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의 생애와 행적(7)-(2007. 2. 장동익 편저. 김태홍(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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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5:29 조회1,084회 댓글0건본문
이처럼 1281년(충렬왕 7) 5월의 제2차 원정에서 여원연합군은 태풍을 만나 큰 피해를 입고서 패전을 하고 말았는데,1) 이때의 형편을 이제현은 ‘범문호가 약속에 늦었고, 또 큰 바람을 만나 강남군[蠻軍]들이 익사(沒死)하였으며, 킨두[忻都]․홍다구(洪茶丘) 등도 많은 사졸(士卒)을 버리고 겨우 자신만 탈출하여 돌아왔고, 김방경 혼자서 만이 역전(力戰)하여 하카다[覇家臺, 博多]에 이르렀는데, 모든 군사들이 이르지 않자 또한 군사를 인솔하고 돌아왔다’로 표현하고 있다.2) 또 권근은 ‘신사년(1281) 6월에 이키․하카다․지카 등의 섬을[一岐․朴加大․志賀 等島]를 공격하였다. 강남군(江南軍)이 기일(期日)을 어기고 오지 않으므로 머물러 그들을 기다리던 중, 8월에 대풍(大風)을 만나 전함(戰艦)의 반 이상이 전복(顚覆)되어 다시 싸울 수 없게 되자, 공(公, 김방경)은 여러 선박(船舶)에 명령을 내려 갑옷과 말을 버리게 하고 패선(敗船)의 군졸 1,000여명을 싣고 돌아왔다’고 서술하였다.3)
친족집단 : 김방경의 가문은 증조부(曾祖父) 의화(義和)가 안동읍사(安東邑司)의 사호(司戶)였고, 조부(祖父) 민성(敏成)이 장야서승겸직사관(掌冶署丞兼直史館)이었음을 보아 무인집권기에 과거를 통해 이족(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신분상승한 것 같다. 이후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급제하여 문필력을 통해 문한관(文翰官)을 역임하고 고관으로 승진하게 됨에 따라 문반가문(文班家門)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이러한 가문의 위치로 인해 김방경은 어린 나이에 입사하여 중앙관서의 중요관부에 사환하게 되었지만, 1256년(고종 45) 큰 아버지가 별세하고 그가 40대 후반에 중견관료에 임명되어 스스로 활로를 개척하게 될 때에는 친족집단으로부터의 후원을 받을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곧 큰아버지의 후사(後嗣)․김방경 자신의 형제유무(兄弟有無)4)․처가(妻家)의 형편 등이 어떠하였는지 분명치 않으나 두드러진 인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김방경이 정계에서 활약할 때 그를 지원해 줄 수 있었던 인물로는 먼저 그의 장인(丈人)인 중서사인․지제고(中書舍人․知制誥) 박익정(朴益旌)의 아들(김방경의 처남)인 전법판서(典法判書) 휘(暉)의 장인인 이장용(李藏用)을5) 들 수 있다. 또 정실[正妻] 박씨(朴氏)의 소생인 3남 3녀(아들 愃․忻․恂, 사위 趙忭․金元沖․權允明) 중에서6) 정계에서 두드러진 활약한 인물로는 셋째 아들 순(恂)의 장인인 허공(許珙)과 맏사위 조변(趙忭)의 아버지인 조계순(趙季珣)이 있었다. 이들 3인 중 이장용(李藏用, 1201-1272)은 1269년(원종 10) 9월 무인집권자[敎定別監] 임연(林衍)이 원종(元宗)을 폐위(廢位)시켰을 때 세자(世子, 忠烈王)가 원의 세조(世祖)에게 청병(請兵)하여 몽고군이 출동하게 되자 문하시중으로서 김방경을 추천하여 몽고군을 안내하게 하였다.7) 이로 인해 원종이 복위하게 되자 김방경은 동지추밀원사․어사대부(同知樞密院事․御史大夫)로 승진하게 되었는데, 이는 김방경과 연인(連姻)관계에 있었던 이장용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돈관계인 조계순(趙季珣)은 김방경보다는 연상(年上)이며, 허공(許珙, 1233-1291)은 연하(年下)인데, 이들은 평소에는 후원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계순(趙季珣)은 조충(趙冲)의 아들로서 무인집권자 최항(崔沆)의 장인으로 무인집권기에 이미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른 인물인데,8) 김방경의 현달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허공은 1276년(충렬왕 2) 이후 김방경이 무고(誣告)에 의해 반역으로 몰려 치죄(治罪)를 받을 때는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어떠한 변명도 해줄 수는 없었다.9) 이때 김방경을 변명한 인물은 찬성사 유경(柳璥)이었는데, 범죄행위가 이루어졌을 때 친혐(親嫌) 관계에 있었던 인물이 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10)
4) 김방경에게는 매서(妹壻) 박주수(博州守) 강분(姜份)․연주수(延州守) 권천(權闡)이 있었음을 통해 볼 때 여형제(女兄弟)가 있었던 것 같다.
5) 김광철,『고려후기세족층연구』, 동아대출판부, 1990, 부록 4.
10) 그 외 김방경의 친족집단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로는 남인국,「원간섭기 김방경의 후예와 그 존재양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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