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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탄신800주년기념 학술대회 기조강연-민현구-고대명예교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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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4-25 16:58 조회2,5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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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武臣政權 쇠퇴기 高麗 對蒙關係의 변화와 정치적 시련
 
(1)對蒙抗爭의 한계와 崔氏 武臣政權의 붕괴
 
13세기 고려사회의 사정은 무신정권의 동향과 대몽항쟁의 추이로 설명될 수 있다. 1170년의 武臣亂은 고려사회를 크게 흔들었고, 1196년부터 崔忠獻의 崔氏 武臣政權이 수립되어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였는데, 1231년 몽고의 침입을 받아 이듬해 江華로 천도하면서부터 고려는 장기적인 대몽항쟁 태세로 돌입하였다. 그 무렵 최씨 무신정권은 제2대 執政인 崔怡가 최고의 정치적 실권자로서 몽고 침입에 대한 적극적인 항쟁의 방침과 강화로의 천도를 결정짓고, 전쟁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지만, 커다란 국난을 당해 그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논의를 통해 최선의 대책을 수립하기보다는 독자적 위압적 자세로 현실에 대처하였다.
몽고군의 침략 양상은 잔혹하였으나 고려는 대체로 지방 郡縣단위의 거점 중심 방어전으로 대처하였다. 江華의 고려 조정은 방어시설을 갖춘 새 수도로서 江都를 건설하여 안정이 보장된 상태에서 침략이 있을 때에 거기에서 버텨나갔다. 침입이 감행될 때마다 使臣의 왕래가 있었으나 몽고는 出陸과 王의 入朝를 요구했고, 고려는 몽고군이 철수하면 고려해 보겠다는 응답이 거듭되었을 뿐인데,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항전 자세가 바뀌지 않고, 몽고의 침입 의지가 가시지 않는 한 새로운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가운데, 佛力에 의지해 몽고군의 철퇴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大藏經 彫板 사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최씨 정권의 제3대 집정 崔沆이 1249년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이 무렵 고려는 20년 가까이 몽고침입군과 맞아 싸우면서 온 나라와 백성들이 극도로 피폐되어 국력은 소진 되었고, 육지로부터 거두어 강화의 조정으로 들어오는 조세 수입이 격감되었다. 長期戰의 고통이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게다가 최고 권력자에 오른 최항은 賤系의 庶子출신으로 신분적으로 미천할 뿐 아니라 정치적 역량이 그의 祖, 父의 경우보다 크게 뒤떨어졌다. 그는 개관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경직된 抗戰論을 고수하였으며, 民心의 이반과 정권의 弱化를 감지하지 못하였다.
더욱 심각한 상황은 몽고의 침입이 매우 적극화되고 극도로 잔혹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고려가 오래 버텨온 배경으로서 몽고가 여러 방면으로 정벌을 분산시켰고, 또한 몽고에서 帝位가 바뀔 때마다 休止期가 찾아온 해라서 그 침입이 간헐적으로 감행되었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로 들 수 있는데, 몽고 헌종이 즉위한 1251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宋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되기에 앞서 고려 침입에 집중하면서 강도를 높혀서 1253년부터 시작되는 제5차 침입은 1258년까지 거의 매년 전국을 유린하면서 치명타를 입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257년 최항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 崔竩가 제4재 집정이 되자 오래 버티지 못하고 1년 뒤에 최씨 무신정권은 붕괴되고 말았다. 여러 모로 고려가 더 이상 대몽항쟁을 끌어가기 힘든 상황에서, 현실을 무시하고 抗戰論을 고집하는 崔氏政權은 존립될 수 없었다. 일부 文臣과 武臣이 연합하여 그 동안 약화된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몽고와의 講和에 물꼬를 텄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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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講和 . 정치적 갈등 . 外勢개입
 
최씨 무신정권이 붕괴된 이듬해, 즉 1259년 벽두에 고려 조정은 3품 이상 모든 관료가 모여 몽고에 出降하기로 외교적 방향을 정하였다. 곧 太子 倎(뒷날 元宗)이 항복. 강화의 뜻이 담긴 表文을 갖고 몽고 황제를 만나러 입조의 길을 떠났다. 그 동안 몽고 황제가 사망한 상황에서 태자는 중도에서 마침 제위에 오르려고 북상 중이던 쿠빌라이를 만나 환대를 받았고, 거기에서 고려와 몽고와의 평화관계는 어느 정도 약속될 수 있었다. 1260년 그들은 각기 고려 元宗과 몽고 世祖로 즉위해서 곧 兩國 사이에 강화관계를 굳혔다.
