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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의 생애와 행적(8)-(2007. 2. 장동익 편저. 김태홍(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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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5:30 조회1,1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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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관계에 있었던 인물 : 김방경의 열전을 편찬한 사관(史官)이 논평한 것처럼 그는 신후(信厚)하고 기우(器宇)가 홍대(弘大)하여 소절(小節)에 구애하지 않았다고 한 점을 보아 스스로가 적대적인 인물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일본원정에서 군공(軍功)의 등급을 짓는데서 작상(爵賞)이 자못 균등하지 못해 사람들이 많이 원망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1277년(충렬왕 3) 12월에 전대장군(前大將軍) 위득유(韋得儒)․중낭장(中郎將) 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 등에 의해 원에 대한 반역(叛逆)을 도모하였다는 무고를 받아 혹독한 심문과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들 무고인(誣告人)들은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것으로 그들이 김방경에 대한 적대감을 가졌다기보다는 부원배의 홍복원(洪福源, 1206-1258)의 아들인 홍다구(洪茶丘)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

  김방경보다 32세 연하인 홍다구(1244-1291)는 원에 투항하여 요심(遼瀋)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을 바탕으로 정동도원수부(征東都元帥府)의 부원수(副元帥)․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원의 정치적 영향력을 빙자하여 고려왕조를 모해하거나 공격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에서 일어난 각종 반원사건(反元事件)에 개입하여 고려를 곤경에 몰아넣으면서 수많은 고려인민을 살상하였다. 위득유(韋得儒)에 의한 무고사건이 일어나자 김방경을 가혹하게 고문하고 고의로 사건을 확대시켜 고려의 입장을 난처하게 한 행위도 홍복원의 죽음에 대한 보복행위라고도 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스스로가 원의 관료라는 인식하에서 충성을 다하고자하는 투항민(投降民)의 애절함이 깃들여 있었을 것이다.1)

  후원관계에 있었던 인물 : 1276년(충렬왕 2) 이후 김방경은 무고(誣告)에 의해 원에 대한 반역으로 몰려 치죄(治罪)를 받을 때, 그를 적극적으로 변명해 준 인물은 찬성사(贊成事) 유경(柳璥, 1211-1289)이었다. 김방경보다 1세 연상(年上)인 유경은 문신(文臣)으로 유천우와 함께 최씨정권 하에서 정방에 들어가 정계의 핵심에 있었기에 관료의 생활에 있어서 한 걸음 앞서가고 있었다. 1258년(고종 45) 최씨정권의 타도에 참여하여 공신으로 책봉되었고, 이후 급격히 승진하여 1263년(원종 4) 12월 김방경이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종4품)가 되었을 때 참지정사(參知政事, 종2품)가 되었다.2) 그 후 아상(亞相)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으나 일시 유배되었고, 그 사이에 삼별초의 토벌을 통해 김방경이 문하시랑평장사․문하시중에 발탁됨에 따라 아상(亞相)으로 김방경의 하위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1276년(충렬왕 2) 12월 익명(匿名)의 무고서(誣告書)에 따라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해 제안공 숙(齊安公 淑)․김방경(金方慶) 등 43人이 반역의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아상(亞相)인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서 공주(公主, 忠烈王妃)에게 울면서 탄원하여 석방하게 하였고, 다음해 12월 위득유(韋得儒) 등에 의한 무고사건에도 적극 변명하여 김방경이 유배형(流配刑)에 그치도록 하였다. 김방경이 유배된 후 1278년 2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판이부사(判吏部事)를 겸임하여 총재(冢宰)가 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치사(致仕)를 하게 되어 김방경이 다시 첨의중찬으로 판이부사를 겸임하여 총재가 되었다. 이처럼 허공은 김방경과 함께 재상으로서 앞뒤를 경쟁하면서도 김방경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것이 국사(國事)와 관련된 중대사임을 인식하고서 적극 변호하여 ‘기도(器度)가 웅심(雄深)하여 능히 대사(大事)를 잘 처리하였다’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3)

