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신800주년 김방경 학술대회 기조강연-김광철(동아대교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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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5-14 12:09 조회3,091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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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신800주년 김방경 학술대회 기조강연]
[탄신800주년 김방경 학술대회 기조강연]
13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고려사회
김광철(동아대)
13세기 고려사회는 김방경(1212-1300)의 생애와 함께 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학술대회명으로 쓰고 있듯이, 13세기 동아시아 사회는 끊임없는 전쟁과 국제질서가 요동치는 격동의 시기였다. 김방경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무장과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바로 이 같은 격동의 현장이었다.
김방경은 무인정권이 지속되는 속에서 태어나 관료 생활을 하다가 무장이 되어 여몽전쟁에 참여하고, 삼별초항쟁의 진압과 일본정벌의 주장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몽골 제국질서하의 고려국이라는 변화된 대외관계와 정치 환경 아래에서 부원세력의 공세 앞에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수상의 자리를 역임하면서 정국 운영을 주도하는 한편, 자신의 가문을 세족의 지위로 성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오늘 학술대회에서는 김방경관련 기록의 검토, 안동김씨 계보관념과 족보간행, 원으로부터 문산계 수령문제, 그 후손과 안동김씨 가문의 위상 등에 대해 논의될 것이다. 이는 김방경의 생애와 그 가문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여원관계 성립 후 고려 사회상을 조명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1. 전쟁. 동아시아, 그리고 고려
13세기 동아시아 사회는 전쟁으로 날이 새고 지는 전장이었다. 전쟁은 몽골제국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1206년 몽골족 중심으로 초원지역 제세력의 통합을 마친 칭키스칸은 이제 주변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첫무대가 서하 원정이었으며, 이어서 금나라 정복이 다음 목표였다.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하는 시기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금나라를 정점으로 남송, 고려, 일본 사이에 서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이것이 복잡한 양상을 보이면서 갈등과 대립의 관계도 내재해 있었다. 특히 금나라는 요를 멸망시킨 후 그 판도 내에 거란을 통합해 넣음으로써 외적 충격이나 통제가 이완될 때 이들이 분리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었다. 실제 그것은 현실화 하여 대요수국(大遼收國), 동하국(東夏國)등의 출현으로 나타났다. 고려의 경우 무인집권이 시작되면서 강력한 통제체제 속에 들어가지만 사회모순이 심화되면서 이에 맞서 싸우는 농민봉기와 천민항쟁이 벌어지고 있어서 이것이 외세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또 다른 변수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조공책봉이라는 명목적 상하관계와 맹약이라는 평등관계로 유지되고 있던 12세기 이래 동아시아 다원적 국제질서는 몽골제국의 정복전쟁으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몽골은 서하정복(1205-1227), 몽금전쟁(1211-1234), 토번 정복(1240), 大理정복(1252), 여몽전쟁(1231-1259), 몽-남송전쟁(1235-1279)을 차례차례 수행하여 정복한 지역을 내지화 하거나 귀속시켰고, 일본에 대해서는 두차례(1274, 1281), 安南에 대해서는 네차례(1257, 1283, 1285, 1287)에 걸쳐 정복전쟁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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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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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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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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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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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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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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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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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차(0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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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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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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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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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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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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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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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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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차(31,32)
3차(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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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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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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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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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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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53),
6차(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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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5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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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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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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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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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항쟁(7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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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6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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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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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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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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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차(83,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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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동아시아 지역, 나아가 세계정복을 달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외부로의 팽창, 지도자 칭기스칸의 천재적 전략 전술, 기마유목군단의 군사적 우위, 피정복인의 기술과 인력을 동원하여 이를 전쟁에 투입시키는 능력, 정복전이 재산을 증식시키는 공동사업이라는 인식 등등이 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력시위와 외교전을 통해 주변 국가와 공동전선 구축하지 못하도록 차단시킨 것도 정복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주효했다. 다원적 국제관계의 빈틈을 파악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는 금나라 정복과정에서 남송과 고려에 대한 전술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몽골제국이 금나라를 정벌할 때, 12세기 이래 금, 남송, 고려 간에 맺어졌던 책봉-조공관계의 다원적 국제질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3국간에 정기적인 사절이 상호 파견되는 가운데에도 전쟁이 발생했을 때 군사 파견이나 경제적 지원 같은 협력체제는 전혀 작동되지않았다. 몽골의 금나라 정복을 자국의 위기로 인식은 했지만, 정복에 대응한 공동전선을 모색한 구석은 발견되지 않는다. 몽골의 군사적 시위 앞에 다원적 국제질서의 허점이 여지 없이 드러난 것이다
오히려 몽골은 금을 정벌하기 위해 남송과 고려를 무력 시위와 외교전을 통해 이로부터 분리시키는 방법을 구사했다. 강동성전투를 통해 고려와 형제맹약을 맺고 남송과 화친을 맺어 2차 대금전쟁에서 송으로 하여금 맹종(孟珙)을 파견하여 돕도록 유도한 것은 그러한 전술이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1235년부터 남송 정복전쟁을 시작하면서 같은 시기에 고려를 동시에 침탈한 것도 고려의 협력을 차단하려는 봉쇄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231년 몽골 침입 이후 1280년 초까지 고려는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들 전쟁은 대몽항쟁, 삼별초항쟁, 일본정벌로 이어졌다. 1231년부터 1257년까지 본격적 대몽항쟁은 전면전 기간이 10년 남짓이지만 26년이라는 전시체제 하에 있었다. 이 대몽항전은 고려가 ‘출륙환도’, ‘국왕친조’, 이른바 ‘6사’의 이행을 받아들임으로써 전쟁이 일단 종식되고 불평등 관계의 화친으로 일단 귀결되었다.
