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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공(金'明理)묘지명 -원문 및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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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4-05-08 10:28 조회2,4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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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國奉政大夫成川都護府副使兼勸農副使安州左翼兵馬團鍊副使金公墓誌

 

公姓金氏諱明理安東人新羅王金傅十五代孫高麗侍中上洛郡開國公方慶之五代孫也曾祖諱承澤直亮同德佐理功臣金紫光祿大夫中書侍郞平章事諡良簡公祖諱昴追封崇政大夫議政府贊成事行重大匡上洛君考諱九容奉翊大夫判典校寺事進賢館提學妣追封奉翊大夫密直副使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行通直郞禮儀正郞南陽洪義元之女也洪武元年戊申二月十四日乙卯公生歲丙辰公年九歲以蔭授聰陵直十五中李升啇榜進士甲子春先考判典校以遼東聞禮使赴朝會本國獻馬不及期典校觸 天威流于大理衛病卒于旅次公間喪哀毁動遵礼則服闋中黃鉉榜生員第四人尋拜郎將中郎將累遷至司憲監察戶曹佐郞司憲持平戶曹正郞嘗出爲晋州牧判官又知沃州郡事公之治邑寬威兼濟吏民畏愛秩滿當去兩邑人皆該道涕泣入爲都官正郞俄遷戶曹陞軍資少監又出爲京畿經歷慶尙道經歷入爲慶昌府少尹未幾置散退去廣州炭洞里自號炭谷野叟自是累有徵辟皆力辭不就宣德戊申秋起公爲成川都護府副使又欲辭免而未得謝其冬稱疾解任又居炭洞正統戊午冬十二月二十三日以病卒于第公年七十一夫人李氏先公歿永樂己丑冬窆于廣州上芚村木洞山壬坐丙向之麓己未冬十二月十六日庚寅同塋而葬[夫人之墓在南]公之遺敎也

公天性寬厚風儀嚴重不言人過失不耕人富貴子弟有失雖不卽責自然畏服衣服必儉飮食必精冬寒不近爐夏暑不近扇平居未嘗少怠日以書史自娛嘗種花草朝夕手自灌水曰此吾日課也每遇良晨必邀朋置酒極歡見人白首冒進者則曰老當退休聞人多殖貨財者則曰此聚怨之道不求宦達不事生産

夫人李氏端誠輔理翊贊功臣重大匡雞林君諡文靖公霽亭達衷之女也生三男四女長曰孟獻朝奉大夫典農少尹知製敎丙午及第次曰仲舒承仕郞典廏副丞戊午生員次曰季友務功郞藝文奉敎兼春秋館記事官丙辰及第女長適司宰直長權烜次適左軍司直南景福次適司膳直長金鐵山次適中軍副司直崔善文少尹娶嘉善同知中樞院事李思儉女生男三曰自埥曰自壤曰自堉幼女三長適幼學尹沂餘幼副丞娶

中訓陜川郡事金礎女生男一曰自垸幼奉敎娶宣略護軍郭仲儀女生男一曰自均女一皆幼司宰生男五曰挶生員曰撗曰揁曰抱曰扌筒幼女一適別侍衛李孟智司直生男三曰昐曰暲曰暖幼女三長適幼學郭伸餘幼司膳生男四曰國光生員曰謙光曰廷光曰景光幼女二幼國光娶護軍黃保身女生男一曰忸女一皆幼副司直生男四曰漢公曰漢候曰漢 伯曰漢男幼女三長適副司正呂仁甫餘幼仁甫生男一曰範幼

少尹奉敎皆吾同年友也少尹來請誌哀切余於少尹學同業仕同時再忝同盟交分旣厚不敢以文拙辭 正統四年己未冬十月下澣中訓大夫集賢殿直提學知製敎世子右輔德完山柳 義孫謹誌

 

行者學敏山直丹同

 

조선국 봉정대부 성천도호부부사 겸 권농부사 안주좌익병마단련부사 김공 묘지

(朝鮮國奉政大夫成川都護府副使兼勸農副使安州左翼兵馬團鍊副使金公墓誌)

 