  학문과 처신 : 김방경의 큰아버지 김창(金敞, 초명은 孝恭)은 조충(趙冲)․이규보(李奎報)․유승단(兪承旦) 등과 함께 무인집권 하에서 대표적인 명사(名士)의 한 사람으로,4) 박훤(朴暄)․송국첨(宋國瞻)과 함께 정방(政房)에 들어가 명성(名聲)을 떨쳤으며, 국자감시(國子監試)․예부시(禮部試)의 시관(試官)을 역임하기도 하였다.5) 또 아버지 김효인도 급제(及第)하여 병부상서․한림학사(兵部尙書․翰林學士)에 이르렀는데, 문한직(文翰職)을 역임하였던 점과 보경사원진국사(寶鏡寺圓眞國師)의 비문(碑文)을 쓴 점을 보아 문필력(文筆力)을 갖추고 있었고 서법(書法)에도 조예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가문의 형편을 통해 볼 때 김방경도 어려서부터 학문을 배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업(科業)의 준비에 힘써야 할 나이인 16세에 음서로 입사하여 다시 무반으로 관도(官途)를 바꾸었던 점을 보아 무예(武藝)나 병서(兵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무반도 일정한 학문적인 기반이 있어야 하였고, 製述業의 실시에 부가되어 실시되고 있었던 무반을 선발하기 위한 시험인 무거(武擧)에도 강예(講藝)의 시험이 요구되었다.6) 김방경도 무거(武擧)를 준비하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는 그가『손자병법』을 위시한 여러 병서(兵書)의 내용 및『춘추좌씨전』에 수록된 전법(戰法)에 관한 전고(典故)에 해박했던 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김방경이 문반으로의 과업(科業)을 준비하였다면 그의 나이 20세에 아버지의 관직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정6품)이었기에 국자감(國子監)의 사문학(四門學)에 입학할 자격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16세에 문음으로 입사할 때는 사문학(四門學)에 재학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후일『춘추좌씨전』의 내용을 숙지하고 있음을 보아 이 시기에 이를 학습했을 것이다.『춘추좌씨전』은 국자감에서 공통필수과목인 효경(孝經)․논어(論語)를 이수한 후 각종 유교 경전을 선택하여 이수할 때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예기 禮記』와 함께 이수하는 과목이다.7) 이로 보아 김방경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학습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대해서도 일정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점은 그가 전고(典故)를 많이 알아 일을 결단함에 있어 어긋남이 없었다는 점이나8) 다음에서 언급하는 그가 이승휴(李承休)에게 보낸 서장(書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의 문필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시문(詩文) 1수와 서장(書狀) 1통이 남겨져 있는데, 그 중 시문은 김방경이 63세 때인 1281년(충렬왕 7) 12월 제2차 일본원정을 마치고 귀환하는 길에 안동에 들러 지은 것으로 다음과 같다.9)


  福州 辛巳歲 東征日本 班師至福州

山水無非舊眼靑   산과 물은 어느 것이나 예대로 있어 반가워라

樓臺亦是少年情   누대 또한 바로 소년 시절에 보던 것처럼 다정하구나

可憐故國遺風在   슬프다 고국에는 옛 풍속이 남아 있어

收拾絃歌慰我行   거문고와 노래 소리를 수습하여 나의 길가는 심정을 위로하노라

   

