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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청백리열전 -(1): 충익공 하담 김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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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4-02-26 15:13 조회2,7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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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열전 -(1): 충익공 하담 김시양
 
 
김시양(金時讓)
 
김시양<金時讓(선조 14년(1581)∼ 인조 21년(1643)>의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시호는 충익공(忠翼公), 본관은 안동이며,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김인갑(金仁甲)의 아들로 충주(忠州)에서 태어났다.
그는 총명이 뛰어나고 기개가 높은 데다가 도량이 넓어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2세와 14세 때 각각 아버님과 어머님을 여의고 24세 때인 선조 38년(1605)에 문과에 급제했다.
처음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당시 재상이었던 이원익(李元翼), 심희수(沈喜壽), 이항복(李恒福) 등은 한 번 그를 보고는 장차 나라의 그릇이 될 것이라고 크게 촉망했다. 그 뒤 전라도도사, 교리, 응교, 경상도· 평안도관찰사, 병조판서,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 강화유수,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죽음 앞에서도 태연자약
 
김시양은 판단력이 예리하고 국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가 광해군 3년(1611)에 전라도 도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감영의 도사는 감사 다음가는 벼슬로 감사와 함께 한 도의 순찰과 규찰을 분담하는 한편으로 특히 과거와 민정 등을 주로 관장하는 요직이었다.
그런데 그 해에 실시되었던 향시의 시험제목이 광해군의 폭정을 풍자했다는 조신들의 탄핵으로 함께 시험관을 했던 윤효선(尹孝先)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는 몸이 되었다. 그와 평소에 친교가 두터웠던 정세규(鄭世規; 뒤에 판서 역임)가 이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의 길목까지 나왔다. 그리고는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걱정하였다. 그러나 김시양은 평소와 다름없이 너무나 태연하므로 정세규가 도리어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서울에 압송된 김시양은 하옥되었고 의금부에서는 극형에 처할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짐짓 이를 숨기고 3일 간이나 모른 채 하고 있었다. 김시양은 그 동안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늘어지게 잠만 자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윤효선이 그를 발로 차서 깨운 다음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잠만 자는가”하고 책망하였다. 그러자 김시양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모두가 천명(天命)이 아닌가”하고 웃어 넘겼다.
김시양은 다행이 당시 정승이었던 이항복(李恒福)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함경도 종성(鐘城)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귀양길에 오르면서 자신의 심경을 시(詩)로 지었는데 지금도 다음과 같은 시구가 전하여지고 있다.
 
“마음과 행동이 본시 백일을 속이지 않았는데/ 길흉을 창천에 물어서 무엇을 하겠는가[심적본비기백일(心跡本非欺白日)/길흉원불문창천(吉凶元不問蒼天)]
 
 
속죄금(贖罪金) 안내고 귀양살이
 
김시양은 종성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광해군 10년(1618)에 유배지가 경북 영해(寧海)로 옮겨졌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큰 토목공사를 일으켰으나 공사비가 모자라서 그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죄인들이 돈을 바치면 방면하는 속죄법을 제정하여 전국에 하달했다. 이에 따라서 모든 죄인들은 서로 먼저 돈을 내고 풀려나려고 앞을 다투었다.
그러나 김시양과 임숙영(任叔英; 사헌부 지평역임, 뒤에 48세로 요절)만은 구차스럽게 돈을 바치고 귀양살이에서 풀려나는 것을 수치로 알고 이를 끝까지 거부했다. 그리고 김시양은 인조반정(1623)으로 풀려날 때까지 12년 동안 남북을 옮겨가며 유배지에서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는 뒤에 당대에서 가장 박학한 선비로 꼽혔는데 귀양살이 동안 그의 학구적 생활이 학문의 깊이를 더한 것이다.
김시양은 또 종성에 있을 때에는 그곳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그에게 학문을 배운 사람 중에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김시양이 작고한 다음에는 해마다 그에게 제사를 올리면서 유덕(遺德; 죽은 이가 후세에 끼친 덕)을 기리었다고 한다.
 
앞날을 보는 높은 식견(識見)
 