몽고 황제 쿠빌라이는 詔書를 보내, ‘衣冠은 本國의 俗을 따른다.’고 하여 고려 의관의 習俗, 즉 고려 문물제도의 독자성을 인정한다는 원칙을 밝혔고, 동시에 몽고 군대의 철수와 고려인 포로와 도망자의 송환을 약속하였고, 그대로 실천하였다. 고려도 稱臣하면서 表를 올려 몽고의 ‘一視同人’ 정책에 감사를 표하면서 충성을 다짐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臣服과 몽고의 고려 왕국 인정을 골격으로 하는 강화가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조속한 기간 안에 고려가 江都에서 出陸해 開京으로 遷都한단느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 당시 講和를 적극 주도하는 사람은 문신의 대표격인 李藏用이었다.
이처럼 전쟁이 가시고, 강화가 이루어졌으나 고려 국내의 사정은 간단치 않았다. 사실상 최씨정권을 잇는 새로운 무신정권이 대두하고, 그것은 점차 反蒙的인 성향을 드러내면서 강화를 주도하는 국왕 및 문신 세력과 대립하였고, 그것이 발전해 극심한 정치적 갈등과 정변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당초 최씨 무신정권은 文臣인 柳璥과 武臣으로 하급장교인 金俊.林衍 등 7인이 연합해 붕괴시켰고, ‘復政于王’, 즉 정치를 왕에게로 복귀시킨다는 것이 변혁의 근본 취지였다. 그러나 하급장교이던 김준이 1260년 宰樞급(知樞密院事)으로 급상승하고, 衛社功臣 1등으로 올라갔으며, 뒤에 종전 무신정권의 최고 실력자가 차지했던 敎定別監職에 임명되었다. 이제 무신정권 체제가 완전히 갖추어져 김준이 그 집정이 되었다.
1262년에 고려 조정은 功臣堂을 수축하고 공신의 초상을 벽에 새기면서 제일 먼저 ‘壬辰年還都功臣 崔怡’를 배치했는데, 이것은 최이가 임진년, 즉 1232년에 고려 조정을 강화로 천도시켜 대몽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으로서, 최씨 무신정권과 대몽항쟁에 대한 재평가인 동시에, 문신. 국왕중심의 강화 추진세력에 대한 견제요, 경고였다. 이러한 반몽적 분위기 아래 고려 조정의 出陸과 開京으로의 還都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에 대한 몽고의 불만과 압력이 거세졌으며, 그 속에서 강화를 적극 추진하려는 국왕과 무신집정 사이에 불신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1368년 쿠빌라이는 사신을 보내 元宗을 질책하면서 고려 정치를 이끄는 김준과 이장용을 몽고로 불러들였다. 김준은 그에 따르지 않았고, 이번에 몽고 사신을 살해하고, 더 깊은 섬으로 천도할 뜻을 피력했으나 원종이 응낙하지 않았다. 김준은 왕의 폐립 문제를 고려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무신 林衍이 왕의 內諾을 받아 그 해 연말에 김준을 살해하고, 그 대신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집권 6개월 만에 임연은 원종을 폐위시키고 王弟 安慶公 淐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비록 왕과 결탁하여 실권자가 되었으나 무신 집정으로서의 임연의 입장은 김준과 마찬가지로 親蒙的인 원종과는 더 이상 공존키 어려운 형국이었고, 이것이 엄청난 정변을 유발시켰다.
원종의 폐위를 몽고가 용납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을 고려 내정에 간섭하는 호기로 삼았다. 이 사태에 대해 임연은 원종이 신병 때문에 동생에게 讓位하는 것으로 꾸며 몽고에 보고하는 사신을 보냈다. 마침 몽고에 갔다가 귀국 중이던 세자(뒤에 忠烈王)이 압록강에 이르러 이 폐위의 사실을 듣고, 인근에서 몽고로 향하던 고려의 사신 일행을 통해 그것을 확인한 다음 발길을 돌려 몽고로 되돌아갔다. 세자는 쿠빌라이에게 임연의 반역상을 보고하고 출병을 요청하였다. 몽고의 군사력을 동원해 임연을 응징하고, 원종을 복위시키려는 것이었다. 쿠빌라이는 세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 3천명의 동원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를 압박했다.
쿠빌라이는 별다른 과실이 없는 원종을 폐위시킨 부당성과 몽고에 알리지 않고 신하가 자의로 왕을 폐립시킨 불법성을 질책하였다. 임연의 고려조정이 金方慶을 사신으로 보내 거듭 원종의 신병으로 인한 양위라고 변명하자, 쿠빌라이는 다시 사신을 보내 원종, 안경공 창 및 임연에게 함께 몽고로 출두해서 시비를 가리도록 명령했다. 출두의 시일을 못박고,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이미 국경에 주둔 중인 군대를 진입시키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임연은 굴복하여 원종을 5개월 만에 복위시켰다. 이렇게 해서 몽고는 고려 왕위를 좌우하는 강력한 외세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3) 武臣政權의 종식과 국가적 위기
 
林衍이 몽고의 압력으로 元宗을 복위시킨 것이 1269년 11월 23일어었는데, 그로부터 약 6개월 뒤인 1270년 5월 14일에 마지막 敎定別監, 林惟茂가 주살당하고, 그 일당이 살해되거나 유배당함으로써 고려 무신정권은 아주 종말을 고하였다. 그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극적인 느낌조차 주지만, 고려로서는 미증유의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복위한 원종은 몽고 쿠빌라이의 命에 좇아 곧 入元하였다. 새해 봄 몽고 수도 燕京에서 쿠빌라이를 만난 원종은 林衍의 廢立 사정을 사실대로 밝혔고, 李藏用도 임연의 반역상을 설명했다. 이로써 임연의 무신정권이 반몽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왕의 행보를 막고 있다는 점을 쿠빌라이에게 확신시켰다고 여긴 원종은 몽고 중서성에 상서하여 과감한 요청을 했다.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바로 權臣, 즉 武臣執政 때문이며, 약간의 군대를 동원해 함께 가서 權臣을 제거하고 開京還都를 실천케 해달라는 것이었다.
