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김방경의 생애와 행적(6)-(2007. 2. 장동익 편저. 김태홍(도) 제공)

페이지 정보

관리자 작성일11-10-26 15:28 조회1,096회 댓글0건

본문

 

일본 원정의 과정 : 2차에 걸친 일본 원정에서 고려군의 지휘관인 김방경의 역할․원정의 일정․철수 및 패인(敗因) 등에 대해서도 검토될 여지가 있다.

  먼저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의 제1차 원정에서 검토되어야 할 사항은 일정(日程)․공격 지역․패인(敗因) 등인데, 이때의 전투 경과를 한․중․일 3국의 기록을 통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


  ․9월 金方慶․洪茶丘2) 등이 合浦에서 都元帥 忽敦(忻都․忻篤)3))․副元帥 劉復亨 등과 함께 戰艦을 査閱함. 蒙․漢軍은 25,000, 高麗軍은 8,000, 梢工․引海․水手는 6,700, 戰艦은 900餘艘로서 女眞軍의 到着을 기다림.

  ․10월 3일(乙巳) 東征軍 26,000이 合浦에서 出征하여 日本으로 향함. 고려군은 3軍[三翼軍]으로 편성되어 都督使 金方慶이 中軍을, 金侁이 左軍을, 金文庇가 右軍로 거느림.

  ․10월 5일 東征軍이 對馬島 서쪽 佐須浦에 출현함. 守護代 宗資國이 佐須浦에 나감.

  ․10월 6일 東征軍이 대마도에 상륙하여 왜군을 격파함. 宗資國을 위시한 16人이 피살되고 佐須浦가 불탐.

  ․10월 13일 對馬島에서의 敗戰이 博多에 전해짐. 少貳資能이 급한 使者[飛脚]을 鎌倉으로 보냄.

  ․10월 14일 東征軍 400餘人이 壹岐島 서쪽에 상륙하여 守護代 平景隆이 이끈 100餘騎와 싸움. 平景隆이 패하여 自害하고, 그의 部下가 博多로 향함.

  ․10월 17일 九州로부터 급한 使者[早馬]가 六波羅에4) 도착하여 對馬島에서의 戰鬪를 보고하고 鎌倉으로 향함.

  ․10월 18일(庚申) 蒙古事에 의해 院에서 議定이 있었고, 廣橋勘解由小路兼仲이 대마도에서의 異賊侵入[異賊襲來]의 風聞을 들음.

  ․10월 19일 東征軍이 博多彎에 도착함.

  ․10월 20일 東征軍이 博多에 上陸을 開始하여 今津․鹿原(三郞浦)․百道原․赤坂 등의 博多彎 各地에서5) 少貳景資가 이끈 倭軍과 싸움. 菊池武房․竹崎季長․白石通泰 등이 奮戰하였으나 倭軍은 점차 壓倒되어 日沒 後 博多․筥崎로부터 大宰府 지역을 퇴각함. 東征軍이 博多․筥崎 지역을 불태웠는데, 筥崎八幡宮도 燒失됨. 金方慶이 전투의 계속을 주장했으나 忻都는 回軍을 주장하여 전군이 퇴각을 위해 乘船함.

  ․10월 21일 새벽[未明]에 갑작스러운 暴風[逆風]이 일어나 東征軍의 戰艦이 岩崖에 부딪쳐 많이 파괴됨. 高麗軍 左軍使 金侁이 바다에 빠져 죽고 여타의 군사가 철수함. 여원연합군이 철수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元史』에 의하면 東征軍이 整頓되지 못하고 화살이 다 消耗되었다고[官軍不整 又矢盡] 함.

  ․10월 22일(甲子) 廣橋勘解由小路兼仲이 東征軍과의 戰鬪에 대해 들음.

  ․10월 28일 九州로부터 급한 使者[飛脚]이 京都에 이르러 壹岐의 敗報를 전함.

  ․10월 29일(辛未) 東征軍의 침입[異國襲來]에 의해 幕府가 動搖되고 있는 것이 京都에 전해짐. 北條爲時․北條時廣이 鎌倉을 출발하여 九州로 향한다는 巷說이 있음.

  ․11월 1일 幕府가 對馬․壹岐가 침략을 당하였다는 少貳資能의 보고를 받고서 安藝守護 武田信時에게 이달 20일 이전에 安藝國으로 내려가 그곳의 管內의 재지 지배층 및 주민[地頭御家人․本所領家一圓地之住人]을 指揮하여 東征軍을 邀擊하라고 명함.

