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탄신800주년기념 학술대회 기조강연-민현구-고대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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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4-25 12:18 조회2,696회 댓글1건본문
본문은 2013년 4.월 19일 안동시민회관에서 열린 [충렬공 김방경 탄신 8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고려대 명예교수 민현구박사의 기조강연을 워드화한 것입니다. 과정에서 오타가 있을 수 있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솔내 김영환
2. 蒙古의 흥기와 국제질서의 개편
충렬공 김방경 탄신 800주년 기념 학술대회 기조강연 (2013.4.19)
13세기 東아시아 情勢와 高麗社會
-金方慶의 救國活動과 관련하여-
閔賢九(高麗大 명예교수)
1. 머리말
2. 蒙古의 흥기와 국제질서의 개편
(1)몽고의 발흥과 정복활동의 확대
(2)쿠빌라이의 大元帝國 건설과 새 世界秩序의 수립
3. 武臣政權 쇠퇴기 高麗 對蒙關係의 변화와 정치적 시련
(1)對蒙抗爭의 한계와 崔氏 武臣政權의 붕괴
(2)講和. 정치적 갈등. 外勢개입
(3)武臣政權의 종식과 국가적 위기
4. 高麗의 駙馬國化와 難局 타개의 向方
(1)三別抄 抗爭의 진압과 高麗. 蒙古 관계의 안정
(2)駙馬國으로의 전환과 日本遠征의 참가
(3)독자적 藩邦으로의 存立
5. 맺음말 : 위기의 難局의 감당자로서의 金方慶
13세기 東아시아 情勢와 高麗社會
-金方慶의 救國活動과 관련하여-
1. 머리말
이 발표문은 金方慶(1212-1300)에 대한 종합적 연구 . 발표의 緖設격으로 그 시대적 정치사회적 배경을 제시한다는 목적 아래 적성되었다. 그의 긴 생애는 13세기라는 大격동기와 맞물리는 것으로, 東아시아 세계는 蒙古의 興起와 그 征服활동의 확대로 요동치고 있었고, 고려도 그 가운데에서 大蒙抗爭을 수행하고 武臣政權의 붕괴를 겪으면서 큰 시련을 극복해야 할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김방경은 그러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 활동하였던 것이지만, 그 자신이 동아시아 세계의 변화와 고려의 국가적 향방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존재이기도 했다.
김방경이 태어나기 6년전, 즉 1206년에 징기스칸의 몽고국이 등장함으로써 동아시아는 물론 유럽 세계까지 크게 뒤흔들어 놓은 역사적인 큰 파동이 개막되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남짓 지나 쿠빌라이(1215-1294)가 등극하여 大元帝國을 건설함에 미쳐서는 아시아의 대부분은 물론 중앙아시아와 동유럽까지를 포함해 세계 대부분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인류역사상 空前의 사실이었다.
이와 같은 몽고의 흥기와 정복활동의 확대는 고려가 그 침입을 받아 대몽항쟁을 벌이는 것과 표리관계를 이룬다. 즉 고려는 최씨 무신정권 아래에서 1231년 몽고의 침입을 받기 시작하였고, 곧 江華로 遷都해 약 30년간 처절한 抗戰을 벌여야 했다. 전쟁으로 국토가 피폐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1258년 일단 講和가 성립되어 전쟁은 멈추지만, 곧 몽고의 외세가 강력히 작용하면서 고려는 정치적 대립 갈등이 심화된 가운데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하였다. 오히려 몽고와의 전쟁 상태가 종식된 이후 고려는 더 어려운 고비를 헤쳐 나가야 했다.
아직도 몽고에 대한 무력항쟁의 미련을 지닌 武臣執政들과 講和를 진전시켜 開京還都를 이룩하려는 國王, 文臣들의 대립. 王室과 연계하여 간섭과 영향력을 증대시키려는 몽고의 획책이 복잡하게 작용하면서 政變이 거듭되었다. 마침내 元(蒙古)의 입김이 작용하여 1270년 武臣政權이 붕괴되자 그것이 곧바로 三別抄의 봉기를 유발시켜 고려의 국가적 위기를 안겨주었다. 그 후 고려는 1274년 元의 駙馬國으로 전환되고, 바로 그 해와 1281년에 걸쳐 日本遠征을 피동적으로 참가하면서 大元帝國의 울타리 안에서 독자적 왕조체제를 지속시키고자 안간힘을 쏟아 생존할 수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숱한 난국에 봉착하였다.
