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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충렬공을 축수하는 글(도원수김시중축수소)-원감국사 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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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2-12-13 12:41 조회2,749회 댓글0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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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감국사가 충렬공에게 드린 글입니다.  원문과 번역문을 싣습니다.   이 글은 동문선에도 실려있고 원감국사 문집에도 실려 있습니다.

 

 

 

東文選卷之一百十二  
 
 
 
都元帥金侍中祝壽䟽
 
玄關中利生之化。有感必通。朱閥下奉福之誠。無時不篤。况欲征莫測之地。盍先杜未然之虞。恭念賢侯。挺生聖代。曾樹膚功於百戰。遂兼峻秩於兩朝。中奉中贊之竝尊。上將上相之俱貴。貂弁蟬冠之望重。百辟膝行。虎符龜印之威高。三軍肱慄。載駕戎車而分閫。將誅卉服之不庭。萬騎長驅。始似孔明之出蜀。千艘競進。終勝王濬之征吳。如憑覺援於此時。可致凱還於不日。爰羞妙供。特辦熏科。倘玆悃愊之心。契彼圓明之鑒。伏願云云。一帆利涉。坐看倭寇之倒戈。萬旆穩回。行詣舜庭而獻捷。垂功名於竹帛。闘歲月於松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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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 김시중을 축수하는 소[都元帥金侍中祝壽疏]
 

석복암(釋宓菴)

현관(玄關 불문에 들어가는 관문)의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덕화는 감동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게 되옵고, 주벌(朱閥 궁궐)의 아래에 복을 비는 정성은 지극하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하물며 막측(莫測)한 땅을 정벌하려면, 미연의 우환을 먼저 막아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공손히 생각하니, 현후(賢侯)께서는 성대에 태어나서, 일찍이 백여 차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두 왕대에 높은 벼슬을 역임하셨습니다. 중봉(中奉 중봉대부)과 중찬(中贊)이 모두 높은 직위요, 상장(上將)과 상상(上相)이 함께 귀한 자리입니다. 초변(貂弁)과 선관(蟬冠)은 덕망이 중하여서 백관들이 무릎걸음으로 공경을 표하고, 호부(虎符)와 귀인(龜印)은 위엄이 높아서 삼군(三軍)이 팔뚝을 떨면서 명령을 듣습니다. 이제 융거(戎車)를 몰아 왕궁 밖으로 나와서, 장차 훼복(卉服)들을 무찌르려고 1만 군사를 몰아 나감을 제갈공명이 촉(蜀)을 출발하는 듯하고, 1천 척의 배를 출동함은 왕준(王濬)이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보다 승합니다. 이러한 때에 부처님의 도움을 받게 되면 얼마 안 가서 개선(凱旋)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정묘한 공양을 장만하여, 특별한 법식을 차립니다. 이 정성스러운 마음이 부처님의 원명한 거울에 맞으시기 엎드려 원합니다. 운운. 한 돛이 바다를 잘 건너서 왜구(倭寇)들의 항복을 보게 되고, 일만 깃발이 무사히 돌아와서 순 임금 뜰에 첩서를 올리듯 하소서. 공명을 죽백(竹帛)에 길이 드리우고, 세월은 소나무와 참죽나무[椿]처럼 새로워지이다.

 