  ․11월 3일 幕府가 石見國에 領地를 가진 御家人에게 이 달 20일 이전까지 領地에 내려가 守護人의 지휘 하에서 蒙古軍을 邀擊하라고 명함. 院에서6) 陰陽頭 安倍在淸 등이 蒙古事에 대해 占을 침.

  ․11월 6일(戊寅) 廣橋勘解由小路兼仲이 暴風[逆風]에 의해 賊船 數萬艘가 本國으로 돌아가고 少數의 船舶이 상륙하였다는 것 및 大友賴泰의 部下[郎從]가 50餘人의 捕虜를 이끌고 上京豫定이라는 것을 들음. 九州로부터의 급한 使者[飛脚]가 京都에 도착하여 지난 달 20일에 蒙古와 武士가 싸운 것과 賊船 1艘를 鹿島(志賀島)에 抑留시킨 것을 전함.

  ․11월 8일 龜山上皇이 石淸水 八幡宮에 幸次하여 戰勝을 보고함.

  ․11월 9일 龜山上皇이 賀茂․北野 兩社에 幸次하여 戰勝을 보고함.

  ․11월 27일(己亥) 東征軍이 合浦에 돌아왔는데, 軍士 13,500餘人이 歸還하지 못했고 左軍使 金侁이 溺死하였음. 金方慶이 世祖․忠烈王에게 노획한 兵器를 바침.

  ․12월 28일(庚午) 金方慶․忽敦(忻都) 등이 開京에 돌아옴. 忽敦(忻都)이 俘虜 男女 200人을 忠烈王․公主에게 바침.


  이상과 같은 제1차 일본원정의 패인은 종래 일본인(日本人)들은 신풍(神風)에 의해 연합군이 패퇴하였다고 보았지만, 10월 20일(현재의 11월 26일에 해당)의 ‘대풍우 大風雨’에 의해 제1차 여원연합군이 패몰(敗沒)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계절적으로 부합될 수 없다는 이의(異議)가 제기되어 있다.7) 이는 여원연합군이 철수(撤收)를 결정하고서 귀환(歸還)하던 날의 밤에 ‘대풍우’를 만나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는 고려 측의 자료와8) 부합되고 있다.9) 또 최근에는『元史』208日本에 의거하여 관군(官軍)이 정제되지 못했고 식량과 궁시(弓矢)가 다하여 제장(諸將)이 철수를 결의하여 철수를 개시하던 날 밤에 큰 풍우(風雨)가 있어 전함(戰艦)이 암애(巖崖)에 부딪혀 많이 파손(破損)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0) 이를 뒷받침해주는 고려 측의 자료로서 ‘군량(軍糧)이 다하여 돌아왔다(以糧盡還)’이 있어,11)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

  1281년(충렬왕 7) 5월의 제2차원정에서 여원연합군이 일본군와 싸웠던 일정을 한․중․일 3국의 기록을 통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2)


  ․5월 4일(무술) 忻都․洪茶丘․金方慶․朴球․金周鼎 등이 舟師를 거느리고 日本을 征伐하러 떠남.

  ․5월 21일 東征軍의 東路軍이 對馬島 世界村 大明浦를13) 공격하고 通事 金貯를 보내어 檄文으로 타이름. 金周鼎이 倭軍과 交戰했는데 郎將 康師子 등이 戰死함.

  ․5월 22일 東路軍이 對馬․壹岐島를 공격함.

  ․5월 26일 東路軍이 對馬島로부터 壹岐島로 향했는데, (蒙古將軍) 忽魯勿塔의 船軍 113人, 梢工․水手 36人이 行方不明됨.

  ․6월 1일(乙巳) 異國의 兵船 500艘가 對馬島 앞 바다에 침입해왔다는 報告가 大宰府의 급한 使者[飛脚]에 의해 六波羅에 전해짐. 이어서 급한 使者[飛脚]가14) 關東을 향함.

  ․6월 4일(戊辰) 倭軍이 異國船 1艘를 밤중에 격파하였다는 보고의 급한 使者[早馬]가 京都에 도착함.

  ․6월 6일 東路軍이 博多彎 入口의 志賀島에 이르러 밤중부터 倭軍과 交戰을 시작함. 肥前國 唐津의 住民(住人] 草野經永이 伊予國 住民[住人] 河野通有 등과 함께 奮戰하여 새벽에 이름.

