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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과거제도-2- 종류와 시험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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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5-28 12:48 조회3,4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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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과거의 종류
 
1) 제술업
고려에서 시행된 과거의 종류는 제술업·명경업·잡업 등 세 계통으로 분류되어 있다. 제술업은 고려의 과거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시험이다. 제술업은 일명 진사과라고도 하고, 제술업 합격자를 진사라고 칭한다. 14)
제술업의 시험 과목은 계수관시에서는 시가 부과되어 오언육운시(五言六韻詩)를 제술하였다. 국자감시에서는 부(賦)나 육운시(六韻詩) 혹은 십운시(十韻詩)에서 선택하여 제술하게 하였다. 예부 시험에서는 예경(禮經)·육경의(六經義)·사서의(四書疑)등 경학과 시·부 등 문예, 논(論)·책(策) 등 시무에 대한 과목을 선택적으로 부과하였다. 예부시험은 초장·중장·종장으로 시험을 치르는데, 초장·중장·종장에 순차적으로 모두 합격하여야 예부 시험의 합격자가 될 수 있었다.
제술업 합격자의 등급은 갑과·을과 혹은 갑과·병과 등으로 이분하거나, 갑과·을과·동진사 혹은 갑과·병과·동진사 등으로 삼분하였다. 각 등급의 정원은 일정하지 않았다. 신종대에 와서는 을과 3명, 병과 7명, 동진사 23명 등 33명으로 합격 정원이 정해졌으나, 33인의 합격 정원을 지켜 합격자를 선발하게 된 것은 충렬왕대이다.
제술업 시험 설행 시기는 봄에 시험을 치르고 가을이나 겨울에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1004년(목종 7) 시험 시기를 3월로 정하고, 가을이나 겨울로 미루던 합격자 발표를 시험이 끝난 후에 바로 하도록 하였다.
제술업은 958년(광종 9)부터 공양왕 4년(1392)까지 약 250회가 설행되었고, 총 급제자는 6,330명이다. 제술업 급제자들은 경관직과 외관직에 제수될 수 있었다. 제술업 합격자가 제수받는 경관직은 권무(權務)·9품·8품의 한림원·예문관 등의 문한직이나 국자감의 학관직을 받는 경우와 권무(權務)·9품·8품의 경관 관사 일반직 등을 받는 경우가 있다. 외관직은 군현의 사록·서기·판관·현위(縣尉)·진부장(鎭副將) 등이 제수되었다. 제술업 급제자들은 외관직보다는 품계가 낮더라도 경관직에 제수되는 것을 더 선호하였다. 경관직은 시기에 따라 제수되는 관사에 차이가 있다. 무신정권기에는 주로 경관 일반직에 제수되는 사례가 많았으나, 충렬왕 이후로는 문한·학관직의 제수가 압도적이었다. 고려 초기에는 제술업에 합격되면 바로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문종대 이후로는 1년~5년 정도 기다려야 초직에 제수되었다. 15)
 
