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박팽년은 도고 외가에서 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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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13-04-18 09:35 조회7,661회 댓글2건본문
김일환의 [행복한 아산만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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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온양신문 공동기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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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박팽년의 충의정신은 도고의 외가에서 길러졌다 외조부 김익생에 대한 박팽년의 효심
이중에 복위사건을 주도하며 끝까지 굳은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인물이 박팽년이다. 그런데 박팽년의 외가가 현 도고면 도산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 외조부는 효자로 이름난 김익생이다. 김익생은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키며 조선조에 출사를 거부한 채 도고에 은둔하며 김녕 김씨 도고면 입향조가 된 송암 김질의 아들이다.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은 전의(全義)가 고향이며 세종 5년(1423)에 문과에 장원하여 형조판서를 지냈다. 박중림이 어떤 연유로 김익생의 사위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장자인 박팽년은 강보에 싸인 어린 아기 때부터 도산리 외가에서 유년을 보내며 성장하였다. 이 때문에 박팽년이 외가에서 출생했고 도고가 그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외가에서 자라던 유년시절 외조부모로부터 끔찍이도 큰 사랑을 받았다.
세종 26년(1444) 봄에 박팽년은 안질이 걸린 세종을 호종하여 병을 치료하기 위해 현 충북 청원군에 있는 초정약수를 찾았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도고에 사는 외조부모를 근친하기로 결정하였다. 떠나는 박팽년에게 세종이 가져갈 음식을 내려주자 그는 임금의 지극한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도산리 외가에 도착하니 오랫만에 뵙는 외조모는 더욱 쇠약하여 허리가 굽고 천식이 심하여 이를 보는 박팽년은 절로 눈물이 났다. 당시 그의 외조부 김익생은 70세이고 외조모는 74세의 고령이었다. 김녕 김씨의 족보 내용과는 상이하지만, 박팽년은 당시 외조부가 아들이 없고 자신의 모친이 무남독녀 외딸이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외조부모가 자신을 자식과 같이 생각하고 정성으로 어루만지며 길러주어 비록 외가이지만 그 정리가 각별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성은을 입어 영화로운 자리에 있지만, 먼 고을인 도고에 살고 있는 외조부모는 날로 기력이 떨어지고 있어 자신을 보고 싶어도 상경할 수가 없다. 세월은 물 같이 흘러가는데, 자신이 외조부모의 무양(撫養)한 은혜를 갚지도 못하고 마침내 이들이 돌아가실까 두렵다. 그러니 자신을 아산 부근 소읍의 수령으로 보내준다면 공무를 보는 겨를에 가끔 왕래하며 외조부모님들을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요청이었다. 자신을 길러준 외조부모의 은혜를 잊지 않는 지극한 효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충신은 효문(孝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박팽년의 절의정신은 그가 아산에서 고려왕조의 절신(節臣)인 김질과 효자인 외조부 김익생의 충효정신을 배운 결과라고 여겨진다. 아산이 충절의 고장임은 사육신 박팽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끝으로 단종 복위사건이 일어났을 때 김익생은 이미 타계한 뒤였지만 외손자 박팽년에 연좌되어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성종 21년(1490) 7월 7일에 직첩을 돌려받아 다시 복권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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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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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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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아저씨, 바로 이겁니다.
비밀의 문을 여셨습니다.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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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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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이 글을 보면 박팽년의 외조부는 김녕김씨 김익생이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