․6월 8일(임신) 김방경․김주정․박구․박지량․荊萬戶 등이 博多灣의 志賀島․能古島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워 300여급을 참수하였으나, 일본군이 돌진하여 몽고군(官軍)이 무너져서 홍다구가 패주하자 王萬戶가 다시 격파하여 50여급을 참수하자 왜군이 패퇴함. 大友貞親의 兵士 30餘騎가 바다로부터 志賀島로 공격해 들어감. 金方慶․張成 등이 力戰하여 倭兵 多數를 殺傷함.

  ․6월 9일(계유) 東路軍이 다시 倭軍과 싸우다가 패배함. 東路軍의 陣中에 疫病이 流行하여 死者가 3,000명에 이름. 이후 數日間에 걸쳐 交戰이 있었다가 東路軍이 肥前國 鷹島로 퇴각함.

  ․6월 13일 東路軍이 志賀島 부근에서 싸우다가 一時 壹岐島로 퇴각했는데, 이는 15일 江南軍과 壹岐島에서 合流하기로 했던 결과임.   

  ․6월 14일(戊寅) 異賊의 戰艦 300艘가 長門國의 浦口에 도착한 報告가 大宰府의 급한 사자[飛脚]에 의해 京都에 전달됨.

  ․6월 15일 東路軍이 壹岐島의 海上에서 江南軍의 到着을 기다렸으나 江南軍이 나타나지 않음. 忻都․洪茶丘가 船舶이 腐蝕되고 軍糧이 다함으로 回軍을 주장하였으나 金方慶은 묵묵히 답을 하지 않음. 江南軍의 先發隊가 對馬島에 도착함.

  ․6월 16일 鎭西의 급한 使者[早馬]가15) 京都에 도착하여 異國船 3艘를 격파한 것을 보고함.

  ․6월 18일(임오) 日本行省 臣僚가 使者를 (大元蒙古國에) 보내와 報告하기를 ‘大軍이 巨濟島에 駐留하다가 對馬島에 이르러 島人을 虜獲했습니다. 이의 말에 의하면 大宰府의 서쪽 60리에 옛부터 戍軍이 있어 戰備를 갖추어 出戰을 準備하고 있다고 하오니, 그의 虛點을 틈타 攻擊하는 것이 어떨까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世祖는 軍事는 卿들이 스스로 적절히 처리하라고 말하였다. 이 무렵부터 江南軍은 慶元(寧波)․定海 等地를 출발하여 平戶島로 향하였음. 당시 江南軍은 阿塔海․范文虎 등의 指揮하에 戰艦 3,500艘, 兵力 10餘萬人으로 구성되어 있었음.

  ․6월 20일 저녁 무렵에 鎭西의 급한 使者[早馬]가 京都에 이르러 異國事를 고함.

  ․6월 24일(戊子) 宋朝船(江南軍의 先發隊) 300艘가 對馬島에 到着한 것에 대한 보고가 大宰府의 급한 使者[飛脚]에 의해 六波羅에 전해짐.

  ․6월 27일 鎭西의 급한 使者[早馬]가 京都에 도착하여 異國이 공격해와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고함.

  ․6월 29일 島津長久가 比志島時範․河田盛資 등과 함께 兵을 이끌고 壹岐島에 건너가 東征軍을 공격함.

  ․7월 2일 龍造寺季時․山代榮 등의 肥前國의 兵士가 少貳資時의 指揮하에 壹岐島 瀨戶浦에서 여원연합군과 싸웠는데 少貳資時가 戰死함.

  ․7월 7일 島津長久가 比志島時範 등을 이끌고 陸地로부터 鷹島에 달려 들어가 싸움.

  ․7월 初旬 江南軍이 肥前國 平戶島에서 東路軍과 만남.

  ․7월 12일 京都에서 異國賊船이 退却하였다는 風聞이 있었음.

  ․7월 21일(甲寅) 金方慶이 中郎將 朴昷을 보내와 “諸軍이 太宰府에 이르러 여러 번 싸우다가 退軍하였는데 蠻船 50艘가 뒤따라와서 다시 그 城으로 향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면서 所獲한 甲冑․弓矢․鞍馬 등을 바침. 같은 날 鎭西의 급한 使者[飛脚]이 京都에 이르러 異國賊船이 다시 공격해 온 것을 고함.

  ․7월 27일 東征軍이 平戶島에서 鷹島(長崎縣 北松浦郡 鷹島町)로 移動하여 다음날까지 倭軍과 싸움.