삼별초항쟁은 몽원과 불평등 강화를 맺은 개경정부와 그 지원세력인 원군, 즉 여몽연합군에 맞선 ‘진도정부’의 항전이었다. 이 전쟁은 내전적 성격도 함께 지닌 것이었기 때문에 제주도 항전을 끝으로 삼별초 항쟁이 종식된 후 또 다른 여파를 예고하고 있었다. 여원 왕실혼이 이루어지는 등 고려는 몽원제국의 제국질서 속에 깊숙이 편입되는 한편, 국내적으로는 지역간, 그리고 지배세력 사이에 갈등이 내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려는 몽원제국의 요구에 따랄 일본정벌에 참여했다. 고려가 기획하고 추진한 것이 아님에도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대리전을 치룬 셈이다. 1274년의 1차 정벌은 몽골이 남송정벌을 수행하면서 그 배후를 차단하는 목적도 갖는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는 전쟁에 따른 부담을 고려하여 가급적 외교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참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일본정벌은 실패로 끝남으로써 오히려 인명의 살상과 경제적 피해를 당해야만 했다. 게다가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함의 건조, 군량 확보에 따른 재정적 부담을 안아야 했다.
2.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과 고려의 위상
13세기 초반 금나나 정복에서부터 시작된 몽골의 정복전쟁으로 이제까지 유지되어온 동아시아 다원적 국제관계는 해체되고 몽골제국의 일원적 제국질서가 자리잡게 되었다. 금, 남송, 서하, 서요(西遼), 대리(大理)는 몽골제국의 내지로 되어 원조(元朝)가 건설되었고, 일본과 안남은 독립국이 유지되었으며, 고려는 토번, 포감(蒲甘)등과 함께 또 다른 형태로 제국 질서 속에 들어갔다.
전쟁 종식 후 몽골제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고려는 어떠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고려의 ‘출륙환도’, ‘국왕친조’등을 전제조건으로 여몽전쟁이 종식된 후 몽골제국이 고려에 요구한 것은 이른바 ‘6사(納質, 助軍, 輸糧, 設驛, 供戶數籍, 置達魯花赤)’의 이행이었다. 그 이행 여부를 떠나 6사는 몽골제국이 정복 지역에 공통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며 종속 정책의 핵심이었다는 점에서 몽골제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고려-원 관계와 고려의 위상을 규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이 같은 6사 요구가 그대로 이행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것이 여원관계와 고려의 위상을 규정하는 정도에 대해서는 달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여원관계와 고려의 위상을 규정짓는 요소로서 이들 6사 문제와 함께 ‘開府儀同三司 征東行中書省左丞相 駙馬 上柱國 高麗國王’이라는 책봉호 문제, 정동행성의 성격, 왕실혼인 문제 등을 주목하고, 몽골제국의 복속인 정책에 대해서도 검토한 바 있다. 이들 제 요소는 양국간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선 고려의 대상이 될 것이며, 이들 외에도 여원관계를 규정하는 지표들은 왕위계승 문제, 관제개편과 국가기구의 성격, 경제적 관계, 유배지 활용 등 짚어볼 문제들이 많을 것이다.
여원관계 성립 후 고려 국왕은 원의 지원이 지속되는 한 국내에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국왕 부자 사이에 왕위가 넘나드는 중조(重祚)현상이 나타나고, 충선왕과 충혜왕처럼 원나라에 의해 체포, 구금, 유배당하기도 하는 등 원나라의 의도에 따라서 왕위의 유지가 불안정한 형편이었다. 원 공주와의 혼인이 왕위계승의 전제 조건처럼 작동하고, 원 황실이나 권신의 의도에 따라 왕위가 교체되는 현실은 당시 여원관계를 규정하는 요소라 아니할 수 없다.
