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정정화(鄭靖和)선생의 남편 김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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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10-02 10:47 조회2,537회 댓글0건본문
[김의한[ 金毅漢 ]
이명은 재한(載漢)·의환(毅煥).서울 출신. 아버지는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지낸 김가진(金嘉鎭)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1919년 10월 국내에서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아버지 가진(嘉鎭)과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6월 상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의 상해지부 조직에 참가해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의거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해 5월 초 상해에서 항저우(杭州)로 이전을 하였다. 이 때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을 모시고 장쑤성(江蘇省) 자싱(嘉興)으로 피신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참가하였다.
1934년 1월 이동녕·김구·안공근(安恭根) 등과 함께 애국단(愛國團)을 조직하고 그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뤄양군관학교분교(洛陽軍官學校分校)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義烈團)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처(秘書處) 비서,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충칭방송국(重慶放送局)을 통해 국내에 있는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5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립되자 감찰위원회 위원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을 맡았다.
그 해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 정착한 뒤 중국 국민당(國民黨) 정부가 광복군(光復軍) 활동을 정식으로 동의한 뒤 광복군총사령부 주계(主計)에 선임되었다. 1943년 8월부터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아 활동하였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하였다. 부인은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이다.
상훈과 추모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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