영해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김시양은 인조반정 후에 다시 조정에 소환되어 예· 병조정랑 등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그리고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반란이 있었을 때에는 영의정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였던 이원익의 종사관이 되어 서울 안현(鞍峴‘ 서대문 밖 질마재)에서 반란군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워 이등공신(二等功臣)이 되었다.
그는 그 뒤 승진을 거듭하여 경상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거쳐 인조 8년(1630)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에 취임했다. 이 체찰사는 지방에 병란이 있을 때, 왕을 대신하여 그 지방에 나아가 군무를 총괄하는 요직이었다.
당시 조선은 여진족인 금(金, 뒤에 청)의 침공과 이괄 등의 내란으로 온 나라가 어지러운 난국을 맞고 있었다. 인조 5년(1627)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다가 화친이 성립된 다음, 후금군은 철수하였으나 약조를 어기고 식량을 강요하는 한편, 명나라를 정벌하는데 필요한 병사와 배를 요구하는 등 압박을 더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시양은 이보다 17년이 앞선 광해군 2년(1610)에 사절단의 서장관[書狀官, 정사(正使), 부사(副使)에 다음 가는 삼사(三使)의 한 사람)]으로 명나라를 왕래하면서 이미 이러한 정세를 예견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했던 것이다.
즉 그는 명나라에서 돌아와서는 ‘문견록(聞見錄)’을 지어 광해군에게 올렸다. 그 중에서 김시양은 “만주에 자리잡은 여진족의 기세가 점점 뻗어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자면 요동을 통해서 가는 길을 믿을 수 없으니 바닷길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진언했다. 국제정세를 보는 그의 눈이 이처럼 예리하고 정확했던 것이다.
인조 9년(1631) 가을, 후금은 두 차례나 사신을 조선에 보내 세공을 바칠 것을 독촉했다. 김시양은 인조에게 “후금이 이미 맹약을 파기했으니 비록 늦기는 하였으나 지금이라도 방비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아뢰고 삼남(三南)지방의 무사들을 평안도에 보내서 그 곳 백성들을 훈련시킬 것을 건의했다.이 말을 듣고 조신들이 김시양에게 너무 겁이 많다고 말하자 그는 “체찰사인 내가 겁을 먹고 방비하지 않으면 누가 이 일을 하겠는가”하고 나무랐다.
그 이듬해 조정에서는 후금에게 세공의 감면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김시양은 아무 방비도 없이 그들의 요구를 물리치면 후금의 침공을 불러들이는 구실이 된다고 판단, 이를 반대했다. 그리하여 그는 평양을 순시 중에 세공감면을 요청하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가던 사신 김대건(金大乾)을 만나자 “어찌 이 한 몸을 아껴서 국사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바로 잡지 못하겠는가”하고는 사신이 후금에 가지 못하도록 평양에 억류하였다. 그러고는 임금에게 그 불가함을 상소했다.
이 상소를 받은 인조는 크게 진노하여 김시양의 관직을 삭탈하고 영월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후금에 간 김대건이 그들의 비위를 거슬러 그 곳에 억류되는 신세가 되자 조정에서는 비로소 김시양의 건의를 물리친 것을 후회하고 그를 방면합과 동시에 다시 조정에 소환했다.
 
깨끗한 사생활을 건의
 
귀양살이에서 소환된 김시양은 그 뒤 호조판서 등을 거쳐 인조 11년(1633) 9월에 두 번째로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무관으로 재능이 있으면서도 도와줄 배경이 없는 사람들은 서로 축하하면서 “이제는 무관들에게 다시 공정한 인사가 시행되겠다”하고 기뻐했다.
그러나 불해하게도 김시양은 지병인 안질 때문에 재임 1년 만에 사임하여 강화유수로 전보되었으나 역시 신병으로 곧 사임하였다. 그리고 인조 13년에 청백리로 녹선되었으나 그는 이제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그리하여 김시양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출발에 앞서 인조에게 상소하여 ㉮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금지할 것[금관절(禁關節)] ㉯ 관원들의 탐욕과 독직을 바로 잡을 것[정탐오(正貪汚)] ㉰ 공물(貢物)을 대신 바치고 납공자로부터 그의 2배를 징수하는 폐단을 막을 것[두방납(杜放納)] ㉱ 죄를 지은 양가의 처를 비복으로 삼는 일을 중지할 것[파사천량처(罷私賤良妻)] ㉲ 관원들의 사치를 개혁할 것[혁사치(革奢侈)] 등 다섯 가지 시폐를 교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또 재상들에게 서찰을 보내어 금년 겨울을 넘기지 않아서 반드시 오랑캐가 침범할 것이니 군사력을 튼튼히 하여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대책을 강구할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과연 그의 말대로 그해(인조 14년) 겨울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던 것이다.
김시양은 병자호란 중 남한산성으로 소환되어 시무책을 건의하는 등 나라를 위해 진력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벼슬이 주어졌으나 이를 사양하고 인조 21년(1643)에 작고하니 그의 나이 63세 때의 일이다.
 
뛰어난 기억력에 왕도 놀라
 
김시양은 앞날을 내다보는 안목이 높았을 뿐 아니라, 기억력도 남달리 뛰어났다. 어릴 때 어떤 집의 벽에서 논과 밭의 면적을 기록해 둔 것을 한 번 훑어보고는 이를 평생 동안 기억할 정도였다고 한다.
정묘호란이 있은 지 2년 후인 인조 7년의 일이다. 후금의 사람이 인삼 수천 근을 조정에 보내와서 베[포(布)]와 교역하고자 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를 쌀과 베와 교역하고자 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를 쌀과 베로 바꾸었다. 5년 뒤에 그 후금의 사람이 와서 조선에서 보낸 물품의 수량이 모자란다고 따졌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 일을 관장했던 관원들은 그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인조가 김시양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각 고을에서 받은 수량과 각 도의 감사 및 비변사에 올린 문서의 날짜까지 모두 기억하여 사실대로 글로 작성해 보고했다. 그 뒤에 원장부(元帳簿)를 찾아서 대조해 보니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본 인조는 “세상에 보기 드문 총명”이라고 탄복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 國朝名臣錄
[출처] 김시양(金時讓)|작성자 sichoi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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