  ․7월 28일 東征軍이 攻擊路를 나누어 內陸으로 進擊하려고 함.

  ․7월 30일 九州方面에 大暴風雨가 있음.

  ․閏7월 1일 東路軍 및 江南軍의 東征軍의 艦隊가 鷹島의 海上에서 大風雨에 의해 거의 반이 顚覆되고, 士卒 6~7/10이 喪失됨.16) 京都에서 밤이 되어 大暴風雨가 시작되었고 새벽까지 계속됨. 이때 강남군의 3,500艘와 蠻子軍 10餘萬人이 大風을 만나 蠻軍이 모두 溺死하였다고 함.17)

  ․閏7월 5일 이날부터 7일에 걸쳐 少貳經資가 이끈 鎭西 將士들이 兵船 數百艘를 거느리고 鷹島에 들어가 掃蕩戰을 전개하여 수많은 군사를 殺戮하고 2,000人을 捕虜로 잡음.

  ․閏7월 9일 博多에서 東征軍의 捕虜를 참함.

  ․閏7월 11일 이보다 먼저 鎭西의 급한 使者[飛脚]이 京都에 이르러 지난 1일 異國의 賊船이 大風을 만나 크게 漂沒하고 많은 배가 破損되어 海岸에 올라오게 되었다는 것을 보고함. 이에 의해 京都[洛中]의 上下가 크게 기뻐함. 밤에 鎭西의 급한 使者[飛脚]이 京都에 이르러 蒙古賊은 모두 滅亡하고 남은 2,000餘人이 捕虜가 되었다는 것을 고함.

  ․閏7월 14일(丁丑) 廣橋勘解由小路兼仲이 지난 1일 大風에 의해 賊船이 漂沒했다는 보고를 들음.

  ․8월 16일(己卯) 別將 金洪柱가 合浦로부터 行宮에 이루러 東征軍이 敗하여 元帥 등이 合浦에 돌아왔음을 보고함.

  ․閏7월 21일(甲申) 鎭西로 향하던 幕府의 使者 2人이 上京[上洛]함. 朝廷에 異國의 賊을 모두 誅伐하였다고 고함.

  ․8월 30일(임진) (元이) 征日本軍을 돌아오게 하고 所在官에게 糧穀을 支給하게 함. 이 무렵에 忻都․洪茶丘․范文虎․李庭․金方慶이 거느린 諸軍의 船舶이 風濤에 부딛쳐 크게 어려움이 빠졌고 餘軍이 돌아와 고려의 境內에 이르렀으나 10中 1~2가 돌아 왔을 정도임. 輔國上將軍都元帥 哈剌歹가 일본원정에 참여하였다가 颱風을 만나 船舶을 돌림.

  ․閏8월 2일(甲午) 金方慶 등이 行宮에 와서 謁見함.

  ․閏8월 24일(丙辰) 左司議 潘阜를 보내 忻都․洪茶丘․范文虎를 慰勞함. 이때 돌아오지 못한 元軍이 10여만, 高麗軍이 7,000餘人이었음.

  ․閏8월 忻都․洪茶丘․范文虎 등이 元에 돌아갔는데, 돌아가지 못한 자가 無慮 10餘萬 이었음.

  ․11월 20일(壬午) 各道의 按廉使가 “東征한 高麗軍이 9,960명, 梢工․水手가 17,029명이었는데 그중 生還者는 19,397명입니다(파견된 人員 26,989名 중 未歸還者은 7,592名으로 28.1%임)”라고 보고함.


1) 날짜의 정리에서 고려력(高麗曆)과 일본력(日本曆)이 달라 해당 국가의 역(曆)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2) 당시 동정도원수부(東征都元帥府)의 부원수(副元帥)인 홍다구(洪茶丘, 俊奇)는 察忽(元史․高麗史)로 달리 표기되기도 하였다.


3) 당시 동정도원수부(東征都元帥府)의 도원수(都元帥)인 忻都(Qindu)는 忽敦(高麗史)․欣篤(動安居士集)․忻篤(益齋亂藁)․忻豆(櫟翁稗說) 등으로 달리 표기되기도 하였다.