공(公)의 성은 김씨(金氏)요, 휘(諱)는 명리(明理)로 안동인(安東人)이다. 신라왕 김부(金傅)의 15대손으로 고려시대 시중(侍中)을 지내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추봉된 방경(方慶)의 5대손이다. 증조의 휘는 승택(承澤)으로 직량동덕좌리공신(直亮同德佐理功臣)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내고 양간공(良簡公)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할아버지의 휘는 묘(昴)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행(行) 중대광(重大匡) 상락군(上洛君)에 추봉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구용(九容)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을 지냈고, 어머니는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 행(行) 통직랑(通直郞) 예의정랑(禮儀正郞)에 추봉된 남양(南陽) 홍의원(洪義元)의 따님이다. 홍무(洪武) 원년인 무신년(戊申年; 1368, 공민왕 17) 2월 14일 을묘일(乙卯日) 공을 낳았다. 공의 나이 9세인 병진년(丙辰年; 1376, 우왕 2)에 음보(蔭補)로 총릉직(聰陵直)을 제수하였고, 15세에 이승적(李升啇)과 함께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384, 우왕 10) 봄에 선고(先考; 죽은 아버지)께서 판전교(判典校)로 요동문례사(遼東聞禮使)를 맡아 가서 조회(朝會)했다. 본국(本國; 고려)에서 바치는 말이 기일 안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교공(典校公)께서는 천위(天威; 천자의 위엄)를 저촉했다는 이유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중에 병을 얻어 여차(旅次; 여행중의 숙박)에서 돌아가셨다. 공은 상중(喪中)에 애훼(哀毁)하면서도 예법을 준수하였고, 복(服)을 마치자 황현(黃鉉)과 함께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제 4인으로 급제하였다.

이어 낭장(郎將)․중랑장(中郎將)을 제수하고, 여러 자리를 거쳐 사헌감찰(司憲監察)․호조좌랑(戶曹佐郞)․사헌지평(司憲持平)․호조정랑(戶曹正郞) 등에 이르렀다. 일찍이 외직으로 나가 진주목판관(晋州牧判官)과 지옥주군사(知沃州郡事)를 지냈다. 공은 치읍(治邑)하는데 너그러움과 위엄을 겸비하여 다스리니 이속(吏屬)과 백성들이 외애(畏愛)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오게 되자 두 고을의 백성들은 모두 도로에 나와 체읍(涕泣)하기도 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 도관(都官)․정랑(正郞)을 지내고 갑자기 호조(戶曹)로 옮겼다가 군자소감(軍資少監)으로 승진했으며, 또 외직으로 나가 경기경력(京畿經歷)․경상도경력(慶尙道經歷)을 역임하고 돌아와서는 경창부소윤(慶昌府少尹)을 제수했다. 얼마 후에는 잠시 쉬고자 광주(廣州) 탄동리(炭洞里)에 퇴거하여 스스로 탄곡야수(炭谷野叟)라 이름 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차례 징벽(徵辟; 관리로 등용하기 위하여 부름)하였으나 모두 힘써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다. 선덕(宣德) 무신년(戊申年; 1428, 세종 10) 다시 공을 성천도호부부사(成川都護府副使)로 삼았으나 또 힘써 사양하여 면하고자 했으나 사면을 얻지 못하였다. 그해 겨울 병을 핑계하여 해임되어 또 탄동(炭洞)에 머무르다가 정통(正統) 무오년(戊午年; 1438, 세종 20) 겨울 12월 23일 병을 얻어 집에서 돌아가니 공의 나이 71세였다.

부인 이씨(李氏)는 공에 앞서 죽어 영락(永樂) 기축년(己丑年; 1409, 태종 9) 겨울 광주(廣州)의 둔촌(芚村) 목동산(木洞山) 임좌병향(壬坐丙向)의 기슭에 장례했다. 기미년(己未年; 1439, 세종 21) 겨울 12월 16일 경인일(庚寅日) 같은 무덤에 장례하니[부인의 묘는 남쪽에 있다] 공의 유교(遺敎)에 따른 것이다.

공은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풍의(風儀)가 위중(威重)하여 다른 사람의 과실(過失)을 말하지 않고 사람의 부귀(富貴)를 힘쓰지 않았다. 자제가 과실이 있더라도 비록 즉시 책망하지 않았으나 자연스럽게 외복(畏服)하였다. 의복은 반드시 검소하게 하였고, 음식은 반드시 정선하였다. 겨울에는 한기(寒氣)가 있어도 난로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여름에는 무더위에도 부채를 쓰지 않았다.