2) 명경업
명경업은 제술업과 마찬가지로 956년(광종 9)부터 시행되었다. 명경업의 시험 체계도 계수관시-국자감시-예부 시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제술업 합격자를 진사라 하였으나, 명경업 합격자는 명경이라고 하였다. 명경업의 시험 과목은 「주역」·「상서」·「모시」·「예기」·「춘추」 등 5경이었다. 시험방법은 첩경(貼經)과 강독(講讀)이 있었다. 첩경은 앞뒤의 글을 가리고 1행만 보여주는데, 그 중 3글자만 첩지(貼紙)로 가려서 그 3글자를 알아맞히는 시험이다. 강독은 일정 대목의 경전을 읽고 구두(句讀)와 해석이 정확한가를 시험하는 방법이다. 두 시험 방법 가운데 첩경을 이틀 동안 먼저 치르고 다음에 강독 시험을 치렀다. 명경업은 계수관시에서는 각 1궤(机)씩 부과하고, 국자감시에서는 9궤~12궤를 부과하였다. 예부시험에서는 「상서」 전공자와 「주역」 전공자를 나누고, 전공에 따라 과목을 삼장(三場)으로 나누어 시험하였다. 명경업 급제자의 등급은 이과(二科)·삼과(三科)로 표시되었다. 명경업 합격자 등급인 이과와 삼과는 합격 성적에 다른 구분인지, 아니면 전공 구분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또한 합격 정원 역시도 확인되지 않는다. 시험 시기는 초기에는 제술업과 같은 시기에 시험을 치렀으나, 1004년(목종 7) 제술업보다 빨리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발표는 제술업과 같이 행하도록 하였다. 명경업은 제술업이 설행되는 전해 11월에 시험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명경업은 제술업과 같이 설행되었기 때문에 958년(광종 9)부터 공양왕 4년(1392)까지 약 250회가 설행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명경업 합격자를 낸 시험은 139회만 확인된다. 139회의 명경업 시험을 통해서 458명의 합격자를 내었다. 명경업 합격자는 경관직으로 경관 관사의 일반직에 제수되는 경우, 문한직으로는 비서성 관직 그리고 학관직에 제수되는 경우가 있다. 문한직의 경우 제술업 합격자가 제수되었던 관직과 비교하면, 한림원이나 춘추관의 관직에는 제수되지 못하였다.16) 이러한 경향은 명경업은 사장보다는 경학을 주로 시험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3) 잡업
잡업도 958년(광종 9)부터 설행되었다. 이때 설행된 전공은 의업· 복업(卜業) 두 가지에 한정되었으나, 나중에 지리업(地理業)· 율업(律業)· 서업(書業)· 산업(算業)· 삼례업(三禮業)· 삼전업(三傳業)· 하론업(何論業) 등 9가지 전공으로 늘어났다. 고려시대에는 잡업도 국자감에서 교육하였다는 것과 유교과목인 삼례· 삼전· 하론이 잡업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조선시대 잡과와는 다른 특징적인 측면이다.
잡업의 시험 체계는 제술업· 명경업과 같이 계수관시-국자감시-예부시험으로 되어 있다. 잡업의 전공이 다양하여서 두 차례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율업· 산업· 서업· 의업· 복업· 지리업 등은 명경업과 동시에 실시되었고, 삼례업· 삼전업· 하론업은 위의 시험이 끝난 다음 실시되었다. 잡업도 초장· 중장· 종장의 3단계로 구분해서 부과하였다. 시험 방법은 초장과 중장은 대체로 첩경으로 하였으며, 종장은 독경(讀經)· 파문(破文)· 의리(義理)를 시험하였는데, 과업에 따라서는 실시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하론업은 상소문· 장계 및 기타 왕에게 글월을 정자로 쓰는 진서주장소첩(眞書奏狀小貼)과 긱산(喫算)이다. 시험 과목은 과업에서 익혀야 하는 전문서적이다. 시목과목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17) <표 1> 잡업의 시험과목 의업 『소문경(素文經)』·『갑을경(甲乙經)』·『본초경(本草經)』·『명당경(明堂經)』·『맥경(脉經)』·『 침경(針經)』·『난경(難經)』·『구경(灸經)』
복업
지리업 『신집지리경(新集地理經)』·『유씨경(劉氏經)』·『지리결경(地理決經)』·『경위령(經緯令)』·『 지경경(地鏡經)』·『구시경(臼示經)』·『태장경(台藏經)』·『소씨서(蕭氏書)』
율업 율(律)·령(令)
서업 『설문(說文)』·『오경자양(五經字樣)』·『서품장구시(書品長句詩)』·『해서(眞書)』·『행서(行書)』·『전서 (篆書)』·『인문(印文)』
산업 『구장(九章)』·『철술(綴術)』·『삼개(三開)』·『사가(謝家)』
삼례업 『예기』·『주례』·『의례』
삼전업 『좌전』·『공양전』·『곡량전』
하론업 『하론(河論)』·『효경(孝經)』·『곡례(曲禮)』
잡업 합격자 등급은 명경업과 마찬가지로 과업명을 앞에 붙이고 등급을 표시하였다. 예를 들면 '의업이과3인'으로 표시하였다. 잡업은 제술업·명경업과 같이 설행되었으므로 설행 횟수가 같을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으로는 설행 횟수를 확인할 수 없다. 또한 합격 인원도 분명하지 않다. 잡업 합격자는 대부분 해당 전공이 필요한 관사의 이속(吏屬)과 하급 관원으로 진출하였다.18)
 
14) 제술업 합격자를 진사라고 하는 것은 국자감시 합격자를 진사라고 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15) 박용운, 앞의 책, 322~323쪽.
16) 박용운, 앞의 책, 592~593쪽.
17) 『고려사』권73, 선거 1, 과목1, 선종 1년 11월 판(判.)
『고려사』권73, 선거 1, 과목1, 인종 14년 11월 판(判.)
18) 박용운, 앞의 책, 624쪽.
 