이처럼 13세기의 고려사회는 對蒙관계로 얼룩졌고, 김방경의 생애와 활약이 그것과 연계되어 전개되었다. 특히 그는 講和 이후의 복잡하고 험난한 과정 속에 개입되어 고려 국가의 위기와 난국 타개를 위해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발표문에서는 김방경과 대몽항쟁을 염두에 두고 13세기 국제관계의 변화와 그에 대응하는 고려사회의 모습을 훑어볼 터이지만, 이 시기 고려가 당면한 위기와 난국을 감당했던 인물이 바로 金方慶이라는 管見을 지니고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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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蒙古의 흥기와 국제질서의 개편
(1) 몽고의 발흥과 정복활동의 확대
12세기 초엽 東아시아 세계는 女眞의 金이 일어나 遼를 제압하고 새 强者로 대두함으로써 크게 동요한 바 있다. 그로부터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아 13세기 벽두에 蒙古가 흥기해 아시아 전역과 유럽 일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해 온 세계를 뒤흔드는 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몽고가 일어나 大元帝國으로 군림하는 과정을 간략히 살펴 당시 고려사회의 동향과 김방경의 활동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도록 할 터이지만, 편의상 먼저 쿠빌라이 이전을 묶어 略述하기로 한다.
鐵木眞이 몽고의 여러 유목부족을 통일하고 幹難 하변에서 징키스칸으로 대두한 것은 1206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징키스칸의 몽고군은 놀라운 속도로 정복활동을 펼쳐 먼저 이웃하는 西夏를 쳐 굴복시키고, 이어서 金을 패퇴시켰다. 그리고는 西域을 원정해 중앙아시아의 西遼를 討伐하고 사마르칸트를 공략하였고, 南下해 인더스강의 西岸도 정복했다. 다른 선봉부대는 카스피해의 西岸을 돌아 코카사스산맥을 넘어 南러시아에 침입하였다. 이로써 몽고는 아시아에서 東歐에 걸쳐 광범위한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크게 성취한 징기스칸은 1227년 西夏를 아주 토멸하고 金을 공격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징기스칸을 계승한 太宗(오고타이 卨闊臺)는 1229년부터 1243년까지 14년간 帝位에 있으면서 정복활동을 확대시켰다. 우선 이웃하는 中原 북부 金을 토벌하는 데 나서서, 金과 대립해 온 宋을 부추겨 연맹을 맺고 도움을 받아, 金을 토벌시킬 수 있었다.(1234년) 이 무렵 몽고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었고(1231년) 東眞國을 토벌해 滿洲 지역을 손아귀에 넣었다(1233). 또한 몽고는 金을 없앤 다음 西方 원정에 나섰는데, 바투가 이끄는 15만명의 군대가 1236년 출정을 시작해 멀리 볼가강을 건너 러시아에 침입해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였다. 이어서 폴란드, 독일, 헝거리, 오스트리아에도 침공하여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지만, 1243년 太宗이 사망해 그 소식이 전해지자 몽고군은 진격을 멈추었다. 바투는 그대로 남아 볼가강변을 중심으로 깊착汗國을 설치하였다.
