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끝난 50여 년 후에 즉위한 제29대 충목왕(재위 1344-1348)도 개혁 군주로 꼽힌다. 충목왕의 개혁
특징은 整治都監(정치도감)이라는 개혁의 중심 기관을 설치했다는 데 있다. 정치도감을 현대의 정치 용어로 바꾸면 일종의
개혁위원회가 될 것이다.
충목왕의 개혁은 원나라 順帝(순제)의 명에 따라 시작했다는 특징도 있다. 폐정를 바로잡으라는 순제의 명을 직접 받고 귀국한
王喣(왕후)가 金永旽(김영돈)과 함께 정치도감을 설치해 폐정개혁에 나섰던 것이다.
정치도감이 작성한 개혁안의 핵심은 권문세족들이 볼법적으로 빼앗은 토지를 조사해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백성들을 양민으로 환원시키는 것이었다. 정치도감 소속의 정치관(整治官)들이 지방에 파견될 때 그 지방의 안렴사가 존무사 등을
겸임했는데, 이는 그들에게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기 귀한 조치였다.
양광도에 정치관으로 나간 김규는 기황후의 친동생 기주를 체포해 서울(개경)으로 압송한 후 정치도감의 순군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역시 기황후의 일족으로서 양민의 토지를 탈점한 기삼만을 체포해 옥에 가두는 등 강력한 개혁을 실시했다.
이는 매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원나라에 공물로 바쳐졌다는 순제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를 배경으로 한 기씨 일족의 위세는
당시 왕권을 능가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씨 일족의 전횡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쌍수를 흔들며 개혁작업을
환호했다,.
그러나 정치도감의 개혁 역시 2개월 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기삼만이 옥중에서 사망하자 권문세족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권문세족은 기삼만의 사망을 빌미 삼아 개혁의 부작용을 거론하고 나섰다. 또 권문세족들은 정치도감을
원나라의 정동행성이문소에 고발하는 매국적 작태도 서슴치 않았는데, 정동행성이문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치관 徐浩등을 잡아 가
두고 정치도감을 해체시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