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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의평리 휘 후(厚)의 사위 우의정 노숭(盧嵩) 묘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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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17-07-26 11:20 조회9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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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우의정 노숭(盧嵩) 신도비-광주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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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11-1(율수재: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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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숭[盧嵩, 충숙왕 복위 6(1337)태종 14(1414)], 초명은 노숭(盧崇), 자는 중보(中甫), 호는 상촌(桑村), 시호는 경평(敬平), 본관은 광주(光州), 증조는 대호군 노서(盧恕), 조부는 대호군 노단(盧亶), 아버지는 감찰지평 노준경(盧俊卿), 어머니는 비순위별장 이천로(李天老)의 따님 전주이씨, 초배는 김극치(金克致)의 따님 상산김씨, 계배는 첨의평리 김후(金厚)의 따님 안동김씨(군사공파)이다.

  공민왕 6(1357) 진사, 13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지신사·대사헌·지밀직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우왕 때는 왕에게 놀기 좋아하는 것을 여러 차례 간언하다가 미움을 사기도 했다. 공양왕 1(1389)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용안(龍安:익산)과 영산(榮山:나주)에 각각 득성창(得成倉)과 영산창(榮山倉)을 세웠다. 그리고 성을 쌓아 조운을 편리하게 하고, 왜구로부터의 피해를 막았다. 또한 조세를 3년 동안 면제시켜주도록 조정에 건의했으며, 의창(義倉)이 없는 주군(州郡)에 이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정진개국원종공신녹권에 의하면, 조선 개국 후 한양윤으로서 개국원종공신에 추가로 녹훈되었고 공신전 30결을 받았다. 태조 4(1395) 개성유후를 거쳐 1397년에는 경기좌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경기 땅에 고관들의 별장이 많았는데, 차역을 고르게 하고 청탁을 하지 않는 청렴함을 보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삼사좌사·지의정부사로 발탁되었으나 노모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다음 해에 참판승추부사로 기복되었고, 그 뒤 참찬의정부사를 거쳐 1414년 검교우의정에 이르렀다. 죽을 때 아들들에게 불사를 쓰지 말도록 유언했으며, 조정에서는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였다. 상주의 옥연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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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표에 영가군부인 김씨, 안동이 생략된 아쉬움이 있다]

  노숭의 묘를 비롯한 서울특별시 구로구 천왕동 산39에 있던 광주노씨 묘역은 2011년 영등포교도소가 구로구 천왕동으로 이전해 옴에 따라 2009. 6. 6.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11-1로 이장을 하였다. 율수재 여재문 앞 동산에 광주노씨 묘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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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정 노숭 신도비]

· · · · ·配 永嘉郡夫人 金氏 僉議評理 上洛君 諱 厚之 女 1女 適 鄭坤 東萊人 大司成 永嘉郡夫人 墓 廣州 九川面 高多枝 · · · ·

경평공 신도비를 보면 배위 영가군부인 김씨는 첨의평리 상락군 휘 후()의 따님으로 1녀를 두었는데 동래인 대사성 정곤(鄭坤)에게 출가하였고, 묘는 광주군 구천면 고다지 묘좌에 있다.”고 되어 있다.

김후(金厚) : 본관은 안동, 증조는 상락군개국공 시 충렬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 조부는 전법판서상장군 김선(金愃), 아버지는 보문각대제학 시 충숙 김승용(金承用), 어머니는 수문전대제학 원관(元瓘)의 따님 원주원씨, 배위는 여흥민씨이다. 또한 김후의 3자 군사공 칠양(七陽)의 차자 승지 김돈(金墩)의 배위 광주노씨는 노숭(盧嵩)의 둘째아들 노상의(盧尙義)의 따님이다.

정곤(鄭坤) : 본관은 동래, 증조는 정인(鄭絪), 조부는 정섬(鄭暹), 아버지는 정흥사(鄭興嗣), 배위는 우의정 노숭(盧嵩)의 따님 광주노씨이다. 고려 우왕 12(1386)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에 이르렀다.

 


[묘역 중수 기념비문]

뿌리가 깊은 나무라야 흔들리지 아니하고 수원이 유원(悠遠)해야 대하(大河)를 이룬다. 이러하듯 인간사회에서 제각기 그 뿌리를 찾아 상고(上古)로는 시조로부터 면면히 계승해온 현조들의 업덕(業德)을 고이 받들어 가훈 또는 가풍으로 승화시켜왔고, 아래로는 꽃을 피워 열매가 된 자자손손의 줄기를 따라서 계보를 이루어 왔다. 우리 광주노씨의 근원 또한 시조 동도(東渡) 멀리 라()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장구한 세월이 바뀌는 가운데 특히 비조(鼻祖)가 되시는 휘 숭()자 할아버지께서 이씨조선 초에 우의정에 대제학을 역임하시니 그 유업과 덕행은 무릇 현사(賢士)와 제유(諸儒)에게 귀감이 되시었고 후손들은 영세토록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할아버지께서 천수를 다하시고 이 천왕산록에 잠드시어 모신지도 어언 560유여년(有餘年)이 흘러갔다. 낙성군부인(洛城郡夫人) 김씨는 경기도 풍덕 땅에 모시어 계시고,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김씨는 경기도 옛 광주군 고다지에 모시어 계신다. 그런데 현하당국의 택지조성책에 따라 영가군부인 묘소를 이천(移遷)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문의 의결에 따라 할아버지 묘소에 합폄(合窆)으로 모시게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풍덕에 모신 낙성군부인 묘소에는 래왕도 못하려니와 앞으로 더욱 아득하게 망각되어 감을 안타갑게 여겨 이에 혼백(魂魄)을 받들어 모시어 삼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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