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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대사성(大司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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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4-06-25 12:13 조회2,811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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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와조선시대에서 학문이 깊고 덕망이 높아야 갈 수 있는 관직이 성균관의 실질적 수장인 대사성이라는 직위입니다.
문온공 파조이신 척약재(김구용)께서 고려 우왕때 대사성을 역임하신 바 있어 한동안 대사성공파라고도 불려왔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우리 안동김씨에서 이 영광스러운 직책을 맡으신 분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바대로 추려 보았습니다.  이외에 다른 분 있으시면 알려주십시요.
이외에 외할아버님이나 사위 외손도 많습니다.
함부림 (태조) 군사공 손 계로의 장인
정창손(세조) 문정공 질의 장인
李蓂(중종) 문온공 현손 의우의 사위
이수광 (선조 ) 문온공7대손 대섭의 사위
홍이상(선조)문온공 후손 김고언의 사위
이민구(인조) 문온공7대손 대섭의 외손
趙絅 (인조) 익원공 후손 효헌공 김찬의 사위



역대 대사성 (안동김씨)
金九容 고려 우왕
金壽寧 조선 세조
金希壽 조선 중종
金 澍 명종
金 緻 광해군

김수녕
1436 ~ 1473
본관 안동. 자 이수(頤叟). 호 소양당(素養堂). 시호 문도(文悼).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에 오르고, 1455년 집현전수찬에 이어 병조좌랑 ·헌법 ·예문관응교(禮文館應敎) 등을 지냈다. 1458~1462년 함길 ·평안 ·강원 ·황해 ·충청 5도 체찰사(體察使)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을 지냈고, 1463년 집의(執義)가 된 뒤 당상관에 올라 동부승지 ·좌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1469년(예종 1) 공조참의, 1470년 대사간이 되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左理功臣) 4등에 책록되어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으며 공조 ·호조참판을 지냈다.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다.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참조항목국조보감, 동국통감, 세조실록, 예종실록

 
김희수
1475 ~ 1527
관 안동. 자 몽정(蒙禎). 호 유연재(悠然齋). 1507년(중종 2) 참봉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1508년 권벌 등과 함께 무오사화(戊午史禍)로 희생된 김종직(金宗直)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청하였으나, 묵살되었다.
09년 정자(正字) ·박사에 이어 지평(持平) ·검상(檢詳) ·장령(掌令) ·집의(執義) 등을 지냈으며, 1520년 당상관에 올라 우부승지가 되고, 이듬해 좌부승지가 되었다. 1524년 도승지, 1525년 대사헌(大司憲), 1526년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1527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었다.
특히특 해서(楷書)를 잘써 《계주문(戒酒文)》 《영상김수동비(領相金壽童碑)》 《영상성희안비(領相成希顔碑)》 등의 글씨를 남겼다. 동래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주
1512(중종 7)∼1563(명종 1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 할아버지는 성(城)이고, 아버지는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이며, 어머니는 이팽수(李彭穗)의 딸이다.
1531년에 진사가 되고,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다.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 및 개성유수·대사헌을 지냈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1563년 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1590년(선조 23) 그의 공이 인정되어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임형수(林亨秀) 등과 교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우암유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석(錫)이고, 아버지는 원주목사 제갑(悌甲)이며, 어머니는 윤개(尹漑)의 딸이다.
 
1588년(선조 21)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이조좌랑·정언(正言)을 거쳐 1595년 사간·전한(典翰)·시강관(侍講官)·사인(舍人)이 되고, 이듬해 집의(執義)·사간 등을 거쳐, 1597년 동부승지·우부승지·충청도관찰사·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소모관(召募官)으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이어 병조참의·우승지·좌승지를 거쳐 복수사(復讐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신립(申砬)이 전사한 탄금대(彈琴臺)를 돌아보고 임진왜란 뒤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1603년 동지사행(冬至使行)에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순천군수를 거쳐 병조참의·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병조참판에 올랐다. 선조가 죽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1년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그는 어려서 등과하였으며, 역학(易學)에 밝아 일대(一代)의 명류(名流)로 이름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그의 아버지 제갑이 적에게 죽음을 당하자 호남·영남지방의 복수별장(復讐別將)이 되어 나갔다.
 
[참고문헌]
 
 
김치
1577(선조 10)∼1625(인조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심곡(深谷). 석(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충갑(忠甲)이고, 아버지는 부사 시회(時晦)이며, 어머니는 양언개(楊彦漑)의 딸이다. 증 영의정 시민(時敏)에게 입양되었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說書)를 거쳐 1608년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예부흥을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하였다. 광해군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조참의·동부승지·대사간을 거쳐, 교리(校理)·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고, 병조참지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되었다.
한때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이조에 있으면서 흉한 일을 벌였으며, 대사간이 되어서는 영창대군(永昌大君) 살해음모를 반대하는 정온(鄭蘊)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大北派)로 몰려 유배당하였다. 그 뒤 풀려나 동래부사를 거쳐 1625년(인조 3)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경서(經書)에 통달하였고, 특히 점술을 연구하여 천문(天文)에 밝았다. 저서로는 『심곡비결(深谷祕訣)』이 있다.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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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선조대의 김시헌(金時獻)도 찾아봐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것 일 수도 있습니다.

김영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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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선조때 대사성 역임하신 것 맞습니다.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