평소에는 반드시 조금의 게으름도 없이 날마다 서사(書史)로서 스스로 즐겼고, 일찍이 화초(花草)를 심어 아침저녁으로 손수 물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일과(日課)”라고 하였다. 매양 현명한 사람을 만나면 새벽부터 반드시 친구로서 맞이하여 술상을 차려 극진하게 환대하였다. 사람들에게 흰머리가 모진(冒進; 함부로 나감)한 것을 보이면서는 말하기를 “늙으면 당연히 물러나는 것”이라고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재화(財貨)를 늘린다는 것을 들으면 말하기를 “이는 원한을 모으는 길이다. 벼슬의 영달(榮達)을 구하지 말고 생산(生産)에 열중하지 말라 ”고 하였다.

부인 이씨는 단성보리익찬공신(端誠輔理翊贊功臣) 중대광(重大匡) 계림군(雞林君) 시(諡) 문정공(文靖公) 제정(霽亭) 달충(達衷)의 딸로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맹헌(孟獻)으로 조봉대부(朝奉大夫) 전농소윤(典農少尹) 지제교(知製敎)인데 병오년(丙午年; 1426, 세종 8)에 급제하였고, 차남은 중서(仲舒)로 승사랑(承仕郞) 전구부승(典廏副丞)인데 무오년(戊午年; 1438, 세종 20) 생원시에 급제했다. 다음은 계우(季友)로 무공랑(務功郞) 예문봉교(藝文奉敎)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인데 병진년(丙辰年; 1436, 세종 18) 급제했다. 딸 중 장녀는 사재직장(司宰直長) 권훤(權烜)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좌군사직(左軍司直) 남경복(南景福), 다음은 사선직장(司膳直長) 김철산(金鐵山), 다음은 중군부사직(中軍副司直) 최선문(崔善文)에게 출가했다.

소윤(少尹; 孟獻)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이사검(李思儉)의 딸을 취하여 3남을 낳으니 자정(自埥)․자양(自壤)․자육(自堉)인데 어리며, 3녀도 두었는데 장녀는 유학(幼學) 윤기(尹沂)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부승(副丞; 仲舒)은 중훈대부(中訓大夫) 합천군사(陜川郡事) 김초(金礎)의 딸을 취하여 1남을 낳았는데 자완(自垸)으로 어리다. 봉교(奉敎; 季友)는 선략호군(宣略護軍) 곽중의(郭仲儀)의 딸을 취하여 1남을 낳으니 자균(自均)이며, 1녀도 있는데 모두 어리다. 사재(司宰; 權烜)는 5남을 낳으니 국(挶)은 생원이고, 손(損)․광(撗)․정(揁)․포(抱)․통(扌筒)은 어리며, 1녀는 별시위(別侍衛) 이맹지(李孟智)에게 출가했다. 사직(司直; 南景福)은 3남을 낳으니 분(昐)․장(暲)․난(暖)으로 어리며, 3녀중 장녀는 유학(幼學) 곽신(郭伸)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사선(司膳; 金鐵山)은 4남을 낳았는데 국광(國光)은 생원이고 겸광(謙光)․정광(廷光)․경광(景光)은 어리고 2녀도 어리다. 국광(國光)은 호군(護軍) 황보신(黃保身)의 딸을 취하여 1남을 낳으니 유(忸)이고, 1녀도 있는데 모두 어리다. 부사직(副司直; 崔善文)은 4남을 낳으니 한공(漢公)․한후(漢候)․한백(漢伯)․한남(漢男)으로 어리며, 3녀중 장녀는 부사정(副司正) 여인보(呂仁甫)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인보(仁甫)는 1남을 낳으니 범(範)인데 어리다.

소윤(少尹; 孟獻)․봉교(奉敎; 季友)는 모두 나의 동년 벗으로, 소윤이 와서 지문(誌文)을 청하는데 애절하였다. 나는 소윤과 함께 학문한 동업(同業)이자 동사(同仕)이며, 재차 동맹(同盟)을 하여 교분이 이미 두터웠던 지라 감히 졸문(拙文)을 사양하지 못하였다.

 

정통(正統) 4년 기미년(己未年; 1439, 세종 21) 겨울 10월 하순

 

중훈대부(中訓大夫)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지제교(知製敎) 세자우보덕(世子右輔德) 완산(完山) 유의손(柳義孫)은 삼가 짓다.

 

행자(行者) 학민(學敏) 산직(山直) 단동(丹同)

 
탈초;김영환/안동김씨문온공파고문
교열;김성한/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관

 자료인용;[김확(안동김씨문온공파)합장묘 출토복식] 2007.2.경기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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