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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꾼 정정화(鄭靖和)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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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10-02 10:44 조회3,29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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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진정한 영웅들 -3-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꾼 정정화                                                                                                                김창의(언론인)
 
정정화(1900-1991)여사는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사지를 넘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대한애국부인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직접 앞에서 나서기보다는 임시정부의 살림꾼으로 뒤에서 말없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시대의 부름에 성실하게 응답하다.
 
“나는 스스로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섰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럴 만한 능력도 자질도 없는 사람이고, 그저 평범한 여느 아낙네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사람은 시기와 분수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상황이 나로 하여금 임시 망명정부의 저 구석자리 하나를 차지하게끔 한 것이고, 내가 그 자리를 충실히 그리고 성실하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실제 그렇게 살았다. 당초 항일투쟁을 하겠다는 결단 같은 것은 없었다.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을 때에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합네 하는 식의 자의식이 없었다. 말 그대로 ‘시대 상황’이 이런저런 역할을 부여했을 때 그 부름에 마다 않고 즉각 응했을 뿐이다.
사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광복을 맞기까지 27년 동안 한 결 같이 임시정부와 함께 하면서 임정 요인들의 망명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명문가의 며느리, ‘단신 망명’을 결행하다.
 
정정화(鄭靖和. 1900-1991)가 그 주인공이다. 3.1운동의 열기가 한풀 수그러든 1919년 10월의 어느 날, 시아버지 김가진(金嘉鎭/1846-1922)과 동갑나기 남편 김의한(金毅漢/1900-1964)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신문을 보고서야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있었다. 상해로 망명했다는 것이었다. 스무 살의 젊은 부인이었던 정정화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가진은 누구인가? 안동김씨 경파(일명 장동김씨)의 김상용 선생의 후손(선원계)으로서 대한제국 법부대신을 지낸 대표적인 개화관료의 한 사람이었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뒤 모든 관직을 버리고 대한협회장 등으로 동분서주했으나 한일합방 뒤엔 그마저 중단하고 서울 청운동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자리 잡은 저택 백운장(현재 자하문터널 위의 몰몬교회 자리)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러나 그 자택마저 송사에 걸려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되자 사직동, 체부동의 작은 집을 전전하며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하고 총재가 되었다. 이 대동단 총재 자격으로 망명한 그는 나라가 망하던 대한제국 시기의 대신급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정정화의 판단은 아주 신속했다. 자신도 상해로 가서 시아버지와 남편을 공양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순전히 스스로의 결단이었다. 문제는 상해로 가는 길이었다. 다행히도 그이 상해행에 동의해준 친정아버지가 친척 한 사람을 안내인으로 붙여주었다. 그렇게 해서 정정화는 1919년 12월 상해에 도착했고, 이로써 임시정부와 함께 하는 27년의 삶이 시작되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실천 속에서 ‘나라’와 ‘독립’에 눈뜨다.
상해에 도착해서 눈으로 본 망명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집세 내고 끼니 해결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말하자면, 먹고 사는 일 자체가 힘들었던 것이다. 현지에서 경제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국내외 동포들의 보급선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던 때였다. 망명 두 달여 만에 정정화는 겁도 없이 임시정부의 법무총장 신규식을 찾아가 친정에 찾아가 돈을 얻어 오겠다고 제안을 한다.
임정 수뇌부는 논의 끝에 정정화를 국내로 밀파했다. 연통제의 루트를 따라 1920년 3월 초 서울에 도착한 정정화는 약 20일 동안 김가진이 써준 암호편지 등을 갖고 모금활동을 벌였다.
정정화가 상해를 떠날 때는 비밀리에 움직였지만 돌아오자 상해 망명사회에서 단박 화제가 되었다. 조완구 선생은 그를 일컬어 “몸 전체가 담(膽)덩라리”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정정화는 1921년과 1922년에도 한 차례씩 임정의 밀명을 받고 국내로 잠입해 모금활동을 벌였다.
키가 150cm가 될까 말까 한 그의 용기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용기라는 게 대체적으로 타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계기에 결정적으로 키워지기도 하는 법이다. 첫 번째 국내 밀파 때 만난 연통제의 신의주 거점 이세창은 정정화로 하여금 ‘조국’과 ‘독립운동’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세도가나 집권자에 억눌려 지내기만 했을 뿐 조국으로부터 이렇다 할 혜택도 받지 못한 무명의 백성이 숨통 끊긴 조국을 다시 찾겠다고 위험을 무릅쓰는 모습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정정화는 ‘이 나라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를 되뇌며 자신이 하는 일에 새롭고도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임정의 며느리’로 다시 태어나다.
 
