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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목사 김공 전성각적비명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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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12-10-25 20:33 조회2,7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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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민전성각적비 탁본

 

김시민장군전공비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기록해 놓은 비로, 일명 ‘진주전성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불리우며,
현재 진주성내에 비각을 마련하여 모시고 있다.

 

김시민(1554∼1592)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비문에는 1천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10만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하나, 다른 기록에는 3,800여명의 병력이 왜군 2만
여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되어 있다. 영남에서 호남
으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길목이 되던 이곳을 지킴으로써 왜적의 호남진출을 막아내어, 
불리했던 당시의 상황을 뒤집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비는 받침대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 조선시대 석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광해군 11년(1619) 7월에 비를 세웠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1987년에는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의 혼을 위로해주기 위해, 비의 뒷편에 ‘계사순의단
(癸巳殉義檀)’을 건립해 놓았다.

 

<번역문>

고목사(故牧使) 김후시민(金侯時敏) 전성극적비(全城郤敵碑) <篆題>

아하! 急病에서 양이(攘夷 : 오랑캐를 물리침)를 한 것은 충성심이 격동했기 때문이요 죽음
으로 지키면서 가지 아니한 것은 의로써 결단했기 때문이며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적을 물리친
 것은 용맹을 떨쳤기 때문이니 이 세가지를 능히하여 轟轟하고 烈烈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빛낸 이는 故牧使 金侯이시다. 만력 임진년(선조 25, 1592년) 4월에 왜노들이 
傾國으로 入寇하여 바로 三都를 찌르고 팔로(八路 : 전국)에 충척(忠斥 : 꽉매움)하여 난여
(임금의 수레)가 霜露에서 지내게 되어 묘사(廟社 : 종묘와 사직)가 風廛을 입게 되었다.
여기에서 때를 따라 열읍이 바람을 만난듯이 奔漬되어 앞질러 숨고 뒤질 것을 두려워 하였는
데도 홀로 金侯께서는 본주의 通判으로써 몸을 殉國에 허락하고 눈물을 뿌리면서 많은 무리
들을 깨우쳐서 泗川과 固城의 賊을 추격하고 왜장이 진해에 웅거해 있는 자를 사로잡아 행재
(行在 : 임금이 임시로 있는 것)로 보냈으며 군사를 이끌고 금산으로 달려가서 다른 적진을 
파하였다. 이리하여 크게 威勢를 떨침으로써 開寧과 錦山의적으로 하여금 모두 듣고 바람처럼 
퇴거케 하였으니 충성의 격렬한 때문이 아니겠느냐?
관군이 출전하여 아직 돌아오지 못한 날에 왜적들이 빈틈을 타서 바로 범한다는 보고를 듣고
서는 길을 배로 하여 빨리 달려서 즉시 성중으로 들어와서 전단(田單 : 중국 전국시대의 장수)과 
즉묵(卽墨 : 역시 중국의 충신이름)의 수완을 휘두르고 장 순(張巡 : 송나라때 장수)이 회양(淮陽 : 
중국의 거명)에서 행한 뜻을 가다듬어 살기를 구차스럽게 취하지 아니하고 죽음으로 기필코 
成仁하였으니 의로써 결단코 때문이 아니겠느냐?
월운(月暈 : 달무리)처럼 바야흐로 급한 때에 개미같은 원병도 이르지 않았지만 밤낮으로 성을 
순시하며 소와 술로 군사를 먹이고 화한 얼굴로 술잔을 높이 들어 피리를 불고 거문고를 울리어 
군사들의 정세를 스스로 지키고 믿게하여 두려움을 없게 하였으며 기틀을 타고 때에 응하여 
갑자기 神怪한 계책을 내어 몸소 士卒보다 앞장섰으며 피를 마시고 싸움을 독려하여 적의 세력을 
크게 좌절케하고 적의 시체가 삼쓰러지듯 하였으며 외로운 보루에서 치우친 군사가 실제로 
천명에도 차지못했는데 능히 수십만의 적을 물리쳤으니 용맹의 떨침때문이 아니겠느냐?
충이 이와 같고 의가 이와 같으며 용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큰 뇌우와 晦冥에 적도가 놀래어 
미혹되고 혼을 뺏기어 밤을 타서 도망하였다. 하늘이 도왔으랴? 성을 에워싼지 6주야에 민심과 
천의가 더불어 함께 하였고 仇人마저 사랑한 것이다. 하늘이 도우고 사람이 사랑하였는데 또 
怪夫가 만물을 명령하고 아이들의 장난도 많고 심했던 것인가? 적이 물러가던 날에 마침 적의 
流砲때문에 마친 바가 되어 營에서 별처럼 운명을 고했으니 長城이 홀연히 무너지는 듯 하였다.
오호! 슬프고 오호! 슬프도다. 조정에서 김 후의 공을 가상히 여기에 처음에는 목사로 승진시키어
관질을 더하였고 이어서 총병을 擢拜토록 명령하였으며 마침내는 大司馬로써 추증하였으니 
褒崇한 은전도 또한 지극하였다. 주민들이 추모함을 알지 못하여 서로 더불어 눈물을 떨어뜨리고 
돌을 세워 鴻功을 길이 알게 하고자 꾀하더니 때마침 南相國, 以興이 여기에 관으로 와서 이에 
古老에게 詢諮하고 이르기를, “김목사가 성을 보전한 공은 실로 우리나라에 변란이 있은 이래로 
아직 있지 못했던 일이니 민멸되어 전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 금석에 새기어 영구토록 
도모해야 한다.”라 하고 곧 백성에게 기록하기를 명령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삼가히 頓首하고 
나아와서 이르기를, “아하! 우리 후의 충과 의와 용은 비록 고인에게서 구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후께서 만약 계셨더라면 계사(癸巳 : 임진년의 다음해)의 적은 반드시 
진양을 원수로 삼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내 세분의 장수가 遠鶴이 되고 萬卒이 沙▨으로 화했으니 
때이던가? 운명이던가?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구나!”라 하였다. 후의 휘는 시민이요 자는
勉吾며 안동인이니 경성에 세거하여 대를 이어 관면(冠冕 : 높은 벼슬)을 살았다. 宣廟에서 宣務
功臣으로 기록하고 上洛君으로 봉하였다.

명을 지어 이르노니,

기상은 날카로우면서 굳세었고 바탕은 毅然하고도 溫和했네
의로써 줄기를 삼고 충으로써 뿌리를 삼았네.
성을 온전히 하고 적을 물리친 것은 그의 공이요. 왕사에서 죽은 것은 그의 이로다.
진산이 峨峨하고 晋수가 洋洋하네.
한덩이의 돌은 천추로 갈 것이니 산은 높고 물은 길었도다.

만력(萬曆) 47년(광해군 11, 1619년) 기미 7월
주인(州人) 진사(進士) 성여신(成汝信)이 짓고, 생원(生員) 한몽인(韓夢寅)이 씀.

 


▲ 김시민전성각적비 비각


▲ 김시민전성각적비


▲ 김시민전성각적비 개석


▲ 김시민전성각적비 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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