 
4, 과거 시험 절차
 
고려 초기 과거 시험은 규칙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 1084년(선종 원년)에 3년에 1회씩 설행한다고 정하였으나, 이것은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사』 선거지에 의하면, 과거가 매년 혹은 2~3년 간격으로 설행되고 있다.
고려 초기에는 과거 시험이 주로 3월에 실시되고, 가을이나 겨울에 합격자를 발표하여 응시자들이 합격 여부를 확인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1004년(목종 7)에는 과거법을 수정하였다. 명경업과 잡업은 제술업이 설행되기 전 해 겨울 11월에 시험이 설행되었고, 제술업은 3월에 시험을 설행하였다. 제술업 시험 설행 후 10일 만에 등급을 정하여 합격자를 발표하였는데, 이때 명경업과 잡업의 합격자도 같이 발표하였다.
그렇다면 과거 응시자가 시험을 치르는 절차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시험 절차에 관한 자세한 자료는 없으나 『고려사』 선거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응시자는 행권(行卷)과 가장(家狀)을 시험관리소인 공원(貢院)에 제출해야 한다. 행권은 응시자 이름, 생년, 사조(四祖: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를 적은 원서이며, 가장은 행권에 적은 세계(世系)를 증명하는 증빙서류이다. 행권과 가장은 제술업의 경우 12월 20일까지, 명경업· 잡업은 11월을 기한으로 제출되어야 했다. 다만 관직자나 부모의 상이 시험기일 직전에 끝난 경우에는 서류를 접수하는 기일이 지나더라도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부모상을 당한 경우에는 27개월이 지나야 응시가 가능하였다. 부모상의 기한에 대한 검토는 중앙은 부(部)· 방(坊)· 리(里)의 책임자, 지방은 그 고장 기인(其人)이나 사심관(事審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응시자들은 시험지를 시험이 설행되기 며칠 전에 공원에 제출해야 한다. 시험지에는 첫머리에 이름, 본관, 사조(四祖)를 기록하고, 그 부분을 풀로 봉하여 제출하여야 한다. 이것은 시관이 시험 등급을 공정하게 매기게 하기 위한 것이다. 시관인 지공거는 문하부와 말직사에서, 동지공거는 경(卿)· 감(監)이 선출한다. 선출된 시관은 시험 전날 오후에 초장· 중장· 종장의 시험을 적어서 왕에게 올리면, 왕이 시험 문제를 낙점하여 정하였다. 시관은 왕이 낙점한 시험 문제를 공원에 가져가 시험 당일 내걸게 된다.
시험 당일 왕의 비서인 승선(承宣)이 어보를 가져오는데, 이 어보는 시험지에 도장을 찍는데 사용되었다. 시험이 끝난 후 시관이 등급을 매기면 승선이 발표하는데, 발표 절차의 초장과 중장은 같다. 최종 시험인 종장의 합격자는 시관이 등급을 매겨 왕에게 바치면, 왕이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최종 합격자가 발표되면, 합격자들은 시관인 좌주를 찾아가 예를 행하고, 좌주는 이들을 자기 집에서 맞아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최종 합격자에게는 홍패가 하사되었다.
홍패는 원칙적으로 사령이 합격자의 집에 가서 하사하였다. 사령이 홍패를 가져오면, 합격자의 집에서는 사령을 대접하는 행사가 있었다. 홍패를 하사하는 사령을 대접 하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궁궐에서 직접 홍패를 하사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홍패를 합격자의 집에 가서 하사하는 것은 합격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 동리에도 영광스럽게 하여 학업을 닦고자 하는 의욕을 북돋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서 계속 합격자의 집에 홍패사령이 파견되었다. 19)
과거 합격자 명단을 계적(桂籍)이라고 하고, 같은 해 과거 합격자 명단을 모아놓은 것을 『동년록』이라 한다. 『동년록』은 국가에서 만들어서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가에서 동년록을 모아서 정리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현존하는 고려시대 『동년록』은 극히 적다.20)
현존하는 『동년록』은 조선시대 『국조문과방목』의 부록으로 ‘전조과거사적(前朝科擧事績)’이란 이름으로 붙어 있는데, 고려 후기 동년록 일부만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 이외에도 『고려열조등과록』, 『해동방목』이 있다.
『전조과거사적』에는 동년록이 16개가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동년록』은 1290년(충렬왕 16)방, 1360년(공민왕 9)방, 1362년(공민왕 11)방, 1368년(공민왕 17) 송산친시방, 1369년(공민왕 18)방, 1371년(공민왕 20)방, 1374년(공민왕 23)방, 1376년(우왕 2)방, 1377년(우왕 3)방, 1380년(우왕 6)방, 1382년(우왕 8)방, 1383년(우왕 9)방, 1385년(우왕 11)방, 1388년(우왕 14)방, 1389년(공양왕 1)방, 1390년(공양왕 2)방 등 16개이다. 동년록의 수록 내용은 전력, 이름, 생년, 본관 그리고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의 직역과 이름이다. 외조부의 경우에는 직역과 이름 이외에 본관까지도 기재되어 있다.21)
 
19) 빅용운, 앞의 책 627~628쪽.
20) 허흥식, 『고려과거제도사 연구』, 일조각, 1981, 240~241쪽
21) 『국조문과방목』, 태학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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