4) 六波羅府(로쿠하라후)는 가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가 교토[京都]에 설치한 관부(官府)로서 막부(幕府)의 지시에 의해 교토[京都]의 공가(公家, 朝廷)를 감시하며 공가(公家)와 막부(幕府)를 연결하는 동시에 京都지역을 지키며 近畿․西國 지역에서 바쿠후의 정무(政務)를 관장하였는데, 南北의 兩府가 설치되어 있었다(木村英一, <六波羅探題の成立と公家政權>《ヒストリア》178, 大阪史學會, 2002).


5) 고려측의 기록에는 하카다[博多]지역을 이만도(伊蠻島)로 표기 하였다(『益齋亂藁』9상, 忠憲王世家, “破其一岐․對馬․伊蠻等島 以糧盡還” ;『東賢史略』, 金方慶, “至元甲戌 奉帝命 東征日本 擊對馬等三島”).


6) 院(인)은 상황(上皇)의 거처(居處)를 말하는데, 이에서 행해지던 院政(인세이)은 후계자에게 왕위를 양위(讓位)했던 상황(上皇)이 직접 국정(國政)을 장악하던 정치형태로서 11세기말 白河(시라카와, 1072-1086 재위)로부터 시작하여 19세기 光格(고로카쿠, 1779-1817)까지 700여년간 계속되었다. 이는 국왕의 권능(權能)을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직계존비속의 친권(親權)에 의해 자의적로 행한 것으로, 정무(政務)는 상황의 거소(處所)인 後苑[院]에서 이루어졌고, 이의 결정은 院宣(인젠)이라고 하였으며 정청(政廳)의 설치나 행정조직의 변화는 없었다.


7) 荒川秀俊, 「文永の役の終りを告げたのは台風ではない」『日本歷史』120, 1958 ; 「文永の役の終末について諸家の批判に答う」『日本歷史』145, 1960. 이는 氣象學者의 입장에서 제기된 것인데, 최근 이에 대한 반론이 발표되었다(溝川晃司, 「文永の役․神風發生の有無について」『法政史學』60, 2003).


8)『고려사』세가38, 충렬왕 즉위년 10월 을사, 열전17, 김방경.


9) 이러한 이른바 ‘神風’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는 川添昭二,『蒙古襲來硏究史論』, 雄山閣出版, 1977, pp.249-254 ; 太田弘毅, 「文永の役, 元軍撤退の理由」『政治經濟史學』319, 1993에 잘 정리되어 있다.


10) 太田弘毅, 「文永の役, 元軍撤退の理由」『政治經濟史學』319, 1993에 잘 정리되어 있다.


11)『益齋亂藁』9상, 忠憲王世家.


12) 이 해는 일본은 윤7월이었고, 고려와 원은 윤8월이었다. 


13) 세계촌(世界村) 대명포(大明浦)의 위치(位置)에 대한 비정(比定)은 峰町佐賀의 大明神浦, 上縣町 志多留, 嚴原町 久田, 嚴原町 頭酘 등의 여러 설이 있다.


14) 飛脚(히키야쿠)은 각종 문서를 전달하는 사자(使者)를 말하는데, 이 자료에서는 早馬(하야우마)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 급사(急使)를 지칭한다.


15) 早馬(하야우마)는 통신연락(通信連絡)을 위한 급사(急使) 또는 급사(急使)가 탄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早打라고도 하며, 여원연합군의 일본 원정이후 카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는 역제(驛制)를 京都에서 博多까지 연장시켜 전쟁에 대비하였다. 당시 긴급한 경우 京都~鎌倉間은 3~4일, 京都~博多間은 5~6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16)『元史』128, 相威에는 8月 朔日(1일)로 되어 있는데, 이때 중국은 閏月이 8月이기 때문이다.


17) 1992년 이래 타카시마(鷹島)의 床浪港 및 神崎港의 방파제 건설․改修 工事 등을 위한 발굴이 이루어져 많은 유물이 인양되고 있다. 이들 유물은 대량의 中國 陶器를 포함한 磁器, 船舶의 部材인 각종 木材․碇(石, 木)․船釘, 鐵刀․鐵箭의 다발(箭束)․鐵砲彈․石彈, 각종 靑銅製品 등인데, 이 중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靑瓷의 파편, 銅碗 등이 포함되어 있으나 몇 예에 지나지 않는다(長崎縣鷹島町敎育委員會,『鷹島海底遺跡』Ⅱ~Ⅷ, 1993~2003). 이곳에 정박하고 있던 고려의 선박은 전체의 1/3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비해 인양된 유물이 극히 적은 점은 이 시기에 고려의 선박은 비교적 피해를 덜 입었다는 기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