이렇게 국내를 오가는 일을 빼놓으면 정정화는 임정의 어른들을 모시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시아버지 김가진은 1922년 임정의 고문직으로 별세했다. 봉양할 시아버지가 더 이상 계시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제 이동녕. 이시영. 김구. 조완구 등 ‘홀아비 임정 어른들’을 정정화에게 모두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주로 엄항섭의 부인 연미당과 함께 이들의 생활을 챙기는 게 일상사가 되었다. ‘김가진의 며느리’에서 ‘임정의 며느리’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그렇게 지내던 1932년 4월의 어느 날, 김구의 부탁으로 이동녕, 조완구 등과의 점심 식사를 차리게 되었다. 식사 후 김구가 술 한 병과 신문을 사다달라고 다시 부탁했다. 평소 술을 입에 대지도 않던 김구가 그런 부탁을 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시내에는 호외가 돌고 있었다. 그때서야 정정화는 알 수 있었다. 청년 윤봉길이 홍구공원에서 도시락과 물병 폭탄으로 사라카와 일본군 상해파견사령관을 폭사시킨 것이 김구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정정화의 머릿속에서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났다. 김구가 빈 도시락을 하나 가져와서는 거기에 밥을 한번 담아보라고 한 일이었다. 그때는 시키는 사람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고, 일을 하는 사람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금 와서 보니 그게 다 윤봉길 의거 예행연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워낙 심지가 깊고 명민했던 정정화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임정의 내밀한 일들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유난히 깊고도 절실했던 김구 가족과의 인연
 
김구와의 개인적인 인연은 훨씬 깊었다. 김의한-정정화 부부는 1922년 감가진이 별세한 위 프랑스 조계지 내의 영경방 10호 집을 마침 일가족이 상해에 도착한 김구에게 넘겼다. 그뿐인가, 김구의부인 최준례가 1924년 조계지 밖의 폐병원에서 세상을 떠날 때 임종을 지킨 것도 이 부부였다. 그 뒤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1859-1939)까지 손자를 데리고 한때(1925-1934) 귀국하자 정정화에게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하며 가장 임의롭게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이런 인연의 연장선상에서 정정화는 만주사변 발발과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가 다시 중국으로 모셔온 곽낙원 여사를 1935년 9월 이후 반년 가까이 남경에서 직접 모시고 겨울을 나기도 했다. 이미 80세에 가까운 고령이지만 워낙 깔끔하고 대범한 성격이었던 곽낙원 여사는 누구의 신세를 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이 정정화에게 좀 부탁하겠다고 말하자 그때서야 마다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정이 든 곽낙원 여사가 별도로 옮겨간 피난지 중경에서 1939년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정화는 비통한 마음에 잠겼다. ‘총과 칼을 들지 않고도 그토록 씩씩하고 굳세었던 분’, ‘어린 창수를 백범(白凡-김구)으로 만든 분’은 분명히 ‘민족의 어머니’이고 ‘민족의 큰 별’이었건만 그런 분이 하나씩 자취를 감출 때마다 조국의 독립이 그만큼 멀어지는 것 같았다.
 
임정이 가장 어려웠던 피난 시기에 안살림을 맡다.
 
그러나 정정화는 그런 감상에 오래 잠겨 있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해의 프랑스조계지를 탈출한 임시정부가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유랑생황에 접어들던 무렵부터 그는 공식적으로 임정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 4월 중경 근처의 기강에 도착할 때까지가 임정으로서는 가장 혹독한 시련의 세월이었다.
장사, 광주 등 100여 명에 이르는 임정요인과 그 가족들이 옮겨 가는 곳마다 일본군의 포화가 뒤를 따랐다. 유주라는 곳에 이르기까지 40여일은 사람이 끄는 목선을 타고 주강(珠江)을 거슬러 지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대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정정화 등의 몫이었다. 참으로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모질다는 생각도 했을 법하건만 그는 불평 한 마디 없이 그 모든 과정을 견뎌냈다.
그런 모든 과정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l7년 가까운 세월을 피난지 중경과 그 인근의 기강, 토쿄 등지에서 지내는 사이에 정정화도 이제는 그가 처음 만나던 시절의 김구만큼의 연배가 되었다.
 
김가진-김의한-정정화의 마지막 메시지는 ‘민족통일’
 
광복 후 귀국한 김의한-정정화 부부는 이승만 정권의 자의적 통치 아래에서, 또 냉전의 비이성적 광풍 속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는 굳이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김가진, 김의한, 정정화 등 일가족이 모든 명예와 재산을 버리고서 20세기 한국사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남긴 마지막 메시지 한 가지만은 되씹어볼 만하다.
김가진의 묘소는 지금도 중국 상해의 송경령 능원에 있고, 한국전쟁 때 납북된 김의한의 묘소는 한반도 북쪽 평양의 애국열사능에 있다. 그런가 하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정정화의 묘소는 한반도 남쪽 대전의 국립현충원에 있다. 한국의 대표적 노불리스 오불리주 가문인 이들 일가족의 사후 이산(死後 離散)이 우리에게 무언(無言)의 대성(大聲)으로 촉구하는 것은 독립의 완성이 바로 민족통일에 있다는 것이다.
 
백범회보 제40호/2013년 가을호 에서 옮겨적다.(솔내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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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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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한선생과 정정화선생의 아드님이 바로 김자동(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