  이 시는 칠언절구(七言絶句)로서 기구와 승구에서 고향인 복주(福州)의 자연경관인 산수(山水)와 인공물인 누대(樓臺)를 배치하고 어릴 적 놀던 곳이 변함없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낯설지 않고 반가우며 지난 추억을 떠올리기 충분한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다. 또 전구와 결구에 가서는 일본원정이란 힘겨운 여정 속에서 왕화(王化)가 제대로 미치지 못한 이국(異國)의 풍물(風物)을 보고 자기가 자란 고국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자기 조국 역시 현재는 원(元)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차마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하고 일본에 견주면서 자기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는 심정을 담고 있다. 그것이 가련(可憐)이란 표현 속에 녹아 있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그나마 고품격 문화가 남아있던 어릴 때의 고향을 떠나 원(元)․고려(高麗)․일본(日本)이라는 국제관계 속에서 동분서주하며 처신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한 지식인의 귀향(歸鄕)에 따른 감회(感懷)를 잘 드러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당시의 대표적인 문필가들의 우수한 작품들을 모아 편집한『동문선』에 수록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는 김방경의 문필적인 능력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장(書狀)은 김방경이 85세 때인 1296년(충렬왕 22) 2월 두타산(頭陀山)에 은거하고 있던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에게 보낸 것으로 1년 전 이승휴가 그를 위해 일모부(旦暮賦)를 지어 보내 준 것에 대한 답서이다.10) 이는 이승휴가 자신의 공훈(功勳)을 찬양하면서 송(宋)의 왕안석(王安石)과 당(唐)의 곽자의(郭子儀) 이상의 능력을 지녔다는 내용으로 지어준 일모부(旦暮賦)의 운자(韻字)에 그대로 차운한 부체(賦體)의 운문이다. 단순한 서신 답서가 아니라 부체(賦體)를 활용한 운문 답서로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승휴가 강호(江湖)에 은일(隱逸)해 있으면서도 능력을 갖추어 출장입상(出將入相)의 경지에 이르렀고 노장(老莊)보다 깊은 도통과 공자(孔子)에 비길 정도로 유학의 문을 열어 주었으며 성주(聖主)의 세상에 출처(出處)를 대의(大義)에 맞게 실천한 사람이라 칭찬하면서 공명(功名)을 세운 자신보다 덕행(德行)이 높은 그대가 부럽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이승휴의 일모부(旦暮賦)에 뒤지지 않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11)

  그리고 무반출신의 김방경은 무장으로서의 갖추어야 할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고, 문반직을 겸직하였을 때 처사가 공정하였음은 여러 사례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열전을 찬한 사관(史官)은 “김방경은 충직(忠直)하고 신후(信厚)하였으며, 기우(器宇)가 홍대(弘大)하여 소절(小節)에 구애하지 않았다. 엄의(嚴毅)하여 말이 적었으며 … 몸을 단속함이 근검(勤儉)하였고, … 평생(平生)에 군상(君上)의 득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평하였다.12) 이처럼 그가 매사에 공정하였다고 하나 그 역시 인정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삼별초난의 진압한 후 주축의 한사람이었던 이행검(李行儉)을 살려준 적이 있는데, 이행검은 그의 아버지 김효인(金孝仁)의 문생이었고, 이행검의 부 이주(李湊)는 백부 김창이 재질을 사랑하여 추천하여 교서랑에 임명되게 한 인연도 있었다.13) 이러한 일들이 축적되어 권세(權勢)가 일국(一國)을 기울이고 전원(田園)을 주군(州郡)에 두루 두고 휘하 장사(麾下 壯士)들이 중외(中外)에 횡행(橫行)하였고 일본원정과정에서의 작상(爵賞)이 균등(均等)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동시에 듣게 되었다.14)


1) 홍복원․다구 부자에 고려에 대한 각종 행위에 대해서는 장동익,「몽고에 투항한 홍복원․다구 부자」『역사비평』48, 1999를 참조할 것.


2)『고려사』세가25, 원종 4년 12월 20일(병인).


3)『고려사』열전18, 柳璥.


4)『고려사』열전8, 任濡.


5)『고려사』열전15 金敞, 열전38, 朴暄.


6) 무인집권기에 무거(武擧)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은『中堂事記』下, 中統 2년(1261) 6월 11일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7)『고려사』지28, 선거지2, 학교.


8)『고려사』열전17, 김방경, “多識典故 斷事無差”.


9) 이는『동문선』20, 칠언절구 ;『신증동국여지승람』24, 안동대도호부, 題詠에 수록되어 있다.


10)『동안거사집』잡저, 公之答示.


11) 이상의 시문과 서장에 대한 서술은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강규율교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12)『고려사』열전17, 김방경.


13)『고려사』열전19, 李湊 行儉. 이로 인해 후일 이행검의 외손녀인 기황후(奇皇后)의 영향력으로 통해 김방경의 후예들이 기반을 공고히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4)『고려사』열전17, 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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