충렬왕 원년의 관제 개편에 대해서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3성6부체제가 첨의부-4사체제로, 도명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편된 것이 ‘僭濫’이라는 원의 지적에 따라 책봉-조공관계하 제후국에 걸맞게 ‘격하’시키는 수준에 그친 것인지, 아니면 더 나아가 현지기관과 현지인을 활용하는 간접지배 방식이 관철되고 있었던 것인지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아울러 관제개편과 함께 ‘도감’ 등의 형태로 등장하는 각종 기구들의 운영방식과 그 성격에 대해서도 여원관계의 측면세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원관계의 실상을 규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는 경제적 관계이다. 여몽전쟁도 정복전쟁으로서 성격을 갖는 것이라면,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정복의 목적에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실현이라는 측면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여원관계 성립 이후 나타나는 사급전의 확대를 통한 토지겸병 문제, 과렴.부가세.현물세의 수취, 국신색(國贐色)반전도감(盤纏都監)등과 같은 재정기구의 상설화로 나타나는 재정 수요의 확대 등 토지지배와 수취, 재정문제가 여원관계로부터 어떻게 규정되고 있었는지 검토의 대상이 된다. 교역관계만 하더라도 원제국 질서 내에서의 교역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원의 교역체계 안에서 고려는 어디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인지 살필 필요가 있다.
고려가 원나라 사람들의 유배지 가운데 하나로 활용되고 있었다는 점도 당시 여원관계를 규정하는 요소이다. 여원관계가 성립된 후 충렬왕 초부터 14세기 전반 충혜왕대까지 20여회에 걸쳐 처벌당한 원나라 사람들이 고려 영토 내의 섬으로 유배되고 있었다. 이들 신분은 왕족에서부터 도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고려로 유배시킨 것은 원나라가 고려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고려를 그들의 내지로 인식하여 활용한 것으로 이해한 바 있다. 원나라 사람들의 유배지가 운남, 토번 등 그 지배 범위 한에 드는 지역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몽원제국이 고려를 자국과 동일시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법적 통제가 미칠 수 있는 지역으로 인식한 것은 아닐까? 고려 국내에서 원나라의 유배를 거부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충혜왕대에 뒤에 순제가 되는 토곤테무르의 고려 유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무고사건은 유배에 대한 고려의 대응이 어떠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요양행성과 고려가 합세해서 토곤테무르를 옹립하려 했다는 무고사건이 터졌을 때, 원나라는 토곤테무르를 즉각 소환하여 광서 정강(瀞江)르로 이배하는 한편, 충혜왕을 퇴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 연구자들이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 1세기 고려사회를 시기구분하는 용어로 즐겨(?)써왔던 원간섭기론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원간섭기론에 대한 비판은 최근 고려-몽골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집중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에서 촉발되었다. 이들 논쟁은 결국 여원관계와 고려의 위상이 ‘자주’와 ‘종속’사이 어느 지점에 있었는지 하는 것이었다. 논쟁은 투하령론, 속국-속령론, 책봉-조공관계론을 대별할 수 있다. 투하령론과 속국-속령론이 몽골제국의 지배와 종속을 강조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 입장에서 ‘원간섭’정도로는 그 종속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비판하고 이 보다는 ‘事元期’로 설정하는 것을 선호한다.
상대적으로 자주를 강조하는 입장인 책봉-조공관계체제론도 원간섭기론에 대해 회의적이다. 책봉-조공관계의 전형을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책봉국과 조공국 간의 상하관계를 인정하면서 다양한 형태를 조명할 때 원간섭기도 이렇게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봉-조공관계론을 수용하는 입장은 더욱 논의를 진전시켜, 원간섭기를 13세기 후반기와 14세기 전반기로 구분하고, 후자의 시기를 ‘지배와 침탈’, ‘복속과 간섭’으로 규정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는 한편, 나아가 아예 ‘원간섭기’를 설정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한다. 이처럼 ‘원간섭기론’은 자주론과 종속론 양측으로부터 도전받고 있다.
‘간섭’이라는 용어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용한 배경에는 ‘복속’과 ‘지배’로 규정했던 식민사학의 이해방식으로부터 탈피하여 자주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행성(行省)’과 ‘부마(駙馬)’로 상징되는 원나라의 통제방식을 인정하면서도 고려국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데에 방점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자주성의 시련’등으로 표현한 것도 이같은 고민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를 시기구분하는 용어로까지 쓰게 된 것은 고려시대를 5개의 소시기로 구분하는 이해방식의 적용과 관련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고려사회 매시기 변화와 발전의 모습을 추적하기 위해, 전기와 후기로 단순 구분하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나말여초, 고려중기, 무인집권기, 원간섭기, 여말선초 등의 5시기를 설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원간섭기의 설정이 결코 ‘퇴행’이나 ‘퇴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 쪽에 우선 순위가 놓여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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