몽고군의 힘을 빌려 무신정권을 타도하겠다는 원종의 요청을 쿠빌라이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원종으로서는 이제 더 이상 무신 집정과 정치적 共存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몽고의 군사적 도움을 요청했고, 몽고는 외세로서 고려의 정치에 깊숙이 개입해 반몽적인 무신정권을 타도시키는 일에 기꺼이 나서기로 한 것이다. 원종은 곧 세자와 함께 귀국 길에 올랐는데, 몽고 군대가 護行했다.
한편 고려 국내의 사정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임연은 몽고군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해 지난날의 대몽항쟁을 상기하면서 夜別抄를 州郡에 파견하고, 일번 백성들을 海島에移住시키는 등 전쟁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임연은 근심, 고민 끝에 등창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 林惟茂가 뒤를 이어 敎定別監이 되어 사태를 대처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5월 11일 왕은 中途에서 먼저 使臣을 江都에 보내 신료들에게 모두 舊都인 開京으로 出陸하도록 諭示했다. 강도에서는 대다수가 王命에 따라야 한다고 했으나 임유무는 그러한 衆意를 물리치고 몽고군과의 항전을 선포했다. 하지만 결과는 왕이 개경에 도착하기 훨씬 전인 5월 14일 강화에서 임유무가 그와 가까웠던 洪文系, 宋松禮의 배반으로 誅殺당함으로써 무신정권이 맥없이 붕괴되는 것으로 끝났다. 그 동안의 정변으로 무신정권이 약화되어 있었고, 다시금 몽고군과 정면 대결을 펼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大勢였던 것 같다.
원종의 입장에서는 큰 충돌 없이 무신정권이 깨지고, 뜻하던 개경환도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 다행tm러웠을 터이지만, 실상 이루부터 고려는 새로운 위기 국면에 봉착하였다. 무신정권의 前衛와도 같았고, 抗蒙의 앞장섰던 三別抄가 開京還都에 즈음하여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자 그에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장군 裵仲孫의 지휘 아래 三別抄 부대는 江都에서 반란을 일으켜 武器庫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한 다음 일반 백성은 물론 開京으로 왕을 맞아하러 나간 관리들의 가족들까지 동원해 선박 1천척에 태우고 6월 3일 南으로 향했는데, 그들은 왕족인 承和侯 溫을 王으로 추대해 독립정부를 세우고, 珍島를 본거지로 삼아 활약하면서 크게 떨치기에 이르렀다.
三別抄의 봉기는 그 자체로서 무신정권의 反蒙的 성격을 계승한 독립적 반란세력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고려 조정에 위협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독자적으로 진압할 힘을 지니지 못한 고려로서는 그에 대한 몽고의 대응책과 관련해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약 8개월 전, 임연이 원종 폐위사건을 일으켰을 때, 고려 西北面兵馬使營의 하급 관리인 記官 崔坦이 임연의 반역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투항하자 쿠빌라이는 그것을 빌미로 西京 관하의 54城과 西海道 6城을 몽고 영토로 편입해 東寧府로 삼고 최탄을 장관으로 이명한 바 있다. 이 때 몽고에 入朝하던 도중에 이 사실을 안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최탄의 반란을 성토하면서 서경의 원상회복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0여 년 전 최씨 무신정권이 붕괴되는 혼란기에 동북면 지역에서 그 주민인 趙暉와 卓靑이 兵馬使를 살해하고 返附하자 몽고는 그것을 빌미로 鐵領 以北 和州, 定州지역에 雙城摠管府를 세워 고려 영토를 탈취한 바도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로서는 삼별초의 봉기에 즈음하여 정복적인 몽고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개경으로 환도한 고려 조정은 몽고에 대해 무력한 존재였다. 江都 시절 講和論을 펼치며 武臣政權을 견제해 온 李藏用이 1271년 초 몽고의 압력으로 侍中 職에서 물러나는데, 고려의 국익을 위해 때로는 몽고의 시책에 제동을 걸었던 이장용은 이제 몽고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뿐이다. 전혀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대세를 바르게 판단하고, 거국적 신망을 갖추고, 몽고와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려의 장래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지도력이 절실히 요청되는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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