와 반차(班次, 官品)를 다툰 사건이다.7) 이는 김방경이 유천우를 노상(路上)에서 만나 상급자로 대우하지 아니하고 마상(馬上)에서 읍례(揖禮)만을 행하다가 관료로서의 서렬[班次]를 다툰 사건이지만, 같은 관서에 재직하고 있던 두 사람이 반차를 다투게 된 것은 경쟁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천우는 과거에 급제한 후 내시(內侍)가 되었다가 김방경의 백부인 김창(金敞)의 천거에 의해 최우에게 발탁되어 정방에 들어가서 문객(門客)이 된 인물이다. 그 후 원종대에 무인집권자 김준(金俊)의 밑에서 다시 정방에 들어가 인사행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 김방경과 대립하게 되었다.8) 이로 인해 김방경의 인척(姻戚)들의 사환(仕宦)이 막히게 되었다고 하지만, 김방경은 이에 개의치 않았고 같은 해 12월 유천우의 후임으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방경은 유천우에 비해 승진이 늦어졌지만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천우를 뛰어넘어 승진하게 되었다. 또 이때 전라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유천우의 전장(田庄)을 온존이 보존하여 주었다고 한다. 김방경이 탐라의 삼별초를 토벌하고 개선하였을 때 유천우가 축하하는 시를 지어 증정한 것은9) 이를 보답하고자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조인규는 한미한 가문출신으로 역관(譯官)으로 입신(立身)하여 몽고와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급격하게 출세한 인물이다.10) 1280년(충렬왕 6) 12월 원이 일본원정을 위해 고려의 무장(武將)들에게 관작(官爵)을 내릴 때 김방경은 중봉대부․관령고려군도원수(中奉大夫․管領高麗軍都元帥)에 임명되어 고려군의 통솔자가 되었고, 조인규는 선무장군․왕경단사관․탈탈화손(宣武將軍․王京斷事官․脫脫禾孫)에 임명되어 고려왕실의 여러 사무를 담당하게 되었다.11) 조인규는 김방경보다 15세 연하(年下)로서 관료로서의 서열[班次]도 크게 뒤떨어져 있었으나 평소 김방경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1282년(충렬왕 8) 2월 3일(계사) 홀치[忽赤]가 죽판궁(竹坂宮)에서 왕을 향연할 때 왕이 남문(南門)에 행차해 있었는데, 중찬 김방경이 술에 취하여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이를 조인규(趙仁規)가 참소하여 김방경이 일시 순마소(巡馬所)에 갇히었다가 석방된 일이 있었다.12)

  이때 김방경은 수상(首相)인 첨의중찬(僉議中贊)이었는데 비해 조인규는 상장군․좌승선․지이부사(上將軍․左承宣․知吏部事)로서 3품관이었다.13) 3품관이었던 조인규가 수상인 김방경을 참소했던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양자 사이가 원만한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관료서의 경쟁관계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국왕 또는 원과의 친소(親疎)관계에 있어서 어떤 경쟁의식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양자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14) 1300년(충렬왕 26) 8월 김방경이 별세하여 안동(安東)에 귀장(歸葬)할 때 집권자[用事者]의 미움을 받아 예장(禮葬)을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15) 조인규와는 관련이 없다. 이때 조인규는 1298년(충렬왕 24)에 일어난 그의 딸 조비(趙妃, 忠宣王妃)의 사건으로 원에 잡혀가 있었고 1305년(충렬왕 31)에 귀국을 할 수 있었다.16)


1)『고려사』에 나타난 대표적인 사례로 병마사(兵馬使)의 측근인 內廂都領․指諭, 內廂左右都領, 左右內廂(지22, 禮10, 兵馬使及軍官拜坐儀), 金之岱가 從軍하다가 詩文을 통해 趙冲의 內廂이 됨(열전15, 金之岱), 金就礪가 契丹軍을 토벌하기 위해 內廂만 남겨 自衛하게 하게 나머지 軍隊는 모두 動員함, 十將軍兵․神騎․大角․內廂의 精卒을 거느리고 蒙古將帥를 만남(열전16, 金就礪), 崔坦의 內廂 吳得公이 崔坦의 陰謀를 김방경에게 密告한 것(열전17, 김방경) 등을 들 수 있다.


2) 矢野主稅,「唐代に於ける假子制について」『史學硏究記念論叢』, 廣島大學史學科, 柳原書店, 1950 ;「唐代に於ける假子制の發展について」『西日本史學』6, 1951 ; 栗原益男,「唐末五代の假父子的結合における姓名と年齡」『東洋學報』18-4, 1956.


3)『고려사』열전9, 尹瓘.


4)『고려사』열전43, 金俊.


5)『고려사』열전43, 林衍.


6) 이는 武班들의 묘지명에 잘 반영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申甫純墓誌銘(김용선,『고려묘지명집성』, 2006, p.261)을 들면 다음과 같다. “公年未弱冠從軍 二十五歲受會冲下隊正 毅宗七年壬申拜守珍下校尉 辛巳崔淸下散員 乙酉彦淸下別將”. 이는 金仲龜․鄭仁卿․趙仁規 등의 묘지명에서도 확인된다.


7) 김방경의 열전과 행장에 의하면 어사중승과 지어사대사가 모두 3품이라고 되어 있는데, 문종관제에 의하면 이들 모두 종4품으로 되어 있다. 이 시기에 이들 관직이 3품으로 승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8)『고려사』열전18, 兪千遇.


9) 兪千遇,「賀元帥金公方慶攻下耽羅」『東文選』20, 七言絶句.


10)『고려사』열전18, 趙仁規.


11)『고려사』세가29, 충렬왕 6년 12월 23일(신묘). 이후 이들 관직은 김방경․조인규 두 가문(家門)의 세습직(世襲職)으로서 이들의 후예가 원 압제 하에서 지배층으로 온존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2)『고려사』세가29, 충렬왕 8년 2월 3일(계사), 열전18, 趙仁規 ;『고려사절요』20, 충렬왕 8년 2월.


13) 조인규는 1279년(충렬왕 5) 우승선(右承宣)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상장군․지병부사(上將軍․知兵部事), 좌승선․지이부사(左承宣․知吏部事)를 거쳐 김방경을 참소한 1282년(충렬왕 8)에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으로서 재상직(宰相職)인 추밀원부사․병부상서(樞密院副使․兵部尙書)로 발탁되었다(김용선,『고려묘지명집성』, p.1120, 趙仁規墓誌銘).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의 인사행정(人事行政)이 6월(小政), 12월(大政)이 있었음으로 참소가 이루어진 2월에 조인규의 관직은 3품관이었을 것이다.


14) 양자의 경쟁관계는 이 시기에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는데, 이는 조인규의 둘째 아들 조련(趙璉)이 김방경의 손서(孫壻, 둘째 아들 忻의 둘째 사위)였음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남인국, 앞의 논문).


15)『고려사』열전17, 김방경.


16)『고려사』열전18, 趙仁規 ;『고려묘지명집성』, p.1121, 趙仁規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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