그 다음 짧은 定宗(貴由)代를 지나 1251년 憲宗(몽가)가 帝位에 올라 1259년까지 정복전쟁을 지휘하였다. 그는 동생인 쿠빌라이(忽必烈)에게 大理國과 吐蕃을 공격케 해 승리를 거두었고, 후라구(旭烈兀)에게는 서역지방에 진격케 해 이란을 정복하고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해 압파스왕조를 멸망시켰고, 시리아 以東을 통일해 일汗國을 세웠다. 정작 헌종이 큰 관심을 갖고 출병한 것은 동방의 나라들이어서, 1259년 이후 고려에 연속적으로 타격을 입혔고, 특히 宋에 대해서는 1257년부터 스스로 휘하에 군대를 이끌고 南下해 四川을 공격했다. 이 때 쿠빌라이와 別將 兀良哈臺는 각기 卾州(武昌)과 潭州(長沙)를 포위해 三軍이 다른 방향에서 공략함으로써 宋은 존망의 위기에 몰렸으나 1259년 憲宗이 陣中에서 病死함으로써 몽고군은 물러서고, 宋은 소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헌종대까지 건국 후 53년이 지나는 동안, 몽고는 宋과 高麗를 제외한 아시아 대부분 지역과 東歐를 망라하는 空前의 大版圖를 손아귀에 넣은 大國으로 놀랄만 한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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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쿠빌라이의 大元帝國 건설과 새 世界秩序의 수립
몽고는 憲宗에 뒤이어 쿠빌라이가 1260년 帝位를 계승해 35년간 在位함으로써 새롭게 大元帝國을 건설해 새 역사를 연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도 帝國의 구도와 통치방식을 中國化하려고 해서, 卽位와 동시에 中統이라는 年號를 정하였고, 곧 中原의 燕京에 수도를 정하였으며, 얼마 뒤에는 大元이라는 國號를 정해 頒布하였다. 이제 元은 단순한 유목민족의 蒙古帝國이 아니라 전통적인 中華 王朝의 반열에 편입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쿠빌라이는 징기스칸의 손자로서 諸王의 자격으로 河北 邢州에 領地를 분봉받아 중국의 大總督으로 활약하는 가운데 姚柩, 許衡 등 중국의 儒家的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는 동안 농경사회를 중시하고 투항하는 漢族 관료를 등용하면서 중국식 통치방식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가 동생인 아리크부가(阿里孚哥)를 제압하고 帝位를 굳혔을 때, 그것은 결코 전통적 몽고 유목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汗’의 位가 아니었으며, 그가 중국식의 ‘皇帝’로 부르게 한 것은 상당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엇다.
쿠빌라이는 또 한 이시기 서남아시아 방면으로 진출해 세력을 팽창시켰다. 1277년 출병해서 미얀마에 있던 緬國을 복속시켰고, 캄보디아도 朝貢을 하게 되었다. 남해의 섬들이나 인도의 동. 서해안의 나라들에도 사자를 보내 入朝토록 하였다. 자바가 반항하자 쿠발라이는 3만의 군대를 보내 王城을 공략하였다. 다만 베트남의 경우, 북쪽의 交趾에 대해서는 朝貢을 받고, 다루가치를 파견한 바 있으나 뒤에 반발을 샀고, 남쪽의 占城에 대해서는 복속을 권유하다가 거부당해 出兵했다가 오히려 敗退하는 등 모두 손아귀에 넣지 못해 쿠빌라이 재위 기간 내내 그들과의 긴장과 전운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元의 威令은 도서지역을 포함해 서남아시아에까지 널리 미쳤다.
쿠빌라이는 그가 帝位에 오르기 위해 戰場에서 北上하는 도중에 마침 몽고와의 화친을 위해 入朝의 길에 나섰던 고려 太子 倎(뒷날의 元宗)을 우연히 만났던 일을 계기로 삼아 對고려 관계를 비교적 관대히 처리하면서 결국 고려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당시 고려는 武臣政權 아래에서 오래 對蒙抗爭을 펼치는 동안 지쳐 있었고, 抗戰論과 講和論으 대립, 武臣政權과 王과의 미묘한 권력관계 등 내부사정이 복잡했는데, 쿠밀라이는 王(元宗)을 지원함으로써 高麗는 사실상 元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쿠빌라이는 일찍부터 고려를 통해 일본을 복속시키려는 뜻을 지니고, 그것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했다. 그런데 고려의 開京환도에 즈음해 고려의 몽고 복속에 반기를 든 三別抄軍이 봉기해 기세를 올렸다. 쿠빌라이는 이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몽고군을 고려에 진주시켜 고려군과 연합하여 진압작전을 벌이게 했다. 진도를 공격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진격하여 1273년 三別抄를 완전히 제압하기까지 3년이 소요되었다. 그 후 일본원정이 시작되었다.
당초 쿠빌라이는 사신을 보내 招諭로써 일본을 복속시키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1274년 고려군과 몽고군이 연합해 일본을 원정케 했다. 이것이 태풍으로 실패하자 1281년 두 번째 원정이 이루어졌으나 이번에도 역시 태풍 때문에 실패하었다. 두 번에 걸친 일본원정은 큰 손실을 입혔는데, 고려에도 막대한 부담과 피해를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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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계속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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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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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와우!!! 대단하십니다.
이 많은 자료를 워드화 하시다니...
덕분에 편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