[주D-001]훼복(卉服) : 섬 오랑캐는 풀[卉]로 옷을 지어 입는다고 해서 일본(日本)을 훼복이라고 말한다.
[주D-002]왕준(王濬) : 중국 삼국시대 말기 진(晋) 나라 사람.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오 나라 서울을 함락시키고 오 나라 임금의 항복을 받았다.
[주D-003]죽백(竹帛) : 예전에 종이를 발명하지 못하였던 때에는 모든 기록을 대[竹] 가지나 비단[帛] 폭에 썼었다. 그래서 역사를 죽백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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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頌)_동정송(東征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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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감국사가송 [ 圓鑑國師歌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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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해동(海東) 조계종(曹溪宗) 제6세 원감국사 원개(元凱)의 가송을 모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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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원개(元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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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감록(圓鑑錄)》이라고도 한다. 활자본. 1권 1책. 동국대학 도서관 소장. 현행 《원감록》은 1920년 송광사(松廣寺)에서 발행한 활자본으로, 해동조계 제6세 원감국사 가송 329편(원집에는 324편)과 문(文) 5편, 소(疏) 46편, 표(表) 5편이 수록되어 있다. 현행본은 당시의 송광사 주지 설월선사(雪月禪師)의 편찬으로, 상현(尙玄) 이능화(李能和)의 중간(重刊) 서문과 목차가 있고, 몽암노인(夢庵老人) 명우불갈(明友不渴)의 어록, 서문과 대사성(大司成) 문한학사(文翰學士) 김훈(金曛)의 국사에 대한 비명(碑銘) ·서(序)가 부록으로 실려 있고, 편집자 기산자(綺山子)라는 승려의 발문이 있다. 원감국사의 시는 문학적 또는 사상적으로 뛰어난 작품이 많아 《동문선(東文選)》에도 그 상당수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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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감국사 [ 圓鑑國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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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년(고종 13)∼1292년(충렬왕 18). 고려 후기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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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명은 위원개(魏元凱). 자호는 복암(宓庵). 첫 법명은 법환(法桓), 뒤의 법명은 충지(冲止). 전라남도 장흥 출신. 아버지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호소(號紹)이며, 어머니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원나라 세조의 흠모를 받았으며, 원오(圓悟)의 법을 이어 수선사(修禪社) 제6세 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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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와 활동사항9세에 경서(經書)와 자사(子史)를 외웠으며, 17세에 사원시(司院試)를 마쳤다. 19세에는 춘위(春闈)에 나아가 장원을 하고, 그 뒤 영가서기(永嘉書記)에 부임하여, 사신으로 일본에서 활약하였으며, 벼슬이 금직옥당(禁直玉堂)에 이르렀지만,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 문하에서 승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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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계를 받은 후, 남쪽의 여러 지방을 순력하면서 수행하다가, 1266년(원종 7) 원오국사의 강권으로, 경상남도 김해의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되었다. 1269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다시 3년 후에는 감로사를 떠나 순천의 수선사로 옮겼다. 이때까지 그는 교(敎)에 더 치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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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사에 온 다음 해인, 1274년 원나라 세조는 탐라에 총관부(總管府)를 두고 우리나라의 전지공안(田地公案)과 별고노비천적(別庫奴婢賤籍)을 관장하게 하며 수선사에서 군량미 명목의 전세(田稅)를 거두었다. 그는 세조에게 「상대원황제표(上大元皇帝表)」를 올려 어려운 사원경제를 알리고, 빼앗겼던 전답(田畓)을 되돌려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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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그를 흠모하여 청하자, 1275년(충렬왕 1) 개경을 향하다가 충청도 웅천(熊川)에 이르러 병을 이유로 상경할 수 없다고 글을 올리고 청주(淸州)로 갔다. 청주의 화정사(華井寺)에 머무르던 중, 조정에서 다시 불러 원경(元京)에 도착하자, 세조는 빈주(賓主)와 스승의 예로 대하였으며, 귀국한 다음 해 충렬왕은 대선사의 승계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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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청주의 현암사(玄巖寺), 청주 진각사(眞覺寺), 천호산 개태사(開泰寺) 등지에 머물렀다. 1283년 11월에는 원오국사가 선원사에서 수선(修繕)하여 수선사로 옮기던 거란본대장경을 도중에서 맞이하여 나누어지고 왔고, 「단본대장경경찬소(丹本大藏經慶讚疏)」와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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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4년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옮겼고, 1286년 2월에 원오국사가 왕에게 수선사의 사주(社主)로 그를 추천하고 입적하자, 그 해 6월에 수선사의 제6세가 되었다. 1271년 여름 합단적(哈丹賊)의 난을 피하여 고흥군 불대사(佛臺寺)에 잠깐 머문 것을 제외하고 수선사에서 교화 생활에만 몰두하며 수선사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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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2년 1월 10일 문인들에게 설법과 게송을 남긴 뒤 법랍 39세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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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세계와 사상불교의 삼장(三藏)과 사림(詞林)에 이해가 깊었고, 문장과 시로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수선사 제1세였던 지눌의 순수 선(禪) 시대와는 달리 유학사상과 상교(相交)하는 선풍(禪風)을 풍기고 있다. 그래서 충지는 유사(儒士)들처럼 천명을 믿고 운명에 안주하는 유·선(儒禪) 조화의 사상 조류를 보였고, 상제상천(上帝上天)의 신앙을 통하여 유교와 도교를 불교 속에 수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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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풍은 무념무사(無念無事)를 으뜸으로 삼았고, 지관(止觀)의 수행문 중 지(止)를 중시하였으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여 지눌의 종풍(宗風)을 계승하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1권이 남아 있으며, 『동문선』에도 시와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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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과 추모충렬왕은 원감국사(圓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부도는 송광사 남암(南庵)의 옛터 북쪽에 있으며, 입적 후 22년 만인 1314년(충숙왕 1)에 문인(門人) 정안(靜眼), 진적(眞寂), 신열(神悅) 등이 원감국사비를 세웠으나 그 뒤 병화(兵火)로 파괴되었고, 약 200년 전에 시안(時安), 찬현(贊玄) 등에 의하여 그 자리에 중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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